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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터키.그리스

이스탄불 : 역사 문화의 보고(寶庫), 서양과 동양의 길목

by 혜강(惠江) 2005. 12. 7.

 

터키 이스탄불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

서양과 동양의 길목 이스탄불을 찾아서

 

 

글 · 사진 남상학

 

 

 

 


 
호기심 속에 찾아간 터키


 

  마치 친선 경기처럼 월드컵 4강전을 치룬 파트너의 나라, 한국전에 참전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한국을 '피로 맺어진 형제'(칸카르데쉬)라고 부르는 나라, 조상의 기원을 동양에 두고 기마 유목민족으로 서양에 진출한 강인한 민족성을 가진 나라.

  우리와 같은 알타이족에 속하여 문장 구성, 문법 등에서 유사한 특징을 가진 나라, 낯선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주는 따뜻하고 친절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 동양과 서양의 길목에서 동서(東西)·고금(古今)·성속(聖俗)의 문화를 함께 어우르고 있는 나라.

  그래서 전국토가 야외 박물관 같은 나라, 마치 흥망성쇠의 세계사를 축약하여 기록한 것 같은 아나톨리아 반도국의 나라 등등.  터키 관련 서적과 인터넷,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각종 자료를 검토하고,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하여 터키 서남부를 거쳐 내륙지방 카파도키아를 경유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10일간의 여행을 계획하였다. 

 

   '이스탄불-차낙칼레(트루바)-베르가마(버거모)-이즈미르(서머나-에페수스(에베소)-파묵칼레-안탈랴-콘야-카파도키아-이스탄불’의 코스. 이 여행에서 터키의 유럽지역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는 것은 배편을 이용하고, 마지막 카파도키아에서 이스탄불로 오는 것은 비행기를, 나머지 전 과정은 전용버스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세계의 중심 이스탄불
 

 

 

  세계 관광객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이스탄불, 숱한 문명이 피고 진 역사의 현장을 방문한다는 호기심으로 들떠 있는 동안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11시간의 비행 끝에 어느 덧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안착했다.   여름 날씨답게 날씨는 무척 무더웠으나, 이스탄불의 첫 인상은 국제도시로서 상업, 문화, 금융의 중심지답게 활기가 있어 보인다.

   이스탄불은 3,500㎢의 면적에 인구가 1,200만 명이나 되는 터키의 제1도시이며, 아시아와 유럽의 양 대륙에 걸쳐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유럽 쪽에서 볼 때 이스탄불은 유럽의 남동쪽에 있다.  도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유럽 쪽에 있는 두 부분 즉 골든 혼의 남쪽 지역에 있는 역사적인 반도(구시가지)와 북쪽의 갈라타 지역(신시가지), 그리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아시아 지역이다.

   유럽 지역은 상업의 중심지이며, 반면에 아시아 지역은 거주 지역이다. 이스탄불은 북쪽의 흑해와 마르마르 해를 잇고, 유럽과 아시아를 양분하는 보스포러스의 양쪽에 건설된 셈이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세계 역사의 초점이 되었던 이스탄불은 기원전 7세기경 도시를 건설한 지도자 메가리아 인의 전설적인 장군 비자스에 의하여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330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동부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로 바뀌었고, 1453년 오스만이 이 도시를 정복한 후에는 이스탄불로 불리면서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1,600여 년 동안 거대한 제국의 수도라는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제왕들은 세계적인 제국 건설이라는 꿈과 함께 고도의 높은 문명을 일으켰고, 제국의 황제들과 술탄들은 훌륭한 예술품과 건축물로 이 도시를 치장했다.  따라서 이스탄불은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과 기념비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정복자 술탄 메흐메트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이스람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터키 이스람 시대의 가장 훌륭한 궁전, 모스크 등 유적들을 남겼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와 유적이 공존하고 있어 이스탄불은 파리, 로마, 런던처럼 세계에서 가장 크고 흥미 있는 야외박물관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이스탄불 관광의 초점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천혜의 자연항 보스포러스의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각 시대마다 남긴 그 많은 유적과 유물을 둘러보는 것이 될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천혜의 자연항 보스포러스 해협   


 

   터키 여행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이다. 이스탄불은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양분하는 보스포러스의 양쪽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그 경치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그래서 이스탄불을 찾는 관광객은 도시의 역사에 못지않게 자연의 아름다움에 또한 경탄을 보낸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길이는 31.7㎞이며, 가장 폭이 좁은 곳은 루멜리 히사르(요새를 뜻하는 아랍어)가 있는 지점으로 698m이고, 가장 넓은 곳은 흑해와 만나는 곳으로 3.4㎞이며, 평균 물의 흐름의 속도는 3.4㎞이다. 지중해를 거쳐 대양주로 나가려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배들은 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꼭 거쳐야 하는데, 이 해협은 1936년 체결된 몬트렉스 조약에 따라 터키의 통제를 받는 터키의 영해이다.

  지리적으로 보스포러스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또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려는 원정부대가 꼭 거쳐야 할 장애물이었다. 이곳에 놓여 진 최초의 다리는 기원전 4세기 시티안으로 군사 원정을 가던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의 명령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70만 명의 다리우스 군사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배와 뗏목을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그 후 보스포러스는 비잔틴 시대에 이스탄불을 무역 중심지로 하여 해상 무역이 발달하면서 최초로 이곳에 여름 궁전이 세워지면서 그 중요성을 더해갔다. 또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풀 을 점령하기 위해 보스포러스를 통제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메흐메드 2세 황제는  바예지드 황제가 만들어 놓은 작지만 아름다운 아나돌루 히사르 반대쪽 유럽 지구 위치 좋은 곳에 4개월 만에 루멜리 성(15세기)을 축조했다. 

 

    루멜리 성은 오스만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는데 중요한 요새이며 전략기지였다. 루멜리의 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경관은 정말 아름답다.   도시를 정복한 오스만 황제들은 도시 중심에서 가까운 보스포러스 지역에 살았고, 계속하여 해안가에 별장과 정원, 궁전을 짓도록 했기 때문에 보스포러스 해안에는 보기에 좋은 집들이 즐비하여, 해협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또 보스포러스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것은 흑해와 다다렐스 해를 연결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두 개의 다리이다. 1973년에 건설된 제1브릿지(보스포러스 브릿지)와 1988년에 건설된 제2브릿지(아타튀르크 브릿지)로었으며, 이들 다리는 유럽과 아시아를 오고가는 엄청난 교통량을 소화하고 있다.  

 

   그리고 다리 밑으로는 매년 5만 척이 넘는 선박들(화물선, 대규모 탱커, 크루즈 선박들)이 운행하고 있다.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에 속한 터키군들이 많이 불러 우리 나라에 퍼뜨렸던 '우스크달라 머나먼 곳 찾아왔더니∼' 하는 노래의 우스크달라는 바로 갈라타 다리 건너 호스만 트루크 시대의 터키 가옥들이 남아 있는 곳으로 매우 낭만적인 곳이기도 하다.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를 하려면 갈라타 다리 바로 옆 보가즈 하트 제3부두에서 유람선을 타면 된다. 유람선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물길을 가르며 3시간 동안 보스포러스 해협이 지닌 자연 경관과 그 옛날 축조된 우람한 성들, 오고가는 각종 유람선, 해안 양쪽의 휴양 시설들을 감상하면서 보스포러스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게 해 준다.

   또,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전통적인 터키 가옥, 궁전과 박물관, 목재 빌라의 별장들, 그리고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의 숲들, 카페, 찻집, 술집들과 여러 종류의 다양한 식당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보스포러스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며 삶의 여유를 즐기려는 이스탄불 주민들과 여름철 관광객들로 혼잡을 이룬다.    

 

 

 

 

이스탄불 구시가 언덕 위의 히포드럼 

 

 

   이스탄불을 편리하게 관광하기 위해서는 이스탄불 관광의 중심지인 구시가지에 호텔을 정하는 것이 좋다. 관광 유적지가 모여 있는 술탄 아흐메드 구역은 걸어서 구경할 수 있어 편리하기 때문이다.

   1㎞ 반경 이내에 있는 명소로는 우선 비잔틴제국 시대 마차경기가 열렸던 로마 경기장 히포드럼 광장이 있고, 술탄 아흐메트 카미(블루 모스크), 아야 소피아, 예르바탄 시르니치, 터키· 이스람 박물관, 톱카프 궁전, 그랜드 바자 등 관광 명소들이 걸을 만한 위치에 있다.    

   히포드럼 광장은 이곳을 '말(馬의) 광장'이란 뜻의 아트 메이다느라고 불렀다.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레스 통치 때 시작되어 100여년 후 콘스탄틴 대제 때 완성된 히포드럼은 10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히포드럼에서 이륜(二輪) 마차 경기가 있었는데, 이 경기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정파 간에 응원팀이 달라 경기 결과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정치색이 강한 경기였다고 한다. 이곳에 있던 각종 기둥과 돌은 그 후 블루 모스크의 건축 자재로 사용되어 과거의 웅대한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된 넓은 광장에는 3개의 기둥과 하나의 분수대만 남아 있다. 26m나 되는 화강석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나일강가에 있는 카르낙 신전에서 옮겨온 것이다.


   탑 가까운데 있는 다른 기둥은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뱀 세 마리가 몸을 틀고 있는 구리로 된 키 작은 기둥이다. 그 옆에는 비잔틴의 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가 세운 비잔틴 첨탑이다. 또 분수대는 독일 황제 카이세르 빌헤름 2세가 오트만 왕조에 만들어 기증한 선물이다.

 

 

 

 


술탄 아흐메드 카미(블루 모스크)

 

 

   술탄 아흐메드 카미(블루 모스크)는 고대 히포드럼 옆에, 그리고 아야 소피아 맞은편에 있다. 내부가 온통 푸른 타일로 덮여 있어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이 붙었다. ‘카미’는 터키어로 모스크(이스람 사원)를 의미한다. 여섯 개의 첨탑과 여러 개의 돔들이 폭포를 이룬 듯 장엄하다.

   이 모스크는 1609 - 1616년에 걸쳐 위대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였던 메흐멧 아아에 의하여 지어졌다. 이 사원은 오스만 제국의 황제 아흐메드 1세가 기독교 문화에 대항하기 위한 야심으로 건축된 것으로, 그는 아흐메드 카미의 낙성식 때 “유스티아누스여, 내가 이겼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 건물은 그의 이름을 따서 '술탄 아흐메드 카미'으로 명명되었다. 건축학적으로는 아야 소피아를 따라잡지 못하지만 외관만큼은 단연 웅장함이 돋보이는 사원이다.

  그런데 이 사원 내부가 명암이 각각 다른 약 2만 1,000개에 달하는 99가지의 진한 청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서, 발음하기 어려운 술탄 아흐메드 사원으로 부르기보다는 파란 빛의 아름다움에 따라 흔히 '블루 모스크'라고 부르고 있다.

   이 카미는 아야 소피아를 모방 발전시켜 전통적인 오스만 건축 양식으로 지은 것인데, 돔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중앙의 큰 돔은 작은 네 개의 돔이 받치고 있다. 이 크고 작은 돔의 균형과 사원 양쪽에 6개의 미나렛(첨탑)을 세워, 건축적인 아름다움 면에서는 아야 소피아를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미나렛 개수는 모스크의 규모를 나타낸다

 

  이것은 이스람 성지인 메카의 사원과 맞먹을 만큼 웅장하여 오스만 투르크 시대의 대표적인, 아름답고 웅장한 이스람 사원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터키인들은 이스탄불의 상징을 이야 소피아로 보지 않고 이 블루 모스크를 꼽는다.  

   높이 43m, 지름 23m의 돔으로 덮혀진 사원 내부는 260개의 착색 유리창을 통해 빛이 들어와 장관을 이루며, 석양에 강 건너 아시아 지구 공원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제일 아름답다. 아야 소피아가 낮 동안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면, 이 모스크는 밤이 되면 진면모를 드러낸다. 온갖 화려한 조명이 음향과 함께 첨탑과 지붕과 건물 전체를 에워싼다.          

   사원의 뜰 가운데는 샤드르반이라는 분수대가 있고, 사원 옆에는 신자들이 기도 전에 손발을 씻는 수도 시설이 있다. 그리고 사원 옆에는 복합 부속 건물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신학교, 병원, 시장 목욕탕, 부엌들로서 이런 시설은 퀼리예라고 부른다. 그리고 술탄 아흐메드의 무덤이 있다. 

 

 

 

 


비잔틴 최대 걸작, 아야 소피아(Aya Sofya) 



  
블루 모스크 앞 정원을 건너면 비잔틴 황금기의 상징인 아야 소피아에 들어서게 된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이다.  아야 소피아는 6세기 비잔틴 황제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건축된 이후 이스탄불이 오스만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916년간은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으로 기독교 세계에서는 이 건물을 성 소피아 성당으로 불렀으다.

   그러나 그 후 1453년부터 1934년까지 481년간은 이스람 사원으로 사용하면서 그리스 이름인 '아야 소피아(Aya Sofya)'로 불리다가, 1934년부터 터키가 박물관으로 지정하면서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불리고 있다.

  아야 소피아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수많은 유적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건축물로 세계 건축학상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아야 소피아는 6세기 비잔틴 황제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건축된 것이나 실은 이 이름으로 지어진 세 번째 건축물이다.

   첫 번째, 두 번째 건물은 모두 반란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어 이 반란을 평정한 유스티아누스 황제 1세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화재로 없어진 성당보다 더 크고 견고하게 성당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이후 제국의 멸망까지 약 800년 동안, 새로운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야 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축물도 남기지 못했다. 이 건물이 완성되자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탄성을 질렀다. "솔로몬 왕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 솔로몬 왕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능가했다는 자부심이었다.

   과연 오스만 황제 아흐메드 1세가 아야 소피아를 보고 부러움과 시기심을 느껴 바로 이 성당 옆에 이것을 능가하는 이스람 사원 '술탄 아흐메드 사원'을 건축할 만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야 소피아는 돔으로 만들어진 건축물 중 백미(白眉)로 꼽힌다. 중앙 내부는 7,000㎡로 매우 넓으며, 비잔틴 석조 공예술을 보여주는 총 107개의 기둥이 있다. 중앙에 거대한 돔과 4개의 소형돔을 갖추고 있는데, 중앙의 큰 돔은 지상에서 56.69m이며 돔의 직경은 32.37m로 웅장하다.

   이 성당은 기독교 3대 기둥의 하나인 동방 정교회의 수장인 대주교가 있는 곳으로,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신앙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나, 지진, 화재 등으로 수난의 역사를 걸어오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점령했을 때 값진 성상과 성물이 대거 약탈되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서 이 성당이 이스람교의 사원 모스크(Mosque)로 바뀌면서 대성당 꼭대기의 십자가는 이스람교의 초생달 표지로 대체되었고, 대성당 안에는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기도처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모자이크로 된 기독교 성화는 회칠로 덮여졌다. 그러나 성당의 아름다움에 압도된 메흐메드 2세 황제가 병사들에게 성당 건물은 파괴하지 말도록 명령함으로써 이 성당이 파괴되지 않은 것만도 큰 다행이었다.

   이 성당의 외부에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 시난이 4개의 미나렛(첨탑)을 세웠는데, 이것은 이스람 사원의 위용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라는 설(說)과 함께 성당의 중력을 지지할 목적에서라는 두 설이 있다.

 

   이후 성당의 성당 복원 작업이 1930년대 미국인 학자에 의하여 시작되어 회칠로 덮여진 성화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에도 복원을 위해 본당 돔을 향해 설치된 높은 작업대 꼭대기에서는 계속 쇠망치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종교 분쟁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중앙 돔의 절반은 성화로 복원하고 절반은 지금 상태의 이스람 문양을 그대로 유지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아야 소피아는 수많은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소피아 벽화의 백미는 남쪽 복도 계단 서쪽에 있는 중앙의 예수 그리스도, 왼쪽의 성모 마리아, 오른쪽 세례 요한의 모자이크이다. 이것도 회반죽으로 덮여 있던 것인데 복원 작업 끝에 세상에 부활한 것이다.

   중앙 작은 돔에는 금은으로 장식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성모 마리아가 옥좌에 앉아 있고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얼굴은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황제의 문 바로 위에는 9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가 있는데, 가운데는 아기 예수, 왼쪽 원안에는 성모 마리아, 오른쪽 원안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있고, 앞에는 비잔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 6세가 무릎을 꿇고 있다.

    그의 아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또 오른쪽 문 외벽 위에는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 모자이크가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또 그 옆에는 성 소피아 성당을 지은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증정하는 모습이다.

    지금 건물 내에는 초기 기독교의 성화와 회교적 종교 장식물이 공존하고 있어 동과 서, 기독교와 이스람 문화의 접촉이 이루어진 셈이다. 누구나 이 역사의 현장에 서면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른 역사의 무상함을 실감하는 것이다.  

 

 



지하 물 궁전 예레바탄사라이

 


  아야 소피아 맞은 편 교차로에 예레바탄사라이라는 지하 저수조(貯水槽)가 있다. 그 규모가 하도 커서 흔히 지하 물 궁전이라고 부른다. 이 지하 저수조는 비잔틴 시대인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인 532년에 건설된 것으로 가로, 세로가 각각 70m, 140m이며, 336개의 기둥이 저수조를 지탱해 주고 있다. 

  이 저수조는 비잔틴 제국이 적에게 포위당하는 비상시에 대비, 도시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물은 이스탄불에서 20여㎞나 떨어진 초원지대에서 수로를 통하여 끌어 들여 궁전의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도 저수량이 무려 80,000㎡에 달한다. 


    한여름 더위에 지친 심신으로 이 저수조에 들어서니 온몸을 감싸는 냉기로 갑자기 생기가 날 정도였다. 관람객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돌기둥 사이에 설치한 복도에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데, 저수조의 은은한 조명과 실내에 퍼지는 음악 소리는 저수조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꽤나 잘 어울린다.  

   저수조 한쪽 끝에는 메두사의 머리가 거꾸로 놓여 돌기둥의 초석이 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메두사는 원래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여신 아테네의 신전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정(情)을 통했다 하여 아테네 여신의 저주를 받아 무서운 괴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메두사가 노려본 사람은 뱀이 된다고 하여 정면으로 시선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얼굴을 일부러 거꾸로 놓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알렉산더 석관이 있는 고고학 박물관

 

 

   아야 소피아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1㎞쯤 가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이 나온다. 고고학 박물관은 톱카프 궁전 옆에 있다. 외부에서 볼 때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내부에 진열되어 있는 유물은 만만치 않다.

  이 박물관은 주 박물관인 고고학 박물관 외에도 타일·도자기 박물관과 고대 동양 박물관 등 세 개의 박물관이 함께 있는 복합형 박물관으로, 터키의 전체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250만의 유물 중 80만여 점이 이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전시 중인 유물들은 주로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것들로서 소장하고 있는 전체 유물의 십분의 일에 불과하다고 한다. 더구나 이 박물관에는 약 8만에 가까운 설형문자 점토판을 소장하고 있어  영국의 대영 박물관 다음으로 많은 분량이다.

 
  
   고고학 박물관에는 로마, 비잔틴 시대의 석관, 묘석, 흉상 및 동상 조각품 등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石棺)이다.  이것은 1887년 시리아의 시돈에 있는 가족묘에서 발굴한 것인데, 오스만 제국의 고고학자 오스만 함디 베이가 이스탄불로 가져왔다고 한다. 석관의 규모가 클뿐 아니라 석관 주위에 새겨진 조각이 너무 정교하여 완벽한 예술품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석관 바로 옆에 있는 네 면에는 열여덟 명의 여인이 각각 다른 표정과 자세로 대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금방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  이곳에는 또 그리스, 로마, 비잔틴, 오스만 시대의 동전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고대 동양 박물에는 이스람 이전 아랍반도의 유물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지역의 발굴품들만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동양 박물관의 걸작품으로는 기원전 13세기 중반 고대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에 체결된 평화 협정문이 새겨진 설형문자 점토판과 기원전 14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자 조각품이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또 타일 박물관은 주로 터키-이스람 타일 및 세라믹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옛 건물 기둥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박물관 모퉁이에 정원 찻집이 있어 차를 한잔 마시면서 유물을 감상하느라 피곤한 다리를 쉴 수 있다. 

 

 


 

오스만 황제의 톱카프 궁전

 

 

  고고학 박물관 바로 옆으로는 오스만 터키의 황제(술탄)들이 살았던 화려한 톱카프 궁전이 있다.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트루크 제국 영화(榮華)의 총체다. 오직 황제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궁녀들의 거처 하렘도 여기 있다.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터키에 공화정이 수립된 후부터 톱카프 궁전은 고스란히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톱카프 궁전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 골든 혼과 보스포러스, 다다넬스의 3면 바다가 만나는 성터에 위치하고 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세운 오스만 제국 술탄의 첫 번째 궁전으로, 15세기에서 19세기 마흐무드 2세 황제 때까지 약 380여 년간 강대 권력을 휘두르며 대제국을 다스렸던 오스만 제국 황제의 궁전이 되었다.

   톱은 대포(大砲)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門)이라는 뜻이다. 궁전 입구 양쪽에 두 대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는데 궁전 이름은 여기서 연유한다.   고전적인 오스만풍의 건축 양식을 가진 이 궁전은 중국 북경의 자금성의 구조와 흡사하다.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국사를 의론하고 결정하는 최고 기관으로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다. 

 

   입구 정면에는 아랍어로 된 "알라여, 이 궁전을 지은 사람의 영광이 영원하도록 하소서. 알라여, 그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소서"라고 새긴 글이 있다.
 
  궁전 입구의 황제(皇帝)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이 있다. 이곳에는 오스만 황제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 불리는 근위대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왕실 마차들이 전시되어 있다.

   두 번째 경의(敬意)의 문을 지나면 또 다시 넓은 마당이 난다.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동시에 각종 의식을 열었던 건물과 왕실 주방 건물이 있다. 이 주방은 하루 천 명 이상의 부엌 종사원이 매일 5,000명의 식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 거대한 홀은 현재 극동과 중국의 도자기들을 전시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전시장의 하나가 되었다. 또 과거에 창고로 사용되었던 좁은 건물은 현재 은제품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세 번째 지복(至福)의 문은 황제와 황제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곳 마당에서 황제의 즉위식이 열렸으며, 이곳 접견실에서 술탄은 외국의 사신들과 장관들을 영접했다.   또 이곳에는 금남(禁男)의 구역으로 유명한 하렘이 있는데, 하렘 건물에는 약 250여 개의 방이 있고, 황제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가는 비밀통로도 만들어졌다.

   궁의 내부는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이 소장했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한 세계 최대 규모의 보석관이 있다. 세계 최대의 에메랄드, 86캐럴의 다이아몬드 등 각국에서 술탄에게 보내온 각종 보물들이 있어 오스만 황제들의 영화와 사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각종 도자기, 식기, 옷 장신구, 무기와 이스람교의 창시자 마호멧의 치아와 수염, 그리고 그가 입었던 망토, 메카의 신전 열쇠, 사도 요한의 두개골과 손, 다윗의 칼, 요셉의 모자와 모세의 지팡이 등이 전시되어 있어 관람객의 발을 멈추게 한다.
 
    마지막 네 번째 맞이하는 정원에는 바그다드와 레반을 점령하고 기념으로 지은 바그다드 정자와 레반 정자가 있고, 후계자들의 할례 때 사용되던 방들이 정원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발코니에서 골든 혼, 갈라타 타워와 갈라타 지역, 그리고 이스탄불의 고대 도시의 장엄한 경치를 볼 수 있다.  또 톱카프 궁전의 해안 쪽 끝에는 규율을 어긴 하렘 여인들을 무거운 자루에 넣어 보스포러스 해협에 던졌다는 곳이 있다.

 

 

 

 

호사스러운 왕궁 돌마바흐체 궁전    

 

  19세기 중엽 오스만 황제들은 톱카프 궁전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궁전을 또 다시 지었는데, 이것이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러스 해변 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오스만이 이스탄불을 점령할 때 해군이 닻을 내린 포구로서, 돌마바흐체는 '정원으로 가득 찬 곳'이란 뜻이다..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왕궁 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1611∼1614년에 술탄 아흐메드 1세의 명령으로 포구를 메우고 '베쉬타쉬 궁전'이라는 커다란 정원을 가진 목재 건물을 세웠다가, 그 후 화재로 완전 전소되면서 쓸모없게 되자 오스만 제국의 31대 술탄 압둘메지드 황제가 유럽식의 호화 궁전을 짓기로 마음먹고, 아르메니아 건축가인 카라바트 발얀에게 명하여 1843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56년에 완공하였다.

  이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지었는데, 오스만 건축 방식에는 없는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함으로써 유럽풍의 분위기라는 인상을 주었다.  궁전의 정문 앞에는 의장 사병이 집총(執銃)을 한 채 서 있어서, 관람객으로 하여금 보통 궁전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는 모습이 틀림없이 동상만 같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전체 면적이 25만㎡(약 8만 3천평), 건평은 1만 4천 6백㎡, 연건평 6만 4천㎡로 3개 층에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6개의 발코니, 6개의 목욕탕, 그리고 1,427개의 창문을 갖고 있는 거대한 궁전이다.

 

  내부 장식으로는 시계 156개, 화병 280개, 촛대 58개,  131개의 커다란 카펫과 99개의 작은 카펫이 4천 5백㎡에 깔려 있다. 이들 카펫은 모두 수공으로써 왕실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궁전의 장식에는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을 정도로 실내 장식은 웅대하고 매우 화려하다. 4.5톤의 초대형 샹들리에가 36m 높이의 돔에 달려 있는 연회장, 280개의 화병, 156개의 시계,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36개의 샹들리에, 고급 가구, 카페트, 커튼들이 궁전의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구들은 파리에서, 화병들은 세브르에서, 실크 카펫은 헤레케와 리용에서, 크리스탈은 프랑스의 바카라트 크리스탈이며, 영국에서 가져온 촛대들은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것이다.  

   또 궁전 안에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포함하여 오스만 역사의 말기를 보여주는 귀한 그림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규모와 그 치장만 보더라도 이 궁전이 얼마나 웅대하고 화려한 것임을 짐작케 하였다.

   한 마디로 세계의 궁전 중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사치의 극을 이루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관람하는 동안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건축과 비품 마련에 엄청난 재정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최후 6명의 술탄과 압둘메지드가 15년간 거주했는데, 외국 원수의 주요 영접 장소였던 이 궁전을 다녀간 근세 지도자는 독일의 빌헤름 2세, 영국의 에드워드 8세, 페르샤왕 레나팔레비, 이락의 파이잘, 나폴레옹 3세 등이 있다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이스탄불에 왔을 때에는 이 궁전에서 거주했다.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래로 이 궁전은 간헐적으로 32년 간 비어 있었으나 공화국 수립 후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즐겨 머물기도 했는데, 특히 아타튀르크가 오랫동안의 투병 끝인 1938년 11월 10일 이곳에서 사망한 후 궁전은 새로이 복구되어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오직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가 재정의 고갈 속에 추진된 돌마바흐체 궁전 건축이 막대한 건축비로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제국의 멸망을 촉진시킨 결과가 된 셈이다. 정원을 걸어 나오며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미 역사 속에 사라지고, 다만 화려한 돌마바흐체 궁전만 남아 오늘날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박물관이 된 것이다.

 

 



터키 최고(最古)의 시장 그랜드 바자 

 

 

  술탄 아흐메드에서 서쪽으로 1.5㎞쯤 걸으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이스탄불로 개명한 ‘정복자’ 마흐메트 술탄이 건설한 그랜드 바자가 나온다. 관광객들이 득실대는 65개의 거리에 약 4,400개의 상점, 15,000여 명의 상인들이 밀려드는 관광객과 함께 북적대는 미로(迷路) 같은 시장이다.

   이스탄불에 온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이 밀폐된 대형 실내 성곽시장인 그랜드 바자를 방문하게 된다. 성곽 시장이라고 하는 이유는 시장의 모든 통로가 지붕으로 덮여 있어 마치 성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장은 15세기에 건축되었으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  아시아, 인도, 중국 등지의 각종 산물이 이곳에 집결되어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그랜드 바자는 지금까지 12번의 강한 지진과 9번의 대화재로 파괴, 소실되었지만 그 때마다 더 크게 복구되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54년의 대화재 이후에 새로이 복구된 것이다. 이 시장에는 7개의 분수와 하나의 우물, 크고 작은 사원이 1여 개 있다. 과거에는 상인들이 머무는 숙소 '한'이 21개나 있었다고 한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모두 18개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누루오스마니예 게이트와 베야즈트 게이트이며, 누루오스마니예 게이트의 박공머리에는 의장용 무기와 책, 그리고 깃발이 새겨져 있고, 베야즈트 게이트의 박공머리에는 "신은 상인들을 사랑한다"라는 글과 술탄 압듈 하미트의 인장이 새겨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답게 골목길이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규모가 하도 커서 처음 가는 외국인들은 길을 잃기가 십상이다. 
바자 안에는 한 마디로 없는 것이 없다. 그랜드 바자의 중추가 되는 베데스텐이라 불리는 보석이나 귀금속을 파는 상점으로부터 카펫, 피혁 제품, 의류 제품, 각종 골동품과 공예품, 각종 향료들이 즐비하다.


   사장에 드러 물건을 사는 재미도 즐겁지만 쌓아놓은 갖가지 상품들과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객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만약 물건을 사기로 한다면 세계 도처에서 모여드는 외국 관광객들을 상대하므로 당연히 물건 값을 정가보다 높게 부른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밤의 여흥 벨리 댄스(belly dance)

 

 

  터키 여행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이스탄불의 마지막 밤에는 벨리 댄스를 감상했다. 터키의 홍보 책자에서 이미 본 것이지만,  벨리 댄스는 터키의 대형 유흥 식당에는 관광 프로그램의 하나로 내놓는 여흥 중의 하나이다 

 무대가 있는 대형 식당에는 1,000석이 넘을 정도의 좌석으로 가득 차있고, 저녁식사를 마친 즈음 두서너 가지의 터키 민속무용을 차례대로 공연되었다. 화려한 의상과 템포가 빠른 음악에 따라 흥겨운 율동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다음 엷은 옷을 몸에 걸치고 머리, 가슴, 엉덩이에 반짝거리는 장식품을 달고 배꼽을 내놓은 채 몸통과 허리, 젖가슴을 흔들어 대며 춤을 추는 늘씬한 무희가 나타났다. 벨리 댄스(belly dance)였다.  

 

  벨리 댄스는 이스람 문화권 여성들이 추는 일종의 배꼽춤이다. 밸리 댄스는 고대 아랍세계에서 시작된 것으로 몸매가 아름다운 여성이 배꼽을 내놓고 엉덩이를 육감적으로 흔들어대는 몹시 관능적인 춤으로 기본 행위의 의미는 사랑을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미모의 젊은 여인이 하얀 살을 내놓고 배꼽을 퉁기며 선정적인 몸동작으로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 대는 벨리 댄스는 관광객의 마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벨리 댄스라는 이름은 1890년 시카고에서 열린 컬럼비아 박람회를 통해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프랑스인들이 이 춤을 배춤이란 뜻의 'dans du ventre'로 부른 것이 ‘벨리 댄스’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가슴을 드러내고 선정적으로 추는 벨리 댄스를 놓고 터키 내에서 찬반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스람은 여성이 섹시한 옷이나 부정한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몸을 드러내면서 추는 선정적인 춤은 이스람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벨리 댄스는 터키를 찾는 관광객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여흥이고, 관광 수입을 올리는 효자 상품이라며 옹호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어찌 되었건 간에, 밸리 댄스로 하여 터키 여행의 마지막 밤을 미모의 무희들과 함께 흥겨움 속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다.

 

 

 

 

 

터키 여행을 마치며 

 

 

  이스탄불에서 시작하여 '차낙칼레(트루바)-베르가마-이즈미르-에페수스- 파묵칼레-안탈랴-콘야-카파도키아를 경우하여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와 터키 여행을 정리하고 보니, 듣던 대로 터키는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였다. 

   수많은 문명이 피고 진 세계사의 중원(中原), 고대 인류 문명의 요람(搖籃)인 아나톨리아 반도국, 청동기 시대 이전은 그만두더라도 히타이트를 시작으로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동 로마와 오스만 제국이 거친 땅,  그래서 그 땅에는 여전히 그리스 신화가 살아 있고, 그리고 곳곳에 많이 파괴된 것이 흠이지만 기독교의 성지(聖地)가 남아 있었다. 

   새로운 제국이 들어서도 이전의 문명을 파손하지 않는 미덕을 발휘한 덕택에 모든 문명이 제각각 빛을 발하며 뒤섞여 있는 곳, 그래서 전 국토가 야외 박물관이라 할 만큼 나라 안에 유적과 유물들로 가득 차 있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국토의 97%는 아시아 있고, 3%만 유럽에 있으면서도 유럽으로 취급되기를 원하는 유럽 지향(志向) 탓으로 터키는 분명 유럽의 옷을 걸친 아시아라고나 할까? 또 전 국민의 99%가 이스람을 신봉하고 있지만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운영한다는 소위 세속주의(世俗主義)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스람 국가로 불리지 않는 나라. 우리가 어려울 때 피를 흘리며 도와 준 형제의 나라 천혜(天惠)의 땅 터키에 이제 다시는 지진(地震)의 참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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