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족 및 교회, 학교/- 가족

회장 선거에서 떨어진 손녀와의 대화

by 혜강(惠江) 2006. 3. 10.

 

 

회장 선거에서 떨어진 손녀(서연)와의 대화 

 

 

- 피아노연주회 출연 때(1학년)의 모습 -

 



    3월 초였습니다. 그 날은 초등학교 2학년 된 손녀를  태우고 피부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가는 날이었습니다.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학교에서 만나자마자 손녀가 내게 말했습니다.


   “오늘 학급 부회장 선거에서 한 표 차이로 아쉽게 떨어졌어요.”  


  한 마디 던지는 말 속에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반장을 이 학교에선 회장이라고 부르나 봅니다.


   “그랬어?  괜찮아. 다음 기회도 있으니까 그 때 해도 되지 뭐”


  이렇게 말했지만, 표정을 보니 아쉬움은 쉽게 풀리지 않는 기색이었습니다.  분당에 있는 병원까지 가면서 손녀와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번이 제1기인데, 1기에 되었으면 좋았는데 ~ ”   (1년에 몇 번 선거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1학기를 1기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제가 잘못 했나 봐요. 저는 다른 친구를 찍었거든요. 왜냐 하면 저는 인기가 많아서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인기'라는 말 자체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요즘 흔히 쓰는 말이라 그냥 듣고 지나쳤습니다.   

 

   “응 그랬구나. 다른 친구를 찍은 것은 아주 잘한 거야”  

 

  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1학년 때 포스터그리기에서 창의력 최고상을 탔고, 줄넘기 대회에서 1학년 최우수상, 발표력도 좋아서 말하기 대회에서도 상을 탔거든요.”


    “그래, 우리 서연이 잘 하는 것 할아버지도 알지”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손녀에게 위로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네 아빠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계속 공부도 잘 해서 반장을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일부러 안 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마지막 기회에 반장을 했어.  능력이 안 되어 못한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그냥 안 한 거야"


   내 말을 진지하게 듣던 손녀는  좀 위안이 되었는지 어른스럽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젠 괜찮아요.”  

 

  그러면서 또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저를 찍었으면, 좀 복잡해졌을 거예요. 동점이 되었을 테니까요”   

 

  안심이 된 듯 해서 나는 짓궃게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후보로 나서서 아이들 앞에서 무어라고 했니?”


  소위 소견발표를 어떻게 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는 2학년 5반 남서연입니다. 저를 뽑아주시면 우리 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듣고 보니 아이들이 하는 보통 수준의 아주 평범한 소견발표 내용이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손녀는 말을 이어 갔습니다. '어떤 애는 학원에 나가 열심히 준비했는데 후보에도 못 올랐다'며, 자기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아서 오늘 선거가 있는지도 몰랐고, 아무 준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요즘 문화센터 같은 데서 ‘새 학기 반장선거 대비강좌’를 연다는데, 어쩌면 그 아이는 그런 데서 철저하게 준비한 듯했습니다.  또 얼마 전 들은 얘기지만 학년 초만 되면 어떤 극성 학부모들은 친한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아이를 반장으로 뽑아달라고 로비를 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반장 선거를 앞두고 페밀리 레스랑 같은 데로 반 전체 아이들을 초청해서 선심을 쓰는 풍경도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들, 며느리는 그런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고, 관심이 있다 해도 병원(치과의원) 일이 너무나 바빠서 신경 쓸 여유가 없이 살아갑니다.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녀는 내게 다부지게 말했습니다.  '다음에는 이렇게 말해야지' 하면서, 즉석에서 소견 발표의 내용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손녀는 놀랄 만큼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그리고 그 내용 속에는 이목을 끌 수 있도록 자기 이미지를 살려 보이려는 적극성이 엿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곡을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며 특별 이벤트를 벌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손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런 아이디어, 이런 생각을 할 정도라면,  회장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뛰어난 능력을 이미 갖추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손녀가  '회장을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구나' 싶어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그래 넌 지금도 충분한 능력이 있어. 앞으로 얼마든지 회장을 잘 할거야.  하지만 회장(반장)이 되려면, 다른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해.  ‘내가 뭐든지 최고'라고 생각을 해선 안 돼.  명품을  입고 잘난 척 해서도 안 되고, 친구들에게 겸손해야 하는거야.  그리고 친구들에게 많이 양보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해.  친구들에게는 밝은 표정으로 먼저 '안녕!'
인사를 해라. 우리 서연이 이렇게 할 수 있지?”

   “네,  할아버지 꼭 그렇게 할 거예요.” 

 

  손녀는 더욱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손녀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좋은 경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가 언젠가는 큰 무대에서 보람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라며 손녀와의 대화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