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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터키.그리스

터키 차낙칼레, '트로이 목마'가 있는 트루바의 고대도시 유적을 찾아

by 혜강(惠江) 2005. 12. 7.

 

터키  차낙칼레(트루바)


트루바의 고대 도시 유적을 찾

- 트로이 목마(木馬)’가 있는 트루바 -

 

 

글 · 사진 남상학

 

 

 

 

 

 

  이스탄불에서 터키의 아시아 지역의 관광을 위해서 터키의 유럽령 지역의 넓게 펼쳐진 평원을 따라 남서쪽으로 계속 달렸다. 트루바(Truva, 옛 이름 트로이)로 가기 위해서다.


  터키 고도(古都) 이스탄불에서 트루바까지 350㎞.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9시간 거리의 제법 긴 여정이었지만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주변 풍경이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르마라해(海)를 따라 이어지는 옥빛 바다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건기(乾期)에 속하는 터키의 들판은 풀들이 거의 말라 황량하게 보였으나 스프링쿨러가 작동하는 밭은 초록색을 띄고 있다. 도로의 양쪽으로는  지중해 지역 특유의 해바라기 밭이 연이어 펼쳐져 있다. 이런 풍경들은 트루바가 갖고 있는 전설과 신화처럼 신비하고도 눈부셨다.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서

 


   약 4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겔리불루(Gelibolu)였다. 작은 항구 도시 겔리불루는 다다넬즈 해협(마르마라 해협과 에게해를 잇는 해협)을 건너 차낙칼레(트로이)로 가는 배를 승선하는 곳이다. 트루바는 차낙칼레 지방에 속해 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카페리를 이용하여 다다넬즈 해협(폭은 약 1㎞)을 건너야 한다.

   페리포트(Feribot)라는 이름의 3백 톤급 카페리가 여객과 자동차를 싣고 차낙칼레 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지구상의 모든 물이 마른다 해도 당신은 차낙칼레에서 잡은 신선한 생선을 맛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지는 다다넬즈의 물이다.

   이 물길을 보면 이 해협을 건넜던 페르시아 황제인 시루스와 세르세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레스보스의 사포,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오 등 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야망과 꿈, 사랑의 가슴으로 건넜던 해협을 지금 우리가 건너고 있는 것이다.

 

 

 

 

트로이 목마가 있는 트루바(트로이)

 

 

  해협을 건너면 터키의 아시아 땅, 랍세키 항구다.  작은 항구는 어수선함보다는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시아 땅을 다시 버스로 달리기 30여㎞, 전설의 땅 트로이(Troy)의 현 지명인 트루바(Truva)에 도착했다. 

  트로이의 현 지명인 트루바는 차낙칼레에서 30여㎞ 떨어진 곳이다. 초원 사이사이 수백 년이 넘을 정도의 고목도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트루바라는 표지판이 나타나면서 언덕 너머로 희미한 말 그림자가 보였다. 일행 중 누군가가 트로이 목마의 울음소리가 들리느냐고 농담을 던졌다. 
  
  그 옛날 밤을 새우며 읽었던 호머의 고대 그리스 영웅 서사시 일리아드(Liad)와 오딧세이(Odyssey)의 작품의 무대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언덕 너머로 짙은 갈색의 장엄한 모습으로 서 있는 트로이 목마(Trojan Horse)가 순간 눈앞에 나타났다.

   높이 30m 정도의 목마는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주인공치고는 어설프게 보였다. 알고 보니 이 목마는 1971년에 만든 모형이라고 했다. 트로이 목마는 계략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지금은 호기심 많은 여행객들이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며 작은 창을 통해 얼굴을 내밀고 셔터를 누르는 놀이기구에 불과했다.

 

 

 

차낙칼레항 인근에 세운 트로이 목마 형상, 영화에 나온 것을 본떠 만든 모형

 

 

'트로이 목마(木馬)'에 얽힌 전쟁 이야기

 

 

  트로이 목마와 관련된 트로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영웅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 중엽 지은 장편 서사시 일리아드(Liad)에 전해 내려온 그리스 군과 트로이 군 간의 격렬했던 정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리아드는 10년간 펼쳐진 트로이와 그리스 사이의 전쟁 중 마지막 50일을 다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인을 찾기 위해 스파르타로 간다. 스파르타에는 메넬라우스 왕이 가장 예쁜 여인인 헬렌과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메넬라우스가 잠시 크레타로 볼일을 보러간 사이 파리스는헬렌을 훔쳐 도망간다.

   이에 격분한 메넬리우스가 그리스 왕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리스 완들은 헬렌을 구하고 힘센 트로이를 잿더미로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미케네 왕 아가멤논이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에 원정을 가 10년간의 장기전이 계속된다. 

 

   트로이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그리스 군은 오디세우스가 고안한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성 밖에 갖다 놓았다. 그리스 진영에 아무런 소리도 없는 것을 안 트로이 군은 그리스 군이 다 도망간 것으로 믿는다. 이 때 그리스 진영에 남아 있던 시논이 트로이 군대에 잡혀 트로이 왕 앞에 섰다.

   시논은 그리스인들이 목마를 만든 것은 아테네 여신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고, 이렇게 크게 만든 것은 트로이인들이 성안으로 끌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계략적으로 말했다. 이 말을 감쪽같이 믿은 트로이 군대는 목마를 끌어 아테나의 신전 앞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는 이제 전쟁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한밤중에 목마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사들이 목마에서 나와 성 안에 불을 지르고 파괴하여 난공불락이던 트로이를 함락한다.

 

 

 

볼프강 페테르젠 감독의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얼굴 드러낸 고대 도시 유적지
 

 

  트로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작품 속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실제 사건인가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차에 고대 도시 트로이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트로이 유적은 호메로스의 영웅 서사시 일리아드를 토대로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mann)이 1870∼1873년에 걸친 발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서사시가 아니라 실제인물과 상황 속에서 그려진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됨으로써 세계적인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이 발굴에서 재물과 보화를 파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이전의 에게해의 고대 문명을 밝혀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많은 발굴품은 아테네, 베를린, 이스탄불에 소장되어 있다.   

   트로이 유적이 있는 히살리크 언덕에서는 선사 시대부터 로마 제국 말기까지 적어도 9개 도시가 전쟁이나 지진으로 명멸했다. 도시가 멸망하면 다시 그 위에 도시가 세워진다. 그러므로 히살리크 언덕에는 9개의 도시 유적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슐리만은 아파트 15층 높이의 유적층에서 겨우 한두 층을 발굴했던 것이다. 

 

  1998년부터 독일의 만프레드 코프만 교수와  미국의 브라이언 로즈 교수는  50여 년 동안 중단했던  트로이 발굴을 재개했다. 여기서 호메로스가 노래한 그대로인 높이 8m의 거대한 성채와 망루가 발굴됐다. 이들 여러 발굴을 통해 볼 때 트로이의 인구는 당시로선 거대도시 규모인 4,000명 -8,000명이었다는 것이다.   

   밝혀진 트로이 유적지는 크기가 약 1만평 정도로,  주변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있다.  유적지 입구에서 바라보는 트로이는 황폐한 모습이었다. 트로이 유적은 이미 알려진 트로이 목마의 명성에 비해 남아 있는 것이 빈약한 편이어서 기대를 걸고 찾아간 관광객들은 실망하기 쉽다.

   그런데 1기에서 9기까지 시대별로 분류한 유적지의 표지판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달라진다. 유적지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직도 발굴이 계속되는 흙구덩이 속 깊숙한 곳에 굵은 대리석 기둥과 담들이 보였다.  

 

   트로이 유적지는 시대에 따라 1기에서 9기까지 각각 다른 트로이 문명권으로 나눠져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트로이 유적은 모두 9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모두 시대를 달리하여 세워진 도시 유적으로서, 가장 오래된 시기는 제1층의 것으로 기원전 3,000∼2,500년경의 유지에 속하며, 제2층은 기원전 2,500-2,100년에 해당하는 유지인데, 트로이 제1층에서부터 제5층까지는 문화적 성격이 비슷하다. 제6층이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도시이다. 제7층은 철기 시대, 제8층은 아르카이크 시대, 제9층은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트로이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이 서기 300년쯤, 그러니까 트로이는 전체적으로 볼 때 한 자리에서 3천 3백년간 각각 다른 9개 왕조가 번성과 멸망을 반복한 셈이다. 이런 일은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이 유적지는 1998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 됐다.

 

 

 

 

 

그러면 이들 유적은 왜 땅 속에 깊이 묻혔을까

 

 

  일리아드에는 그리스 군이 해안에 인접한 트로이 성을 코앞에 두고 대치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트로이 유적이 발굴된 히살리크는 에게해에서 6㎞,  다다넬스 해협으로부터는 4.5㎞ 떨어진 내륙에 있다.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을 괴롭혀온 이 미스터리가 최근 지질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결론은 호메로스가 써놓은 기록이 맞아 들어간다는 것이다. 

   미국의 지질학자 크래프트 교수가 유적지 히살리크와 에게해 사이의 평원에 대한 지질조사 결과, 이 평원이 한때 소금기가 있는 개펄이나 습지였으며, 더 이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3,000여년의 세월 동안 강 하구에 침전물들이 쌓이면서 지금과 같은 평원을 형성했다는 설명이다. 뽕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거꾸로 일어난 셈이다.

   그리고 9개 도시가 수차례의 전쟁과 지진으로 명멸함으로써 지금의 유적지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유적 중 비교적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지상에 있는 원형 극장 두 개, 대극장과 소극장이라고 부르는 이 원형극장은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에 만든 트로이 9기 때의 것이라고 추정한다.

   비록 지금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지만 성벽 위에서 눈 아래 펼쳐진 드넓은 평원을 내려다본다. 마치 그 옛날, 아가멤논의 군대를 내려다보던 프리아모스왕과 그 참모들처럼.   

   유적지를 둘러보고 나오니, 주변 화단에는 찬란했던 역사를 말해주듯 붉은 양귀비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흔적만 남은 역사와 양귀비꽃, 이 둘은 모든 영화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한 순간의 꿈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로이 유적 답사를 끝내고 서둘러 트로이를 떠나 에게해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아소스(앗소) 지역을 통과했다. 이 도시는 기원전 8세기 경 히타이트 왕 투탈리아 4세 때 세워진 고대 항구도시로서 바울이 전도여행 때 들른 곳(행 20:13, 14)인데 지금은 옛 명성을 잃은 채 초라한 모습이다. 


   산과 들에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 나무들의 반짝이는 잎새가 에게해의 물결과 어울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기임에도 불구하고 비탈, 평지 어디서나 잘 자라는 올리브 나무는 터키에서는 효자나무란다. 터키는 세계 제1의 올리브 생산국으로 국가 경제에 큰 몫을 담당하는 셈이니까.  

 

 

 

트루바에서 베르가모로 가는 중간의 앗소 지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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