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및 정보/- 터키.그리스

그리스 문명기행, 데살로니키를 가다

by 혜강(惠江) 2017. 4. 14.

 

그리스 문명기행 <상>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내뱉었던 환성과 탄식들…

지중해의 날 선 햇빛아래 봄날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데살로니키 = 이태훈 기자 

 

 

 

신약성서 속 사도 바울이 머물렀던 데살로니가로 익숙한 곳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

 

 

 

▲그리스 테살로니키 고지대의 비잔틴 성벽 위엔 햇볕을 쬐며 발아래 펼쳐진 시내 풍경과 에게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 있다. 이 도시를 소유했다고 믿었던 제국과 정복자들은 사라졌으나, 영욕의 시간을 뛰어넘은 도시는 제국의 유산을 제 속에 진주처럼 품고 살아남아 나그네들의 귀에 옛 영광을 속삭이고 있었다. /테살로니키=이태훈 기자

 
 

 동로마제국 제2 도시로 번성하던 시절 비잔틴 사람들은 등 뒤의 성벽을 방패 삼아 북쪽에서 들이치는 슬라브 침략자들을 막아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상인들이 바닷길을 통해 도시로 몰려들었고, 시대마다 다른 황제가 새겨진 금화를 주고받았다. 비잔틴 교회들은 이슬람 오토만제국이 도시를 점령하며 모스크로 바뀌었지만, 그리스 영토로 돌아온 뒤 다시 교회가 됐다. 서로 다른 인종과 민족이 내뱉었던 환성과 탄식들이 지중해의 날 선 햇빛 아래 봄날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신약성서 속 사도 바울이 머물렀던 '데살로니가'로 익숙한 곳,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다.

 

기원전 342년 무렵 마케도니아 왕 필립 2세가 그리스 동부 테살리에서 포케이아인들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날 궁정으로부터 공주 출생 소식이 도착했다. 왕은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이 아이를 ‘테살리의 승리’라고 부르게 하라!” 공주의 이름은 ‘테살리(Thessaly)’의 ‘승리’(nike), ‘테살리니케’가 되었다. 승전의 기쁨을 품은 이름이지만 그 삶은 비극이었다. 대제국을 건설한 오빠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년)이 서른셋에 요절하자 휘하의 장군들은 영토를 차지하려 칼을 뽑고 피를 뿌렸다. 왕위를 찬탈한 카산데르 장군은 전리품처럼 공주를 아내로 삼고, 에게해 테르마이코스만(灣) 교통 요지에 세운 도시에 그녀의 이름을 붙였다. 남편 사후 그녀는 왕위 싸움에 휘말려 아들의 칼에 죽는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상이 서 있는 중심가 아리스토텔레스광장을 지나 해안 도로를 따라 걷는다. ‘화이트 타워(The White Tower)’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허락한 마케도니아 공주 역시 탑처럼 하얗고 우아하게 빛났을 것이다. 비잔틴 시대 바다로부터 오는 외적을 막는 망루였던 탑. 오토만 점령기에는 한 번 갇히면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감옥이었지만 1912년 도시가 다시 그리스의 영토가 된 뒤 시민들은 이 탑에 까맣게 더께 앉은 전쟁의 그을음과 핏자국을 닦아낸 뒤 ‘화이트 타워’라 부르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로마제국의 갈레리우스 황제가 세운 ‘갈레리우스 아치’가 있다. 본래 8개의 문과 중앙 상부에 거대한 돔을 가진 구조였고 동서를 오가는 여행객들은 모두 이 문 아래를 지났다. 지금은 9.7m 너비의 중앙문과 4.95m 너비의 제2문 구조물만 남아 과거의 영광을 추억한다. 그는 황제가 되기 전인 서기 298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해 이 거대한 개선문을 지었다. 황제의 영광을 새긴 대리석 조각이 바닷바람과 세월의 풍상을 견뎌내며 살아남았다. 로마 판테온과 흡사한 건물 ‘로툰다(Rotunda)’도 흥미롭다. 본래 갈레리우스가 본인을 기념할 무덤 사원으로 지었으나 황제는 지금의 세르비아에 묻혔고, 건물은 비잔틴 시대에 교회가 되었다가 오토만 점령기에 모스크로 쓰였다.



‘로만 포럼’ 혹은 ‘로만 아고라’로 불리는 거대한 원형극장은 1962년 버스 정류장을 옮기려 땅을 팠을 때 햇빛을 봤다. 기원전 30년부터 기원후 143년까지의 도시 관련 기록이 새겨진 명문이 함께 발굴됐는데,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바울의 전도 여행 당시 이야기를 증명하는 기록이 남았다.

 

 

   그리스 동부 테살로니키, 고(高)지대 주거 지역 '아노 폴리'의 비잔틴 성벽 위에 앉아 시내 풍경과 에게해(海)를 바라보며 이 도시가 겪은 2000년 넘는 세월을 상상한다. 처음 이 도시에 이름을 붙였던 마케도니아의 정복 군대가 유럽과 소아시아를 잇는 대로 위를 행진하고, 이어서 로마제국 황제가 승리를 기념해 세운 건축물들이 솟아오르고 또 무너졌다.

 

  시내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만나는 ‘아이아 소피아’ 교회도 수많은 비잔틴 교회 중 하나다. 8세기 처음 세워진 이 교회는 도시가 가진 15개 유네스코 세계유산 가운데 하나.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제단 뒤 모자이크화에 그려진 성모(聖母)가 두려웠다. 성모의 눈이 그들을 뒤쫓는다고 생각한 제국의 정복자들은 눈동자를 파냈다. 기둥 상단의 석조 장식, 벽에 붙은 프레스코화들이 각각 낡았거나 새로워 이채롭다. 헤쳐나온 세월 동안 옛 건물 위에 계속해서 새로 짓고 세웠기 때문이다. 도시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딴 ‘아이오스 디미트리오스’ 교회도 아름답기로 첫손에 꼽힌다. 2000년에 걸쳐 전쟁·지진·화재를 견뎌낸 도시 수난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 곳이며, 지금도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로마의 건축물, 비잔틴 성벽과 교회, 오토만의 목욕탕과 상점을 둘러본 뒤 도달하는 이 도시 순례의 정점은 고고학 박물관이다. 유적 위에 세워진 도시, 찬란한 황금 세공품과 그리스 석상, 도자기와 투구, 묘석과 유골들이 하나도 허투루 볼 것이 없다. 점령자들은 이 도시를 가졌다고 믿었지만, 테살로니키는 그 모든 정복의 역사를 품어 자기 안에 소유하고 있다고 웅변하는 곳이다.

 

 

  제국이 번성할 때 도시는 함께 번성했다. 한 제국이 쓰러지면 도시는 또 다른 제국과 함께 번영을 이어갔다. 그리스인들은 누군가 조바심을 내고 성급해 할 때 “할라라!”라고 말한다. ‘조급히 굴지 말라’는 의미다. 테살로니키에선 천천히 걷는 편이 옳다. 느리게 살피고 깊이 상상하면 이 도시는 더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아이오스 드미트리스 교회 내부, 아이 소피아교회 둠의 성모자 모자이크화, 고고학박물관의 구리 세공 항아리(왼쪽부터)

 

 

로마 황제 갈리레우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갈리레우스 아치'

 

요새 망루, 오토만 시대의 감옥이었던 '화이트 타워'

 

▲그리스 제2의 무역항인 데살로니키 해변

 

 

 

 

<출처> 조선닷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