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
古代의 시간이 지금도… 평화로운 그 길을 다시 걷다
백가흠(소설가) / 편집=뉴스콘텐츠팀
5년 전의 그리스는 내게 완전히 잊힌 존재였지만, 언젠가부터 눈 감으면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스틸 사진처럼 재생됐다. 그 길을 다시 걸었다. 수많은 관광객과 여름휴가로 들뜬 현지인들로 도시는 들썩였다. 한적함은 덜했지만 흥분과 들뜬 열기가 도시를 가득 채웠다.
-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제우스 신전 / Getty Images Bank
아테네를 걸었다. 그리스 아테네에 온 건 두 번째다. 5년 전, 꼭 가고 싶었던 건 아니어서 아테네 여행 준비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어떤 기대감도 없었다는 말이다. 당시 장편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두 달 넘게 아테네 숙소에 틀어박혀 마치지 못한 소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테네의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장편소설을 마무리할 수 있는 곳, 처박혀 소설만 쓸 수 있는 곳을 찾았고, 그곳이 아테네였던 것뿐이다. 한국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에서 나는 내 고향 근처를 배경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5년 전의 아테네는 혼란스러웠다. 국가 부도 사태와 2차 구제금융 여파가 굉장했다. 주말마다 시내는 파업과 시위로 들끓었고, 매캐한 최루가스가 도시를 뒤덮었다. 곳곳에서 방화로 불에 탄 은행과 정부 건물이 흉물스럽게 방치된 채 서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받은 인상은 아테네가 굉장히 안정적이고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지녀야 할 어떤 기본적 권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또 이방인에게 관대했다. 겨울이라 관광객은 적었고, 그마저도 치안이 불안정하다는 인식 탓에 관광객의 발길이 끊겨 휑했다.
여행은 아침이나 해 질 녘 오래된 거리를 산책하는 게 전부였다. 숙소는 아테네 제우스 신전 바로 앞이었는데, 아크로폴리스를 향해 걷거나 국립 정원을 산책하는 게 일과였다. 나는 그렇게 아주 단출하고 일상적인 두 달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스 여행은 막상 한국에 돌아가고 나서 시작됐다. 지난 5년간 나는 항상 마치 뭔가를 두고 온 것처럼 그곳을 그리워했다. 5년 전의 그리스는 내게 완전히 잊힌 존재였지만, 언젠가부터 눈 감으면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스틸 사진처럼 재생됐다. 다시 그곳을 찾을 용기가 생기기까지 5년이 걸렸다. 나는 그사이 문단에 데뷔하고, 처음 소설을 쓰던 시절로 돌아갔다. 막막하고 막연해졌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데뷔하고 15년 동안의 여정 한가운데 그리스가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한 주에 7개씩 강의하던 시간강사직을 그만두고 나는 오로지 소설에만 절실히 임하겠다 마음먹었지만 막연함과 불안함은 더 많아졌다. 오히려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올여름 나는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리웠던 그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그 겨울 모습과는 달랐다. 수많은 관광객과 여름휴가로 들뜬 현지인들로 도시는 들썩였다. 한적함은 덜했지만 흥분과 들뜬 열기가 도시를 가득 채웠다. 경제적 상황은 그리 나아졌다고 볼 수 없을 테지만 국민은 현명하고 슬기롭게 현재의 고난을 건너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도시는 정비되고 있었고 불안정했던 요소도 사그라지고 있었다. 넘쳐나던 난민도 잘 관리되고 있는 듯 도심에 있는 구공항에 난민 캠프를 차렸다. 식수와 전기를 공급하고 난민들의 제3국 이민을 돕기 위해 그리스 정부는 노력 중이다. 10월 중순부터는 난민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자 등교 교육을 실시했다. 몇몇 도시에서 학부모들의 반대도 있었으나 국민 대부분은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풍경. 뒤편 더 멀리에 해발 280m짜리 리카비토스 언덕이 있다. 아테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일몰이 특히 아름답다. / 백가흠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만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거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간에 대한 풍요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더 큰 여행의 가치임이 맞을 것이다. 숙소는 시내 근대올림픽 경기장 근처에 얻었다. 맞은편에는 국립 정원이 있고 정부 공관과 관료들의 집, 대통령궁이 있다.
하늘 높이 솟은 키프로스 숲을 걸으며 나는 그간 이상한 곳을 헤매다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떠나왔지만 돌아왔다, 돌아왔지만 떠날 것이다, 나는 걸으면서 생각하곤 했다. 도심 한가운데의 울창한 숲을 지나면 리카비토스 언덕이 눈에 들어온다. 그 언덕은 고대 귀족들이 살던 동네였다. 수천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부촌으로 언덕 밑에는 명품 가게와 카페, 분위기 좋은 식당이 언덕을 받치며 늘어서 있다.
그 언덕과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언덕과 언덕 사이에 고대의 시간이 놓여 있다. 그 길을 걸으며 느낀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몇천 년 시간이 흘러 세상은 바뀌었어도 그 안의 사람들 마음이나 본성은 그리 큰 변화가 없는 듯 고대의 시간이 지금도 여전히 흐른다. 가족이 주는 안정감과 평화로움이 고대 도시에 여전하다.
그리스는 모계 중심 사회다. 우리가 가부장제에 가깝다면 그리스는 엄마가 삶의 중심이다. 유산 같은 것도 딸에게 물려주는 게 일반적이고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들어 사는 일 또한 많다. 그곳에서 알게 된 어느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1층엔 친정어머니가, 2층엔 여동생 가족이, 3층엔 맏이인 딸 가족이 사는 식이다. 이것은 뜻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IMF 구제금융으로 촉발된 경제난으로 급격한 가족 붕괴를 맞은 것과 달리 그리스 상황은 우리보다 더 안 좋지만 여전히 평온한 이유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어떤 고대의 길을 걸으며 우리가 성급히 떨쳐버린 가장 중요한 무엇을 본 느낌이 들었다. 우리보다 가난하지만 그들이 포기하지 않은 그 어떤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내가 걸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1. 한 달이 넘는 장기 여행일 때는 현지인 집을 빌려 생활한다. 아무리 비싸다 해도 호텔보다는 싸다. 먹거리는 우리보다 싸고 질이 좋아서 하루 한 끼는 집밥을 먹는다.
2. 여행지에서 다른 여행을 기획한다. 유럽 내 저비용 항공 노선이 구석구석 연결돼 있다. 평소에 가기 어려웠던 서아시아행 노선도 굉장히 많다.
3. 여름이라면 지중해를 오가는 유람선 여행도 추천하고 싶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라면 낭만적일 듯. 경비도 생각보다 싸서 시도해볼 만하다.
소설가 백가흠은…
2001년 단편 ‘광어’로 등단한 이래, 불편한 인간과 현실을 날카롭게 해부해 진실을 탐문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단편집 ‘귀뚜라미가 온다’ ‘조대리의 트렁크’ ‘사십사’, 장편 ‘나프탈렌’ ‘향’ 등이 있다. 여행 마니아이기도 하다.
<출처> 2016. 11. 4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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