본문 바로가기
섬여행기 및 정보/- 남해

환상의 남해섬 해안도로 드라이브(2) - 남해도 남부(금산~미조항)

by 혜강(惠江) 2006. 7. 4.

남해도

환상의 해안도로 드라이브(2)

 

남해도 남부 : 금산 보리암, 송정해수욕장, 미조항

 

 

·사진 남상학

 

 

남해 금산

 

  누군가가 남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끝없이 펼쳐진 해안도로, 출렁이는 은빛 바다, 기백이 있게 솟은 산, 수평선 아래 점점이 뿌려진 작은 섬들. 조물주가 잠시 공평을 잊은 듯하다’고.  달리는 차 안에서 보니 앵강만 건너편으로는 남해 금산이 우뚝하고, 여수만 저편에는 여수반도와 돌산도가 빤히 건너다 보인다.

  아무리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위주로 한다 해도 여기까지 와서 금산을 그대로 지나칠 순 없는 일이다. 더구나 지난 번 금산에 올랐을 때는 안개로 가득 차 운무만을 감상하는데 그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간을 쪼개서 금산을 다시 오르고 싶었다.  더구나 오늘은 그때처럼 안개가 짙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비단으로 휘두른 남해 금산(錦山)

 

  남해 금산(錦山)은 바다와 섬으로 이뤄진 한려해상국립공원에서 유일한 산악관광지다. 남해군 이동면과 삼동면에 걸쳐 있는 금산은 예로부터 남해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렸을 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일찍부터 수려한 경관으로 이름나 많은 여행객들이 찾고 있다. 

   바다 청명한 날엔

   남해 금산을 다시 가네.
   가는 길엔 홍진의 세월

   눈 감고 귀도 닫고 잔가지에
   솔잎 꽂히는 소리만 들으라네.
   묵은 옷 발아래 벗고

   하늬바람 산그늘 따라
   흔들릴 때도 군말 없이 그 별빛

   푸를 때까지 고개 들지 말라 하네.

      - 고두현의 ‘산할미꽃’에서 

 

  산기슭에 있는 보리암과 쌍홍문을 중심으로 수없이 흩어진 갖가지 기암괴석들은 저마다 전설을 가지고 있어 흥미롭다. 주봉인

망대를 중심으로 왼쪽에 문장봉·대장봉·형사암, 오른쪽에 삼불암·천구암 등의 암봉(巖峰)이 솟아 있다.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을 비롯하여, 삼사기단(三師祈壇)·쌍룡문(雙龍門)·문장암(文章岩)·사자암(獅子岩)·촉대봉(燭臺峰)·향로봉(香爐峰) 음성굴(音聲窟) 등 금산 38경을 이루는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그리고 눈 아래로 보이는 바다와의 절묘한 조화는 명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특히 보리암은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전국 3대 관음 도량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그 밑에는 해수관음보살상이 바다를 향해 서있다.

   금산은 복곡 매표소에서 보리암을 거쳐 정상에 오르는 길과 상주 해수욕장에서 오르는 두 가지 코스가 있다. 그 중 복곡 매표소 방향은 관광버스나 승용차로 복곡 저수지에 주차장에 주차하고 금산 8부 능선까지 셔틀버스로 올라갈 수 있어 나이 든 사람이나 단 시간에 오를 사람이 이용하면 좋다. 

 

  이 산에는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전해져 온다. 이 산의 옛 이름은 보광산인데, 그것은 신라 때의 승려 원효(元曉)가 이 산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절을 지었기 때문에 생겼던 이름이다. 그러다가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우기 전에 이 산에 들어와 기도를 드리고 임금이 된 후 그 영험에 보답하는 뜻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준다는 의미에서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錦山)’이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전설만큼이나 금산은 비단으로 온 산을 두른 것처럼 아름답다. 기암괴석들의 파노라마가 절경을 연출하는데다 남해를 한눈에 굽어보고 있어 전망도 장쾌하다. 금산은 681m로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만만치 않아 정상까지 오르는 데는 한두 번쯤은 숨이 차다. 하지만 중간 중간에 쉴 만한 공간이 마련돼 있어, 여기서 쉬면서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남해바다를 바라보는 맛은 잊을 수 없다. 

 

   남해 금산에 오르니
   산줄기가 뚜벅뚜벅

   바다로 걸어 들어가네.

   한 줄기 바람

   말갛게 얼굴 씻고 
   하얀 비단 한 자락 끌고 와서

   맨발로 달려가네.

   아늑한 안개

   살금살금 발목에 차오르면
   홀로 고고한 바위섬은

   지상에서 영원히 함몰하듯 
   순간 자취를 감추네.

   안개 속에 아득히 묻히는

   이 현기증, 먼 우주로의 유영(遊泳) 
   모든 것 쓸어간 자리에

   난생 처음 경험하는 무중력 상태 

   낯선 나라의 백성이 된 듯

   스물거리는 안개 속의 
   이 신묘한 변신(變身)

   영혼마저 투명해 지는 것일까

   나 이대로 청청한 나무에 기대어 
   금산에 묻혀

   영원히 살고 싶네.
   안개처럼

   바람처럼 

 

    - <졸고>  ‘그곳에 살고 싶네(남해 금산) 전문 -

 

  이 글이 금산에 올라 느끼는 감정을 단선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남해 금산을 가장 강렬하게 사람들 인식 속에 심어준 문학작품은 지금으로서는 이성복의 ‘남해 금산’일 것이다. 읽고 나면 아득해지는 작품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의 ‘남해 금산’에서

    그는 “남해에 오면 왠지 나른해지는데 그것은 ‘나’라는 음절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남해 금산’에 대해서도 “사실 내 정신 속의 남해 금산은 ‘남’자와 ‘금’자로 그 부드러운 ‘ㅁ’의 음소로 존재한다”고 했다.(이성복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중). 그렇다면 그의 금산은 그저 관념 속의 ‘비단길’일 뿐일까.

 

  그런데 송수권 시인은  남해 금산에서 보여주는 '돌'의 이미지는 남근의 상징이며, 그 남근을 적시는 바위는 풍요로운 생산이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돌을 소재로 하여 신화적인 요소를 곁들여 사랑의 영원성을 노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산 정상의 봉화둑 터에 오르면 한려수도의 절경이 내려다보이고, 동북쪽 산자락 밑으로 상주해수욕장이 펼쳐져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산자락이 내려앉은 해변에 펼쳐진 해수욕장은 비단 같은 산자락과 더불어 한층 조화를 이룬다.

 

 


멋스러운 상주, 송정 해수욕장  

 

  남해군 최대의 해수욕장인 상주해수욕장은 일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상주해수욕장의 흰 모래는 약 2km 띠를 이루며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하얀 모래밭, 푸른 해수면,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선 진녹색의 소나무방풍림이 어울려 시원스런 색채의 향연을 연출한다. 

 

 특히 이곳은 마치 산속에 와 있는 듯 원시의 공기를 내뿜는 소나무방풍림이 유명하다. 잔잔한 수면을 미끄러진 바다바람이 소나무방풍림의 솔향기와 어우러져 사방에 기운을 뿌려대면, 이내 그 기운이 전신을 휘돌아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상주해수욕장에는 숙박업소, 음식점 등의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교통도 편리해서 하룻밤 묵어가기에 좋다. 

 

 상주에서 동쪽으로 20분 거리에 있는 송정해수욕장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은 상주해수욕장만큼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미가 일품이다. 물론 숙박이나 편의시설도 상주보다는 못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자연스런 멋스러움이 배어 나와 상주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김만중의 유배지 노도(櫓島)는 외롭게 떠있고 

 

  상주해수욕장에서 송정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가면 ‘서포 김만중 유허(西浦 金萬重 遺墟)’라는 표지석이 있는 마을입구를 만난다. 이곳에서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벽작개'라 불리는 벽련마을이다. 노도는 벽련마을에서 약 2㎞떨어진 거리에 외롭게 떠 있다. 벽련마을에서 배로 10분 정도 걸린다. 옛날 이곳에서 배의 노를 많이 생산했다 하여 노도(櫓島)라 부른다는 이 섬으로 들어가는 여객선은 없지만 섬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했다. 이 섬에서 서포 김만중은 만년에 유배생활을 했다.

  서포는 잘 알려진 대로 유복자였고 ‘구운몽’ ‘사씨남정기’등의 소설을 남긴 문학가였다. 주류 양반사회에서 천대받던 소설을 부여잡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문학관도 놀랍지만 그는 그마저도 한글로 작품을 썼다. 그 시절 주류사회 출신으로서 우리말 우리글 숭상론을 주창한 서포의 문학관은 다분히 민중적이다.

  김만중은 숙종 연간에 저 유명한 장희빈사건을 둘러싸고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한 서인 출신의 정치가였다. 이미 몇 차례 유배를 경험한 그는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던 숙종의 뜻에 격렬히 반대하다가 남해에 가극안치(加棘安置) 당하는 형벌을 받는다. 이는 가 시울타리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라는 뜻으로 유배지의 가옥 안에만 머물라는 말이다. 섬속의 섬으로, 다시 그 섬 속의 초옥 속에 가둔 잔인한 벌이었다.
  

 

  불과 0.41㎢ 넓이의 작은 섬 노도에서 「구운몽(九雲夢)」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등을 집필했다. 당시 숙종이 장희빈에게 반해서 인현왕후 민씨를 내쫓은 사실을 풍자하기 위하여 서포는 이곳 노도에서 지극한 사모(思慕)의 정으로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썼다.

   그리고 자기가 파놓은 옹달샘의 물을 마시고, 솔잎 피죽을 먹으며 근근이 연명하다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인지 노도는 더욱 외롭게 보였다. 그러나 앵강만과 남해 바다의 푸르름이 서포 김만중 선생의 문학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이 아닐까. 남해는 김만중 선생 외에도 「화전별곡」을 노래한 자암 김구 선생 등  많은 유배객들이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고장으로 이름난 곳이다. 

 

바라보이는 섬이 서포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한 노도섬

 

미항(美港) 미조리로 가는 꿈길 드라이브

 

  이제 차는 남해도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미조항을 향해 달린다. 미조항에 가려면 보통 상주해수욕장과 송정해수욕장을 거쳐 1km쯤 가면 3번 도로 분기점이 시작되는 도로를 만나게 되고, 여기서 우회전하여 2km 정도가면 미조항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미조항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3번 도로 분기점까지 가지 말고 상주해수욕장에서 우회전하여 깔끔하게 단장된 16번 해안도로를 타고 가야 한다. 이 도로를 찾아가는 맛은 호젓한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다. 이 해안도로는 맑고 깨끗한 설리마을의 해변, 미조항의 앞바다에 오롱조롱한 섬들, 항아리처럼 움푹한 송정해수욕장의 경치를 조망하기에 좋다. 

 

  미조항 쪽으로 이어달리기 하듯 줄줄이 늘어선 조도, 호도, 노도 등과 자잘한 바위섬들이 연출해내는 바다풍경은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과 어울린 산자락, 산자락에 달아 만든 다랑이 논밭을 끼고 오르내리며 가는 꼬불꼬불한 고갯길은 환상의 드라이브를 연출한다. 통행하는 차량이 거의 없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호젓함이 있다. 

 

  미조항 들머리 야트막한 언덕에는 거친 바닷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빼곡하게 심어 놓은 짙푸른 방풍림이 눈에 띈다. 이 방풍림이 천연기념물 제29호 '미조리 상록수림'이다. 서로 뿌리와 어깨를 맞댄 채 항구 쪽으로 길게 늘어뜨려진 이 상록수림에는 느티나무와 팽나무, 후박나무, 돈나무 등 15종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멋에 취해 나지막한 고개를 막 넘어서면 남해 최남단 항인 미조항이 나타난다. 미조항은 어항(漁港)이자 미항(美港)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어선 자잘한 섬들과 금새 파도에 씻겨갈 것처럼 자맥질을 계속하고 있는 바위섬. 등대가 지키는 방파제 안으로 선창가에 늘어선 어선과 나드는 고깃배, 그 위로 솟아오르는 바닷새들. 잔잔한 미조항 앞바다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구 주변의 풍광도 빼어나거니와 고깃배들로 분주한 선창에는 어항 특유의 활기와 생명력이 가득하다. 남해군은 미륵신앙과 관련된 곳이 많은데, 이곳 미조(彌助)는 ‘미륵이 돕다’라고 풀이된다. 미륵의 수혜를 입었음인지 미조항은 일찍이 풍부한 수산자원을 맘껏 향유하는 남해의 어업전진기지로 자리했다. 어선만 해도 150여 척으로 멸치, 갈치, 삼치, 넙치, 도다리 등이 주 어종이라 한다. 


  이른 새벽 일찍 나가면 수산업협동조합 위판장에서 좋은 구경거리인 활어경매를 볼 수 있다.  밤새 그물을 올려 만선으로 돌아온 배들이 잡아온 고기를 위판장에 부린 다음 경매로 사고파는 풍경은 생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리얼한 경쟁을 필요로 하는지 한 눈에 간파할 수 있다. 배가 들어오는 순서대로 위판장 곳곳에 갓 잡아온 고기들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사람들의 움직임은 부산해진다. 

   비릿한 갯내음이 풍기는 골목에는 생선을 다루는 아낙네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다. 비록 예전 같은 호황은 아닐지라도 바다를 끼고 사는 사람들의 체취가 흠뻑 묻어난다.  미조항에서는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다.  특히 회로 먹는 생선의 맛은 이곳 수역을 따를 곳이 없다고 현지인들은 자부한다. 때문에 미조항 횟집들은 주말이 되면 언제나 북적인다. 횟집들은 주로 자연산을 고집하는데, 도다리와 우럭, 놀래미, 참돔, 넙치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멍게와 해삼도 해녀들이 갓 잡아온 것을 쓴다.

 

  이중 특히 찾는 이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이 갈치회와 멸치회. 멸치회는 뼈를 발라 그냥 먹어도 좋지만 초고추장과 버무려질 때 그 맛이 절묘해 진다. 비린내가 없는 갈치회는 부뚜막에서 막걸리를 발효시켜 만든 일명 막걸리식초를 넣고 맛을 내어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미조항은 청정해역 남해의 미항(美港)이자 미항(味港)이다.

 

 


  서울에서 남해도 남단에 있는 미조항까지 찾아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교통이 여의치 않았던 60년대 후반까지도 큰마음을 먹고 와야만 가능했다. 그런데 그 시절 단지 호기심만으로 찾아왔던 어느 가을날, 나는 뉘엿뉘엿 해지는 미조항의 아름다움에 취한 채 한 동안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끝자락이라는 단순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섬들을 무작정 그리워하면서 살았던 내 인생의 삶이 여기서 완성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냥 그런 느낌으로 취한 듯 미조항에서 기우는 저녁해에 기대어 한 편의 글을 쓰고 있었다. 

   
   내 인생의 끝이

   이만하면 좋겠네

 

   허겁지겁 끝없이 달려온

   이 길들일 수 없는 자유 
   해거름이 깔리는 저녁 이쯤에서

   나의 발길 끝났으면 좋겠네 

   길은 연이어 끝이 없고

   그 길을 따라 열병하듯 늘어선 
   수수밭 이삭 끝에 빛나는 햇살이듯

   그 촉수(觸手)에서 익어가는 
   기나긴 나의 여정 

   이제 가을이 와서

   단풍이 짙었는데
   금산(錦山)이 이곳까지 내려와

   저무는 바다에 머리 풀고 
   깊은 사색의 잠을 청할 때 

   나를 품어 안을

   깊은 물 속 가슴 언저리 
   그 속으로 깊이 잠수하면

   그 곳이 당신의 하구(河口)일까 

 

   자나 깨나 꿈꾸어 온 곳

   아득한 수평선 위로
   멀리 가까이 나를 기다리는

   그리운 자식 같은 섬들 

   이 조용한 항구의

   낙조를 즐기는 하얀 물새처럼 
   호젓이 날개를 접고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겠네.

      -
  <졸고> '미조항에서’ 전문

 

 

  그날 썼던 내 시를 다시 음미하며 오늘은 미조항에서 여장을 풀고 싶었다. 바닷새 울음이 어둠 속에서 멀어지고 있을 무렵 난 평온한 행복감으로 잠들 수 있었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