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이즈미르(서머나)
에게해(海) 연안의 야자수 우거진 아름다운 항구
- 폴리갑 순교지, 시인 호머의 고향 -
글 · 사진 남상학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터키의 3대 도시 중의 하나인 이즈미르는 초대 교회가 있던 역사적인 도시 서머나(Smyma)의 현재 이름이다. 서머나의 그리스식 발음은 스미르나이며, 스미르나는 1923년 터키 공화국 건설 이후 이즈미르로 바뀌었다.
이즈미르는 기원전 700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 최대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쓴 호머의 고향으로, 에게해 연안 지방의 중심일 뿐 아니라 주변 휴양지나 고대 유적 탐방의 기지로서 번영하고 있다.
천혜의 항구도시로 발전한 이즈미르
천혜의 요충지에 위치한 이즈미르는 터키의 모든 수출입 물자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산업과 경제의 항구 도시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농산물, 특히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향기 짙은 담배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와 말린 무화과의 수출지로 유명하다.
이 도시의 최초 정착민은 기원전 10세기경 에올리아 헬라인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바로 북쪽에 있는 버가모와 함게 에게해 연안의 주요 도시로 성장하였고, 로마 제국이 이 도시를 정복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소아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파고스 산(현재의 카디페칼레)에 거대한 성채를 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가장 활발한 항구 도시가 되었다. 그 후 1415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어 1535년 오스만 제국의 슐레이만 황제가 프랑스와 최초의 상업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외국인 상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거리의 모습이나 건물들이 유럽풍을 많이 풍기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제1차 세계대전 시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침공을 받았으나, 이에 맞선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군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함으로써 다시 터키인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즈미르는 이러한 변화무쌍한 역사적인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계속 번영하였다.
한때 비잔틴 제국은 도시 곳곳에 기독교 유적을 많이 남겨 놓았으나, 아랍 및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기독교 유적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차례의 자연 재난과 빠른 도시화의 영향으로 거의 모든 고대 유적지는 대파되었으나, 이즈미르는 오늘도 여전히 옛날의 영화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성화로 장식된 폴리갑 기념교회
기독교 초기에 이즈미르(서머나, Smyma)에는 사도 바울의 전도 활동으로 초대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 이즈미르에는 86세 때 순교한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155-166)의 기념교회가 시내 에페스 호텔 맞은편에 있다.
요한계시록 상의 서머나 교회는 아마도 폴리갑 순교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교회는 당시 종교적으로 전통주의 유대인들의 공격과 정치적으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경제적으로 심한 빈곤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에게 죽도록 충성함으로써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교회였다.(계 2장 8-10절)
서머나 교회가 배출한 인물은 순교자 폴리갑(Polycap)이다. 서기 2세기 전반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폴리갑은 교회의 감독을 지냈다. 폴리갑은 교회가 환난을 당할 때 체포되어 그 곳 로마 총독 앞으로 끌려갔다. 그의 나이 이미 86세였다. 총독은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내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폴리갑은 대답했다.
"지난 86년 동안 나는 예수님을 섬겼소.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나를 버린 일이 없소.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하여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 있겠소"
그는 이 유명한 말을 남기고 화형을 받고 순교했다. 순교자 폴리갑을 기념하기 위해 1960년 프랑스 교구에서 재건한 교회가 폴리갑 기념교회이다. 폴리갑 기념교회는 'SEN POLIKARP'이라 써 붙인 팻말 옆으로 난 작은 층계의 계단을 내려가 있었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교회 내부는 대리석 기둥으로 받혀져 웅장하게 보였고, 교회 안에는 폴리갑의 화형(火刑)을 묘사한 성화와 폴리갑의 생애와 관련된 성화가 그려져 있어 경건한 분위를 자아냈다.
이 성화들은 이 교회를 보수할 때 프랑스 화가 레이몽 페레가 그린 것인데, 불길에 싸인 폴리갑을 향해 한 사나이가 칼을 들고 달려들고 있고, 칼을 든 사람의 뒤편에는 또 한 사람의 순교자가 손이 묶인 채 체념한 표정으로 화형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형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화가 자신인 페레라고 한다. 화가 자신도 폴리갑의 뒤를 잇는 순교자로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폴리갑의 눈길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데, 페레의 눈길은 땅을 향하고 있어 두 사람의 표정을 대조적으로 그린 것이 흥미롭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진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이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예배와 순례의 장소로서 카톨릭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스람교가 압도적인 터키에 오늘날 폴리갑 기념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떤 박해가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 칭찬을 받았던 서머나 교인들의 정신이 교회를 오늘까지 지키고 있는 것일까.
잘 단장된 아타투르크 거리
폴리갑 기념교회 근처 각종 물건을 파는 시장 골목을 지나면 히사르 모스크라는 이스람 사원이 있다. 16세기에 공사를 시작한 이 모스크는 이즈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내부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녹색 카펫이 깔린 사원 내부에서 몇 사람이 벽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관광객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부의 천장에는 거대한 이스람 문양이 분위기를 압도하고, 밈베르(연단)와 미흐라브(제단)는 특색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스람 사원을 나와서 해안에 조성되어 있는 아타투르크 거리를 둘러보았다. 아타투르크 거리는 번화가로서 도로 양측에는 야자나무 가로수가 늘어서 있고, 레스토랑이나 찻집, 식당들이 즐비했는데, 민주광장의 중심부에는 아타투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정원은 산보하는 사람이 걸을 수 있도록 보도를 만들었고, 그 옆으로 넓은 잔디공원에는 조형조각품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어 정원의 모습을 한층 아름답게 하고 있었다. 특히 야간에는 이즈미르 항구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인파로 공원 주변을 메운다. 또 이즈미르 코낙 광장에 있는 25 높이 25m의 시계탑은 도시의 상징이다. 그리고 규모는 작지만 이스람 자미 사원이 톡특한 멋을 자랑한다.
아타투르크는 '터키인의 아버지, 즉 국부(國父)'라는 뜻으로 터키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을 지칭하는 말이다. 터키의 전신으로 방대한 영토를 가진 세계 최강의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독일이 패전하여 서구 강대국으로부터 침략을 받게 되자, 아타투르크는 터키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실지 회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1923년 10월29일 터키공화국(정식 명칭: 튀르키예 줌후리예티)을 설립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케말리즘'이라 불리는 서구화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터키인들의 국부로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터키 내에 많은 것으로도 터키인의 그에 대한 존경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곳 이즈미르의 아타투르크 박물관에는 그의 개인 유품들, 사진, 유화, 대리석 및 청동으로 만든 두상, 그리고 그가 사용하던 작은 범선이 소장되어 되어 있다.
이즈미르 고고학 박물관
이즈미르의 고고학 박물관에는 바이릭클르, 에페수스, 페르가뭄, 밀레투스, 아프로디시아스, 시르디스, 이오스 등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오토만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이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다.
그 중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그리스 신 데메테르와 로마의 신 알티미스의 큰 동상이다. 고대 이즈미르 아고라에 서 있던 포세이돈과 테미테르 상과 역시 이즈미르의 아고라에서 출토된 제우스 동상, 기하학적인 도기. 요르단 양식의 선박, 시다마라의 석관과 각종 기둥머리 등 뛰어난 유물들을 포함하여 약 1만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시를 둘러싼 카디페칼레 성채
카디페칼레는 알렉산더 대왕 때 장군 류시마코프가 이즈미르 파고스 산 위에 쌓은 성이다. 주택과 상점이 혼재되어 있는 언덕길을 올라 정상에 닿았다.
성채의 계단을 올라서니 말 그대로 이즈미르 항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즈미르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성채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너무나 아름답다. 세기의 시인 호머가 이곳에서 태어나 시정(詩情)을 불태운 것이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터키의 세 번째 도시답게 건물들이 해안을 따라 넓게 자리 잡고 있고, 항구에는 유람선과 상선들의 항해하는 모습이 평화롭게 보였다.
그리고 멀리 산언덕에 즐비하게 짓고 있는 고층 아파트들은 급격한 도시화 현상을 실감케 해 주었다. 성채 안쪽으로 줄을 맨 소나무에는 울긋불긋한 카페트를 걸어놓고 터키 여인들은 소나무 밑에 앉아 묵묵히 카페트를 짜고 있다.
이즈미르의 아고라
카디페칼레 근교의 나마즈가흐 또는 틸킬릭으로 알려진 지역의 공동묘지 아래에 2세기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의해 세워진 아고라가 위치하고 있다. 현재 북쪽과 남쪽 부분만이 발굴되었다.
북쪽 부분에는 세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길이 160m의 공회당이 있는데, 이 구역들은 경사진 지붕을 받치는 두 줄로 된 기둥들에 의해 나누어진다. 이 건물은 아랫부분을 지면의 높이와 맞추기 위해 아치와 원통형 지붕이 만들어진 아주 낮은 토대를 만들었다.
포세이돈 신전의 기둥이 남아 있고, 테미테르의 동상이 이오니아 문명의 번영을 말해 주고 있다. 에게해 지역에 있는 가장 매력적인 리조트 타운에서 터키의 밤을 즐긴다는 것은 터키 여행이 주는 남다른 즐거움이다. 이즈미르 여행을 마친 우리는 쿠사다시로 향했다.
터키어로 '새들의 천국'이란 뜻을 가진 쿠사다시는 에게해 연안의 조그만 만(灣)에 건설된 해양 도시로서 황금빛의 해변을 끼고 수많은 호텔, 방갈로, 펜션 등을 갖추고 있는 휴양객들의 천국이다.
우리가 짐을 푼 숙소는 낮은 해안 언덕에 있는 특급 호텔 오누라(ONURA)는 에게해로 지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야외식당에서 에게해 너머로 지는 일몰의 경치를 바라보며 들뜬 가슴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였다. 저녁 후 요트 전용으로 만든 계류장 끝에 앉아 찬란하게 조명을 밝힌 호텔의 야경과 쿠사다시 항구의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본 기억은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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