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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부산. 경남

산청, 문익점의 목면시배유지(木綿始培遺址)

by 혜강(惠江) 2005. 11. 23.

경남 산청

 

문익점의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


·사진 = 남상학

 

 

 

삼우당 문익점 선생 유허비

 

 

  지리산 천왕봉의 기상이 서린 산청, 빼어난 자연경관과 청정함이 있고, 고귀한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며, 일찍이 우리의 의생활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문익점이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곳이다.

  남명 조식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나서 20번 도로로 동진하여 단성으로 달렸다. 추수를 끝낸 들판은 한가롭고 적요하다. 반달 모양의 논으로 둘러싸인 남사민속마을은 높은 흙돌담으로 둘러친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약 40여 가구 한옥 집들은 특별히 단장하지 않은 탓으로 오히려 옛 고향의 멋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다.

   얼마 안 가서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경호강이 한가롭게 흐르는 들판 곁 아담하게 지은 문익점목화시배지(文益漸木棉始培遺址)에 당도했다. 강물이 거울처럼 맑고 호수처럼 잔잔하다고 ‘경호(鏡湖)’란 이름이 붙었다.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내려오는 임천강과 남덕유산에서 내려온 위천이 경남 산청군 생초면에서 만나 경호강을 이뤄 진주 진양호까지 80리를 흘러간다. 3번국도와 대전~진주간 고속도로 사이를 평행하게 흐른다.

 

 

 

 

 

  사적108호인 문익점목화시배유지는 문익점(文益漸, 1331-1400) 선생이 목화를 처음으로 심고 재배했던 곳에 세워졌다. 시배(始培)의 터전으로 알려진 이곳은 배양(培養) 마을로 불리며 <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선생은 고려 충해왕  원년(1331)에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일신(日新)이고,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여 정언(正言)이란 벼슬에 오른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신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씨앗을 몰래 붓통에 넣어가지고 왔다.   그 후 그 씨앗을 장인 되는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단성 땅에서 처음 재배하였다. 처음에는 재배 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목면(木棉) 심기에 성공하여 목화 재배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로부터 목화를 심고, 목화를 따서 씨아에 넣고 물레에 틀어 실을 짜냄으로써 우리나라 의생활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셈이다. 이럴 즈음 어머니를 잃은 문익점은 꼼짝 않고 어머니 묘를 지켜 3년을 보냈다고 한다.

 

 

 



   
조선조의 태종은 그의 효성과 목화 수입의 공로를 인정하여 증참지의정부사강성군(贈參知議政府事江城君)에 봉하였고, 그를 사모하는 후예들은 현재 신안면 신안리에 도천서원(道川書院)을 짓고 배향(配享)하였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이 광해군 4년(1612)에 중건(重建)되었다.

   목면 시배 유적지의 4,627평의 부지에는 제1전시관, 제2전시관, 부민각 사적비, 효자비각, 면화재배지 등을 갖추고 있다.   제1전시실에는 물레와 무명이 되기까지의 과정, 면화의 역사, 베틀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2전시실에는 면화로 짠 각종 고유 의상이 진열되어 있다.

 

 

 

삼우당 효자비각
목면 시배 전시관



   전시관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목화의 생장과정'이다. 새싹부터 2주, 4주, 10주, 18주 이후 꽃이 지고, 다래가 열리고, 솜이 활짝 피는 모습을 차례로 보여준다. 
목화(木花, 綿花)는 1년 생 식물로 고온 다습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꽃은 7월 하순에서 8월 상순에 걸쳐 피어나며 꽃봉오리가 맺히고 난 뒤 꽃이 피기까지 약30일(9-10월) 걸린다.

 

  목화는 봄에 한번, 가을에 한번 그렇게 두 번 꽃을 피운다. 금방 핀 것은 흰색을 띄며 떨어질 즈음에는 붉은 색이다. 꽃이 진 자리에 진한 녹색의 다래가 열리고 다래가 익어 벌어지면 면화가 되는 것이다.

 

 

 

시배지의 목화밭

 

   실감기, 잿물 만들기, 물레질, 바디, 고치말기, 씨아구조, 씨앗기, 활타기, 고치말기, 실잣기, 무명말기, 무명매기, 무명짜기 등 다양한 자료가 있어 학습하는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전시관 마지막에는 약용식물인 황백, 치자, 잇꽃, 괘화, 쪽으로 물들인 천연염색천도 멋있게 드리워져 있다.

   고려말기에 명주와 모시, 삼베, 가죽옷이 있긴 했으나 양반만 사용할 수 있었다. 겨울이 되면 일반 백성들은 여름옷을 덧입으며 추위를 견뎌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목화의 상용화는 의생활을 바꾸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위로부터 물레, 무명매기, 무명짜기(베틀)
조선시대 무명의복


   목화는 삼베, 모시, 명주보다 내구성 및 흡수성, 보온성이 뛰어났고, 이모작이 가능해 서민층으로부터 사랑받았다. 이후에는 상. 하층 모두 애용하게 됐다.

   전시관 뒤편에는 부민각, 목화밭, 효자각, 천염염색 체험장이 있다. 전시관 앞보다 훨씬 넓게 조성된 목화밭에는 가지런히 줄을 세운 목화들이 가을이 되어 솜을 달고 있다. 부민각(富民閣)”은 문익점 사후인 세종 때 부민후로 추봉되면서 나라에서 7칸 집을 지은 것이다. 

 

 

 

나라에서 세워준 부민각

 

제7대 세조(世祖) 때 그의 사당이 세워졌으며, 만인을 따뜻하게 입힌 공로로 충선공(忠宣公) 시호도 받았다. 이황(李滉), 송시열(宋時烈), 이이(李珥) 등 여러 사람이 그를 찬양한 글을 지었다. 율곡 이이의 찬양시를 보면, 

 

   옛적에 신농이 백성들에게 논밭 갈기를 가르쳤고
   후직이 백성들에게 모심기를 가르쳤는데
   문 충선공은 만백성들에게 무명옷을 입혀주었으니
   그 충성한 공은 옛적의 그것보다 갑절이나 되도다.

 

     神農敎民耕(신농교민경)

     后稷敎民稼(후직교민가)

     忠宣衣我民(충선의아민)

     豐功倍前昔(풍공배전석)

 

 

 

  이 시판은 부민각 안에 걸려 있다. 바로 옆 정각 안에는 효자리비(孝子里碑)가 두 개 서 있다. 고려 때 세운 것으로 비가 낡아 똑같이 만들어 함께 세웠다. 효자비는 고려 우왕9년(1383)에 하사한 것으로 문익점의 효심이 담겨있다.

 

 



   남해안 일대에 왜놈들이 출몰하며 마을로 쳐들어오자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갔는데, 모친상을 당한 문익점은 3년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홀로 여막(廬幕)을 지키고 있는 문익점을 보며 탄복한 왜장이 ‘물해효자(勿害孝子)’라는 팻말을 걸어두고 물러난 덕분에 이 마을은 왜구의 화를 면하게 된 이야기다.

   이런 그의 효심과 함께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삼우당(三憂堂)'이란 호다. 그 의미는 항상 국가의 어려움을 걱정하고, 성리학이 보급되지 않음을 걱정하며, 자신의 도(道)가 부족함을 걱정한다는 것으로 선생이 직접 지은 것이다.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는 문익점의 위패를 모신 도천서원(道川書院)과 문익점의 묘(경남 기념물 제66호)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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