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에페소스(에베소)
가장 매력 있고 광대한 고대 유적지
- 고대 상업과 학문, 기독교 이방 선교 중심지 -
글 · 사진 남상학
쿠사다시의 밤은 행복 속에 밝았다. 에게해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위해 이른 시간 호텔 밖으로 나왔다. 청명한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의 일정은 에페소스(에베소) 관광이 중심이다. 에페수스는 가장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꿈에 그리며 가보고 싶던 곳을 찾아간다는 기쁨에 다소 흥분이 되었다.
화려하고 정교한 도시 에페소스
에페소스는 에게 해안 도시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약 74㎞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1세기 때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흙이 씻겨 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하는 평지로 이어져 있다.
초기 에페소스는 기원전 10세기 이오니아인에 의해 카이스테르강 어귀에 건설되었다. 한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입성한 후로는 전성기를 맞았으며, 알렉산더가 사망한 후에는 리시마쿠스가 막강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도시를 옮겨 파나이으르와 뷸불산의 경사로에 성벽을 쌓았다. 그 후 에페소스는 에게 해안에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로 화려하고 부유한 대도시가 되었고, 아울러 철학, 문학, 역사 등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에페소스는 도시 계획자 히포다무스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성공적인 도시 계획이 적용된 곳으로,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아우구스투스 통치 때에 세워진 것들이다. 도시 에페소스의 화려함은 대리석이 연출한 수많은 조각과 건축물이 대변하고 있다. 에페소스의 전성기에 많은 황제들은 정교하고 이국적인 건축물과 예술품으로 이 도시를 치장했다.
그러나 에페소스는 3세기 고트족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이래 도시의 중요성을 잃고 옛 영화를 찾지 못하다가, 항구는 수천 년에 걸쳐 민더 강(카이스터)에 의해 운반된 충적토가 쌓이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자 상업 활동도 급속히 쇠퇴해졌고, 여러 차례 계속된 지진으로 화려하고 정교한 도시 에페소스는 대부분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비록 황폐되고 파괴 되었으나, 19세기 이후 꾸준한 발굴 작업에 의하여 그 정교하고 화려한 유적들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독교 역사와 에페소스
성경에 에베소로 표현되는 에페소스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관련이 매우 깊은 곳이다. 사도 바울 선교활동을 전개한 곳이며, 사도 요한이 활약한 곳이기도 하다. 본래 고대 소아시아의 풍요의 여신 아르데미스 여신을 모신 신전 가까이에 세워진 에페소스는 동방 이교(異敎)의 중심지였으나, 초대교회 당시 사도 바울은 2차,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사도행전 19장에 기록을 보면, 에페소스에서의 바울의 복음 전도는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다. 그러나 신앙의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헌신적인 도움과 바울이 아들처럼 사랑했던 디모데의 도움에 힘입어 좋은 결실을 맺었다. 그리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이 지배하던 도시는 차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변해 갔다.
AD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으며, 도미티안 황제(81-96)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 속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그는 계시록을 썼다. 사도 요한은 100년경에 밧모섬의 귀양에서 돌아와 에페소스에서 마리아와 함께 말년을 보내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에베소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개의 지도적 교회들에 대한 관활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 요한의 활동 중심지였다. 즉 이 도시는 밧모섬으로부터 오는 편지의 도착지이면서 동시에 일곱 개 교회를 차례로 연결하는 도로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계시록에 의하면, 에베스 교회는 열심 있는 봉사와 수고, 이단 배격, 고난에 대한 인내로 말미암아 칭찬을 받았으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을 받기도 했다.(계 2:2-3) 교회에 만연된 우상 숭배와 이단 사상에 대항하여 신앙의 순결은 굳게 지켰으나, 정통 교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참된 사랑의 정신을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천박하고 배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복음을 위해 바울과 요한이 열정을 불태운 곳, 이래저래 에페수스는 광광을 위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에페소스의 고대 유적 돌아보기>
▶동편 마그네시아 문을 들어서면
뷸뷸 산과 파나이으르 산 사이 계곡에 위치한 이 도시는 두 개의 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쿠사다시 쪽에서 온 방문객은 서쪽의 항구 문을 통해 들어가고, 셀축 쪽에서 들어온 방문객은 동쪽의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들어다. 우리는 다.동쪽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걸으며 원형극장까지 둘러보고 서쪽 항구였던 곳으로에서 유적지 탐방을 마쳤다.
동쪽의 마그네시아 문에 들어서면 이 도시는 서쪽의 고대 항구까지 연결된다. 그 길을 따라 좌우로 펼쳐지는 유적들은 그 규모와 화려함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개선문 형태의 마그네시아 문은 3세기에 리시마쿠스 성벽(헬레니즘 시대) 끝에 베스파니아누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유적지로 들어서면 높이 치솟은 벽과 둥근 지붕의 바리우스 목욕탕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진보된 물 공급 시스템의 일부인 흙으로 만들어진 물 파이프의 잔해가 바로 근처에 있다. 조금 더 가면 윗 아고라 또는 스테이트 아고라라고 불리는 넓은 지역과 주위에 날려 있는 건물들을 볼 수 있다. 2세기에 세워진 계단형으로 된 극장 건물 오데온은 스테이트 아고라 북쪽에 고린도 양식과 이오나아 양식으로 만들어진 기둥들로 장식된 주랑(柱廊) 뒤에 위치하고 있다.
▶오데온과 프레타네이온 주변
2세기에 세워진 오데온은 도시의 행정관들인 상원의원들의 집회 장소였다. 계단형으로 된 객석은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건물은 때로는 콘서트 같은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하였다. 맨 꼭대기의 대리석 좌석은 현재 없어졌지만 아래쪽의 좌석들은 잘 보존되어 있으며, 계단 옆 부분에 새겨진 그리핀( 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은 사자인 괴물)의 발모양은 오데온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스테이트 아고라 지역은 모든 종류의 정치 활동(선거, 모임, 집회 등)이 열렸던 곳이며, AD 4세기까지는 공동묘지였다. 스테이트 아고라와 오데온 사이에는 세 개의 복도와 지붕이 있는 160m 길이의 바실리카가 있는데, 이곳은 사채업자들과 은행가가 돈을 교환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오데온 옆에는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 통치 때 세워진 시청 건물인 프리타네이온이 있다.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된 신성한 지역에는 도시의 생명을 상징하는 영원한 불(성화)이 타고 있으며, 이 불은 크레테스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에 의해 꺼지지 않게 잘 보존되었다. 고급 관리와 재판관들이 만나는 장소도 가까이에 있다.
▶크레테스 거리의 유적들
시청 옆의 주요 거리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고대 항구까지 이어 지는 하수도가 보인다. 이 하수도는 도시의 모든 하수를 바다까지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다. 오데온에서 헤라클레스 문을 거쳐 셀수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크레테스 거리라고 불린다.
대리석으로 된 대로에는 마찻길과 인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고, 마차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대리석 양쪽에 긴 홈을 팠다. 크레테 섬에서 왔다고 여겨지는 크레테스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은 신성한 횃불을 운반할 때 이 도로를 이용했으며, 그들을 보는 모든 시민들은 옆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한다.
도미티안 신전은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써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양의 지팡이) 부조물로 장식된 2개의 동상 받침대 앞에 있다. 오른 쪽으로 이 도시의 수로를 만든 건축가 멤미우스를 위해 세운 멤미우스 기념비의 잔해가 남아 있다. 멤미우스 기념비 맞은편에 도미티안 광장이 있고, 그 광장의 끝에는 도미티안 황제에게 봉헌된 도미티안 신전이 있다. 그리고 광장의 왼쪽에는 부분적으로 복구된 폴리오 분수가 있다.
또 헤라클레스와 네마에안 사자의 싸움을 묘사한 부조물이 새겨진 두 개의 돌덩이인 헤라클레스 게이트를 지나서 가다보면, 길 양 옆으로 화려한 동상 받침대와 기둥들, 그리고 기둥 뒤에 있는 상점의 입구를 볼 때 당시 이 거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를 상상하게 해 준다.
크레테스 거리의 아래 부분에 로마 황제 트라잔에 의해 세워진 기념 분수가 있다. 그리고 도시의 부유한 사람들이 살았던 테라스가 있는 집들은 거리 왼쪽에 있다.
▶하드리안 신전과 스콜라스티카 목욕탕, 공중화장실, 창녀의 집
2세기에 지어진 고린도 양식의 하드리안 신전은 4세기에 복구 작업을 거쳤고, 최근에는 남아 있는 돌조각들을 가지고 새로이 복구되었다. 이 신전은 비교할 데 없는 로마 건축의 뛰어난 기적이며 본보기이다.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현관 내부 벽에 새겨진 부조물 장식은 도시의 전설적인 건설자인 안드로 클로스와 그의 업적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데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부인과 큰아들, 아카디우스 황제, 그리고 아테나 여신, 아르테미스 여신 등 수많은 흥미 있는 인물들이 부조되어 있다. 레이스처럼 장식된 벽은 디케 여신의 두상이 부조되어 있다. 입구의 문은 달걀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커다란 메두사의 모습이 돌출되어 부조되어 있다.
신전 옆에는 스콜라스티카 목욕탕이 있다. 차가운 물이 있는 냉탕인 프리지다리움, 따뜻한 목욕탕인 테피디리움, 그리고 증기실인 칼다리움과 아포디테리움은 전형적인 로마 목욕탕에 있는 네 개의 주요 부분이다.
신전 옆으로 난 거리에 잘 보존된 공중 화장실은 에페소스에서의 공동체 생활을 가장 잘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리고 더 내려가서 오른쪽에 있는 대리석 거리로 들어서면 창녀의 집이 있다.
이 거리에는 대리석 인도 위에 머리를 단장한 여자의 얼굴, 하트 모양, 조그만 동그라미와 발모양을 음각한 광고물이 설치되어 항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곽(遊廓)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이야말로 세계 최초의 광고물이 아닐까.
▶셀수스 도서관과 아고라, 그리고 극장
크레테스 거리와 대리석 도로의 교차로에 셀수스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에페소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가장 뛰어난 복구 작업의 한 본보기이다. 이 건물은 문화적인 건축 특성과 함께 장례 기념비이기도 하다. 에페소스의 집정관이었던 셀수스 폴레마누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이 그의 무덤 위에 웅장한 도서관을 세웠다. 지하에 있는 매장실에는 보존 상태가 뛰어난 석관이 있다.
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고 있던 이 도서관으로 에페소스는 학문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일찍이 에페소스에서 활동했던 희랍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학문 전통을 이어왔다. 성경에 나오는 두란노 서원은 셀수스 도서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래 시장구역인 아고라(Agora)는 사방 100m 넓이의 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는데 아고라의 기념문은 도서관 바로 옆에 있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아고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라는 두 개의 문이 있다. 국제적인 상업 도시인 에페소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상점들은 주랑을 따라 있었고, 상점들의 뒤쪽에는 둥근 원통형의 지붕으로 된 창고가 있었다. 또 해시계와 물시계가 아고라 중앙에 놓여 있었다.
대리석 도로 끝 오른쪽에 있는 에페소스의 야외 원형극장은 2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극장 중의 하나이다. 파니이스 산의 경사로에 세워진 이 극장은 무대 바닥에서 갤러리 맨 꼭대기까지 높이가 60m인 에게해(海)에서 가장 큰 극장 중의 하나였다.
이 원형극장은 기원전 3세기경에 건축되어 로마 시대에 수차 확대되었는데, 3단 형태의 구조로 각 단은 22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에페소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페스티발 기간에는 이 원형극장에서 콘서트가 열렸으며, 사도 바울이 서기 53년에 이곳 에페소스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기독교를 전했고, 한 때는 관객들로부터 날카롭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카디안 거리, 그리고 기타 유적들
아카디안, 또는 항구 도로라고 불리는 이곳은 에페소스에서 가장 큰 거리이다. 길이가 600m, 폭이 11m인 이 거리는 길 양쪽에 주랑이 있고, 양쪽에 놓여 진 기둥 받침들로 하여 매우 인상적이며, 바닥에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극장에 있는 명각(銘刻)에 의하면 이 거리는 일련의 횃불들을 켜서 어둠을 밝혔다.
또 극장 체육관, 항구 체육관, 항구 목욕탕이 있고, 그 뒤로 성모 마리아 교회가 있다. 이 로마 건물은 2세기에 세워져 4세기 교회로 전환되기까지 물건을 매매하는 시장 기능을 수행했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이 주교가 머물던 곳이라고 주장하고, 성모 마리아의 신성이 논의된 제3차 종교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아카디안 거리의 북쪽 끝에는 에페소스 스타디움과 베디우스 체육관이 있다.
누가의 묘와 성모 마리의 집
동편 에페소스로 들어가는 마그네시안 게이트로부터 가까운 지점에 누가의 묘가 있다. 이오나아식 건축양식에 따라 사방 16개의 기둥을 세워 사방 16m의 길이로 건축된 것인데 지금은 파괴된 묘는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 그 구조를 변형시켜 예배 처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1860년 영국의 고고학자 T J Wood가 발굴된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확인하였다.
또 에페소스의 마그네시안 게이트로부터 약 4 지점, 높이 358m의 언덕 꼭대기에 성모 마리아의 집이 있다. 그간 기독교에서는 마리아가 살던 곳이 어디였을까 하는 것이 큰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19세기 초 병상에 있던 독일의 캐더린 엠메리히(Catherine Emmerich)라는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을 써서 신성한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이 지역을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책에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예배당의 위치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그 덕분에 1891년 이즈미르 폴리갑 교회의 나사렛의 신부가 탐사반을 조직하여 산 속에 폐허로 남아 있던 비잔틴 시대에 지은 작은 교회가 마리아가 살던 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요한복음 19장에는 예수로부터 모친 마리아의 앞날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있고, 실제로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 요한을 따라 에페소스로 갔으며, 여러 가지 증거들로 하여 성모 마리아는 이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승천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입구 왼쪽에는 마치 환영이라도 하듯 성모 마리아가 팔을 뻗어 인자하고 사랑스러움 표정으로 청동 동상이 서 있다. 이 청동 동상은 19세기 초 발굴 때 발견된 것이다. 주변의 장엄한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은 언덕, 새소리 경쾌하게 들리는 위치에 복원된 성모 마리아의 집은 아담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후 1961년 교황 요한 23세가 카톨릭 교회의 성소로 공포하였고, 뒤에 교황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도 방문하여 마리아의 집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성지가 되었다. 누가의 무덤, 성모 마라아의 집 앞에는 한국 관광객을 위하여 터키 한국교민회에서 설치한 한글로 된 안내 간판이 서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 아르테미스 신전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데, 셀축과 쿠사다시를 잇는 도로의 한 쪽에 있다. 아르테미스(Artemis)는 지중해 지역에서 수세기에 동안 숭배되었던 여신의 이름이다. 유방이 스물네 개 달린 아르테미스 여신은 희랍 신화의 최고의 신(神)인 제우스의 딸로서 다산(多産)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이 여신 숭배 사상은 아나톨리아를 통해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집트, 에게 섬들에서 크레테 섬까지 확산되었다.
아르테미스에게 봉헌된 최초의 신전은 기원전 625년에 완성되었으나 여러 차례 방화와 파괴로 재건을 반복하였다. 그 후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564-540년에 당시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와 건축가들에 의하여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더 큰 웅장한 건물을 세웠다. 아펠레스는 신전 내부에 “아프로디테 아나디오메네”라는 그림을 그렸다. 플리니의 <자연의 역사>란 책에 의하면 이 이오니아식 신전은 화려하고 그 규모가 장대하였다.
폭과 길이가 200×425m, 높이가 20m, 133개의 기둥으로 세워졌으며, 그 돌기둥의 직경이 무려 1.85m나 되었다고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이 건물은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를 원했던 미치광이 헤로스트라토스란 사람에 의하여 어처구니없이 불에 타서 파괴되었고, 에페수스인들에 의하여 다시 재건된 신전마저 고트족의 침입으로 파괴된 후 다시 재건되지 않았다.
신전은 에페소스에서 가장 앞서가는 종교의 중심지였고, 서부 아나톨리아의 지배자들은 이곳을 대단히 신성시했으며, 많은 성직자들과 여사제들이 신전에서 살았다. 동전이 이곳에서 주조되었고, 또한 일종의 은행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매년 5월 축제가 열리는 등 아르테미스 신전은 천년 이상 종교,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향 아래 그 빛을 잃게 된 후, 그들의 여신 숭배는 점차로 금지되었고,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는 성모 마리아 숭배로 전환되었다. 또한 도시 에페소스 앞을 흐르는 강물의 토사로 아르테미스 신전은 완전히 덮여 땅 위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신전은 1869-1874년 영국인 J.T 우드의 발굴 작업으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으나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고, 거대한 석주들은 영국으로 옮겨지고, 신전에 사용되었던 자재 중 일부가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건축을 위해 옮겨졌다. 지금은 넓은 공터에 광범위한 유적들과 함께 높은 기둥 한 개만 덩그렇게 남아, 한때 영광스러웠던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일한 유물로써 남아 있다.
사도 요한교회
에페소스에서 3㎞ 거리의 지척지간에 있는 셀축의 인근에 사도 요한 교회가 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AD 37-42년) 예수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는데, 이 때 사도 요한은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왔다.
예수의 분부에 따라 마리아를 모신 사도 요한은 얼마 동안 수리아 안디옥에 머물다가 에페소스로 오게 되었고, AD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자 그를 대신해서 에페소스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으며, 도미티안 황제(81-96)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 속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그는 이곳에서 계시록을 썼다.
에페소스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개의 지도적 교회들에 대한 관활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 요한의 활동 중심지였다. 그 후 사도 요한은 100년경 밧모섬의 귀양에서 돌아와 초기 기독교 전파에 거점 지역인 이곳에서 마리아와 함께 말년을 보내다가 죽었다.
사도 요한 교회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퍼지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를 건립하였는데, 그후 비잔틴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대리석으로 다시 증축하였다. 그런데 13세기 셀축 터키가 이 지역을 점령한 후 방치되었다가 1402년 몽골의 침입 때 다시 파괴되었다.
건물 규모는 40×110m이며, 서쪽의 입구와 함께 동서쪽에 축을 두고 십자가 모양으로 배치되었다. 교회 왼쪽 북쪽에는 11세기에 만들어진 프레스코화가 있는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사제들의 교구로 사용되었던 이 방의 바로 왼쪽에는 귀중한 성물을 보관했던 작은 성물 보관소가 있다. 침례소는 현재 좋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현재 발굴된 유적만으로도 엄청남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에페소스 박물관
셀축에 있는 에페소스의 고고학 박물관은 야외 박물관(정원)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8년부터 에게해 연안 지역의 유물을 수집하고 보관하기 시작했다. 규모는 작으나 터키에 있는 가장 중요한 박물관의 하나이다. 모두 6개의 전시실에는 각종 유물들로 가득 차있다.
제1전시실에는 에페소스의 부유한 시민들의 집에서 발견된 돌고래와 큐피드, 에로스의 머리, 프리아푸스 요정, 소크라테스의 머리, 벽화, 성자의 동상 등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에는 수많은 동상과 두상 등 분수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제3전시실은 금으로 된 장신구와 고대 동전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4전시실에는 7세기의 석관과 장례식 때 사용되었던 토기들이 있고, 제5전시실에는 신전에서 블굴된 아르테미스 여신의 독특한 두 개의 두상과 그 밖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6전시실에는 황제의 방이라 하 여 하드리안 신전과 도미티안 신전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있다.
또 내부 정원 (아트리움)에는 벨레비 무덤과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발견된 해시계, 황소 머리를 한 기둥들이 진열되어 있다. 대도시 에페수스 전체가 야외 박물관과 같으므로 에페소스 박물관은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나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가장 매력 있고 광대한 고대 유적지인 에페소스는 그 영욕의 역사와 함께 많은 것들을 생각게 한다. 분수에 넘치는 통치자들의 욕망으로 화려하게 세워놓은 것들이 또한 그 욕망으로 허망하게 파괴되고, 인간의 지혜로 이룩한 것들이 자연의 위력 앞에 무력하게 허물어지는 진리를 에페소스는 웅변으로 말해준다. 그리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영욕을 달리하는 역사적 현장을 여실히 보여준다.
에페소스 관광을 끝낸 우리는 멀리 산꼭대기에 보이는 셀축성을 바라보며, 전용버스 편으로 다음 방문지인 파묵칼레로 이동하였다. 파묵칼레는 에페소스에서 동남쪽으로 150여㎞ 떨어진 데니즐리에서 다시 북쪽으로 20여㎞ 들어간 곳에 있었다. 우리가 묵을 콜로세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수영장 주변 노천카페에서 벨리 댄스를 감상했다. 흥겨운 음악에 따라 반라(半裸)의 무희가 흔드는 유연한 몸동작은 그 동안 누적된 여행의 피로를 다소나마 풀어주는 듯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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