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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터키.그리스

터키 중부도시 '콘야', 메블라나 박물관과 알라딘 회교사원

by 혜강(惠江) 2009. 2. 10.

                  

중부도시 '콘야'

 

메블라나 박물관과 알라딘 회교사원  

 

 

전남일보 정유철 기자

 

 

 

 

* 터키 중부도시 콘야는 보수적인 도시로 터키의 전통문화를 많이 간직했다.

 

 

 

   공항으로 간다. 터키 세 번째 도시, 콘야로 간다. 터키의 속살 같은 곳이다. 진짜 터키 모습을 보려면 콘야에 가라고 한다. 공항 보안 검색이 엄격하다. 허리띠까지 풀어 검색을 하고 탑승수속을 한 뒤 다시 그와 똑같은 보안검색을 받아야 들어간다. 그만큼 테러 위협에 시달리는 탓일까. 콘야까지는 45분.

  "콘야에서는 밖에서 음주하지 마세요. 이것만 부탁합니다. 우리나라 안동같은 곳입니다." 종교적인 도시이고 보수성이 강한 곳이니 특히 호텔 밖에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 출발하기 전 이런 당부를 했다. 이스탄불과 달리 외국인 방문도 많지 않다고 하니 긴장이 되었다. 비행기에 탄 터키인들이 자주 쳐다보고 수근거려 더욱 조심스러웠다.

  콘야의 문화는 국내에서 이미 접했다. 10월에 구례 화엄사에서 열린 '화엄제 2008'에 콘야 영성음악가 출연했다. 터키의 정상급 네이(Ney) 연주가인 사드레띤 외즈치미 전 터키 콘야시 시립전통음악단장, 600쪽이 넘는 코란을 암송하는 터키 대표 가수 겸 터키 전통악기 연주가인 아흐멧 샤힌(Ahmet Sahin) 콘야시립전통음악단원 두 사람이 공연했다. 뭔가 가슴을 울리는 듯한 그 공연을 보고 콘야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콘야공항은 우리나라 지방공항과 비슷했다. 콘야에 유일한 한국인 문 선생이 공항까지 나와 마음을 놓았다. 어둠 속에 언듯 보이는 도시 풍경이 아늑했다.

  콘야는 콘야도가 있고 그 아래 콘야시가 있다. 콘야도는 남한 면적의 반쯤 되는 큰 지역이다. 농산물이 풍부하고 농기계 , 자동차부품, 기계부품, 가죽 산업이 발달했다. 호남지역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도시에서 30분 정도 가면 농촌 지역이 나오는데 높은 산이 거의 없고 지형이 평탄하여 평야가 쭉 이어진다. 오밀조밀하게 있는 국내 논밭을 보다 한쪽에 서면 경계가 보이지 않는 농지를 보니 농기계 산업이 발달한 이유를 알 만했다.

  터키 사람들은 대체로 손님 접대를 잘 하는데 콘야 사람들의 환대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거리에 나서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고 뭔가 부탁을 하면 자기 일처럼 도와준다. 불쑥불쑥 말을 걸거나 다가오는 그들에게 익숙하지 못해 경계심을 드러낸 이방인. 콘야관광문화청에서는 콘야 곳곳을 보도록 직원과 차량을 내주었다.

그  들과 진정 한 마음이 되었던 건 오후 9시 사다브(SADAV)재단에서였다. 사다브는 국제교류, 사회봉사 등을 하는 재단인데 콘야도관광청장이 이사장을 겸했다. 의사, 언어학자, 기업인, 명상가, 공무원 등이 회원으로 활동한다. 이날 모임에는 모두 남자뿐이었다. 내부가 우리 안방같은 구조여서 책상다리를 하고 방석에 앉아 벽에 기대어 이야기를 한다. 사랑방 모임, 한국 사람들과 할 수 있는 만남이었다. 이사장은 "외국인들과 만나 이렇게 농담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왠지 모르게 한국사람들을 만나면 긴장이 풀린다면서 그는 "오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도 가는 것은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언제 가는지 모르겠다"고 웃겼다. 그리고 차와 음식이 나오는데 너무 배불러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들이 준비한 특별 음식 '아라바쉬어'는 콘야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게 했다. 쟁반에 내놓은 우리나라 전과 같은 것을 닭고기와 매운 고추가루를 넣어 끓인 국물에 찍어 먹는데 그 국그릇이 하나뿐이다. 국 한 그릇을 놓고 모두 함께 수저를 넣어 떠먹는다. 서양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식사법. 콘야에서 겨울 밤에만 먹는 특별 야식이라고 한다. 돌궐족과 고구려인의 만남이 이랬을까.

  "우연히 되는 건 없다. 신이 여러분을 우리에게 보냈다고 믿는다. 터키는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남을 짓밟지 않았다. 그런 점이 한국과 비슷하다. 다른 외국인이 오면 긴장하면서 마음을 읽고 그때야 마음을 연다. 한국인이 오면 탐색전 없이 바로 마음을 연다. 한국에는 배울 것이 많고 좋은 게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끈끈한 유대관계는 계속해서 많은 사람이 가고 오고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이런 교류가 계속되어 문화발전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바란다." 이사장의 이 이야기가 오래 남는다.

  차, 과일, 음식이 계속 나오지만 술은 와인 한 잔도 없다.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도 남자들이 화기애애하고 즐겁게 두세 시간을 함께 보냈다. 10시 45분쯤 일어서려니 11시까지는 아직 15분이 남았다고 더 있다 가란다. 근처에 좋은 빵집이 있으니 15분 채우고 그때 헤어지자고 한다. 남자들이 한 밤중에 빵집에 가자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회원들이 모두 나와 부인도 없는데 11시 이전에 호텔에 가서 뭐 하겠느냐며 계속 빵집에 가자고 하였다. 헤어지기 싫어하고 보내기 싫어하는 콘야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온새미로 느꼈다. 콘야의 밤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콘야 메블라나 박물관

 

 

 

 *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의 무덤 등으로 된 메블라나 박물관.

 

 

 

  콘야에서 자주 듣는 게 '메블라나', '세마'라는 말이다. 메블라나는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1207~1273)를 말한다. 그는 메블라나 종단을 창단했다. 그를 기리를 메블라나 박물관이 콘야에 있다. 메블라나는 이슬람 스피즘을 토대로 탄생했는데 참선을 중시해 신비주의로 널리 알려졌다.

  메블라나는 '세마'라는 춤을 통해 수련을 했다. '수피 댄스'라고도 한다. 긴 모자를 쓰고 하얀 천으로 만든 상의와 치마를 입고 빙글빙글 끝없이 도는 춤. 종교의식의 하나이며 단순한 춤이 아니라 수행이며 명상. 이 세마를 추는 사람들을 세마젠이라 한다. 콘야는 메블라나와 세마의 메카이다.

  "춤을 통해 신에게 다가가 하나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매주 토요일 세마 공연이 있습니다. 콘야에 오면 이 세마 의식을 꼭 봐야 합니다." 콘야 관광청 직원 무스타파는 세마를 꼭 보라고 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았다. 메블라나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메블라나박물관은 원래는 메블라나의 수련장소였다. 1273년 메블라나가 사망한 후 그곳에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건축을 하였다. 1926년 박물관이 되었고 1954년 복원하여 메블라나박물관으로 정식 명명하였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았다. 데르비샨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정원이 나온다. 앞에 손발을 씻는 곳이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모스코 양식 건축물인데 왼쪽에 푸른 색으로 칠한 건물이 어울리지 않게 서 있다. 박물관 안에서는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이 금지된다. 성스런 곳이기 때문일까. 메블라나와 그 친족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나무를 반으로 잘라 엎어 놓은 듯한 무덤. 메블라나와 관련된 유물이 전시됐다. 메흐멧 왼데르의 책이라는데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아랍어로 된 책.

  박물관 남쪽에는 옛 부엌이 있다. 1990년에 부엌을 박물관으로 보수하여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마네킹으로 재현했다. 입구 쪽이 부엌이고 그 안쪽은 세마춤 교육장이었다. 무슬림이 세마젠이 되는 과정 역시 마네킹으로 원형을 복원했다. 나아트강단과 음악연주인들이 앉아 있는 모습도 있다. 또한 금속과 목각으로 만든 메블라나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신고 있던 신을 벗어두고 3일간 기도를 하여 신에 변화가 생기면 세마젠에 입문할 수 있습니다." 신이 뒤집히면 신이 세마젠으로 선택한 신호이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야 한다. 안내자의 설명이다.

  세마춤을 가르치는 못판이 있다. 세마젠은 춤출 때 끊임없이 돌다가 신호에 맞춰 갑자기 정지해야 한다. 이때 자세가 흐트러져서는 안된다. 그 용도로 못판이 있다고 한다.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옆에 못판을 두고 추는 것이다. 빙글빙글 돌아 어지러워 정신이 없을 때에 자세를 바르게 유지하는 사람, 그게 참된 종교인의 모습이라는 건가. 세마춤을 배우는 과정은 매우 고되고 위험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박물관 정문 옆으로 메블라나 교단 제자들의 숙소 원형을 마네킹으로 복원하여 놓았다. 양탄자, 각종 유물을 볼 수 있다.

  세마가 공연되는 곳은 메블라나 문화센터다. 메블라나 박물관에서 1㎞거리에 있는데 콘야도관광청이 이곳에 있다. 이 문화센터의 면적은 10만㎡. 콘야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문화행사는 대부분 이곳에서 열린다. 실내 세마공연장과 야외 세마 공연장 두 개가 있다. 매년 12월 열리는 메블리나 젤라레딘 루미를 기념하는 축제가 이곳에서 개최된다. 이 기념축제를 통해 콘야는 문화와 관광에서 세계의 이목을 끌어모은다. 그런 의미에서 메블라나는 더없이 중요할 것이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이리라.

  "메블라나 젤라레딘 루미는 수백 년 동안 모든 세계의 영향력과 사상으로 인류에 조명된 중요한 철학가이며 사상가이다. 벨흐에서 태어나 콘야에서 깨닫게 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정신적 지주이며 예술가인 메블라나는 콘야의 중요한 유산이다. 메블라나의 철학과 함께 평화, 평안 그리고 관용의 도시 콘야가 되었다. 메블라나가 오늘날에도 수천 명의 마음을 조명하고 있고 인류에게 전하는 그의 메시지는 전세계적으로 메아리치고 있다." 콘야시가 만든 안내책자에 나오는 내용이라 과장된 감이 있지만 오늘날 메블라나는 터키뿐만 아니라 다른 무슬림 국가에서도 주목받는다고 한다. 봉사와 착한 삶을 강조하고 서민에 가까이 간 대중 종교인데다 인간은 평등하므로 누구든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무신론자와 이교도까지도.

  "오라! 오거라! 네가 누구든지 오라. 이교도건 무신론자건 그 누구든지 오라. 우리에게 절망이란 없다. 비록 네가 수많은 거짓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오라." 지금 세계에 필요한 건, 이같은 포용력 아닌가.

 

 

 콘야 알라딘 언덕

 

'한뼘 되는 벽' 애지중지, 유적 사랑하는 콘야

 

 

 

  * 콘야 알라딘 회교사원은 셀축 시대 콘야의 가장 크고 오래된 회교사원으로 유명하다.

 

 

  콘야 유적지를 돌아볼 것이냐 카파토키아에 갈 것이냐, 고민에 빠졌다. 콘야에서 카파토키아까지는 세 시간 거리. 동굴 교회와 거대한 지하도시가 있는 곳,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가까운 곳에 있다. 하지만 콘야와 문화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콘야의 문화유적을 돌아봐야 했다. 콘야 관광청에서는 콘야 답사를 권했다. 콘야도 카파토키아처럼 유사한 유적이 있고 볼 만한 곳이 많다며. 황량한 지형에 원추형과 버섯 모양의 기괴한 암석이 줄지어 섰고 그 바위 굴에 새집처럼 교회가 있고 그 지하로는 도시가 형성된 카파토키아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렸으나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대신 콘야를 좀더 세세하게 보리라 마음먹었다.

  콘야는 대셀축제국의 수도였다. 1097년 제1 십자군 전쟁에 의해 셀축제국의 수도 이즈닉이 점령당하자 콘야가 수도가 되었다. 1308년 셀축제국이 몰락하기까지 콘야는 수도로서 발전을 거듭하여 수많은 건축 유적과 장식을 남겼으며 그후 하라만올루 봉건제국의 가장 큰 도시로 발전했다. 셀축시대의 유물을 접한 곳은 알라딘 언덕이다.

  알라딘, '아라비안라이트'에 나오는 알라딘인가 했더니 셀축제국의 왕이라 한다. 알라딘 케이쿠밧 왕은 뛰어난 지휘관이었으며 행정가이면서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다. 그는 학자와 예술가를 콘야로 초청해 우대했다. 메블라나 제라딘 루미가 콘야로 온 것도 알라틴 왕의 초청에 의해서였다. 왕은 베히쉐히르에 쿠바다바트 성을 세웠는데 성의 벽에 장식된 타일은 셀축 시대 가장 뛰어난 타일 예술이라 한다.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언덕으로 갔다. 알라딘 언덕은 언뜻 보기에는 초라했다. 계단이 설치된 언덕 유원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셀축 시대에는 유명한 성이 있었다고 콘야인들은 자랑을 하는데 그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까. 언덕을 올라 북쪽으로 가니 오래된 비석과 같은 것을 돔형 지붕을 씌워놓은 게 보인다. 안내문은 아랍어로 되어 있다. 나중에 들으니 셀축 와들의 유명한 성, 그 성벽의 일부란다. 몽골이 침입하여 성이 무너지고 남은 건 한뼘쯤 되는 벽 하나. 콘야 시 정부는 이 성벽을 신주 모시듯 보호한다. 자랑스런 옛 역사를 후손들이 오래 기억하기를 바라는 콘야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언덕은 공원이다.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아래로 여러가지 꽃을 심어놓았다. 잡초 하나 없이 가꾸어 놓았다. 하얀 꽃, 붉은 꽃이 피어있는 곳에서 터키인들이 차를 마신다. 차이라고 하는 터키식 홍차인데 이 차를 마시는 잔이 어느 곳에나 똑같다. 작은 유리컵 모양인데 차이를 마실 때는 이 잔을 쓰는 전통이 있는 것같다. 이곳에서도 역시 술은 보이지 않는다. 콘야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그 권고를 잘 지킨다. 술이 없으니.

  알라딘 언덕에는 알라딘 회교사원이 볼만 하다. 아나돌루 셀축 시대 콘야의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옛 회교 사원, 알라딘 케이쿠밧 1세에 의해 1221년 완성된 사원이라는데 지금도 매우 견고하다. 우리로 말하면 고려시대 건물인데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부럽기도 했다. "이슬람 건축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천장은 나무와 흙으로 덮여졌다. 비잔틴과 클래식 시대에 속한 41개 대리석 기둥으로 지었고 이슬람 사원의 설교단인 '민베르'가 특히 유명하다." 콘야 시청 관광자료의 설명이다. 민베르는 흑단 나무로 만들었으며 당대의 장인이 만든 걸작품이 이라 한다.

  돔형 지붕이 있지만 사원 전체 건물 중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그동안 보아온 이슬람 사원과 다른 점이랄까. 이 사원이 완성된 후 알라딘 왕의 초청으로 콘야에 정착한 메블라나가 이곳에서 설교를 했다고 한다. 알라딘 언덕은 메블라나 박물관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있으니 사실일 것이다. 사원 옆에는 셀축 시대 왕의 관이 타일로 장식되어 있고 클르차스란 2세 시대의 분묘가 있다. 분묘라해도 시신을 땅에 묻어 묘를 만드는 게 아니고 터키식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낸다.

  알라딘 언덕에서 길을 하나 건너면 이 있다. 원래는 1251년 세운 카라타이 신학교로 19세기 말에 폐쇄되었다가 1955년 타일 유물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콘야의 유명한 호수인 세이쉐히르에 있는 쿠바트아바드 성에서 나온 유물과 벽 타일, 유리그릇과 함께 콘야 주변에서 발견된 셀축과 오스만투르크 시대의 타일과 도자기, 등장, 석고등이 전시되는 곳이다. 이곳 유물들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도자기 축제에서도 전시되었다고 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와 터키의 도자기가 어느 곳에선가 만난 곳이 있지 않겠는가. 돌궐, 몽골, 도자기, 터키는 우리와 또 이렇게 연결되나 보다.

 

 

 

<출처> 2009. 01.22 / 전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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