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유적지를 찾아서
- 벼슬을 끝내 사양한 산림처사 -
글·사진 남상학
어제 하루 종일 운전에 좀 피곤하기도 했으나, 공기가 맑은 지리산 기슭 유평마을에서 잠을 잔 탓인지 단잠에서 깨어난 몸은 예상 외로 거뜬하고 상쾌했다. ‘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다’는 천왕봉이 있는 곳. 또 산청에는 조선 시대 실천적 학문을 중히 여겼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원사계곡을 나와 59번 도로로 우회전 덕산(시천)으로 향했다. 감이 노랗게 익은 마을은 마침 오늘이 덕산 장날이어서 길가에 여러 물건들을 진열하느라 부산했다.
선비정신의 산실 덕천서원(德川書院)
먼저 찾은 곳은 덕천서원. 서원 입구의 입덕문(入德門)에 이르니 수령이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노랗게 치장하고 우리를 맞는다.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인 덕천서원은 1974년 2월 16일 경남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그 앞쪽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이 서원은 1576년(선조 9) 조식(曺植)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사림(士林)들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일종의 서원이다. 1609년(광해군 1)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곳이고,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의 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오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 집으로 중앙에는 조식의 위패, 오른쪽에는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덕천서원의 앞 도로를 건너 강가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은 1582년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뒤에 중건한 것이며, 취성정(醉醒亭) 또는 풍영정(風泳亭)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곳에 오르니, 그 옛적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지러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오직 학문과 시문으로 마음을 닦고 있는 선생의 모습이 선하게 들어오는 듯하다.
현실에 살면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했던 남명의 현실주의 정신. 이러한 선생의 높은 지조와 덕이 있었기에 후학들이 이곳에 그의 학덕을 기려 이 서원을 세운 것이리라.
남명 학문의 요람 산천재(山天齋)
덕천서원에서 나와 20번 도로로 덕천강을 건너 단성 쪽으로 2㎞ 정도 가면 남명 조식 선생이 61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던 산천재(山天齋, 국가문화재 사적 제 305호)가 있다. 서북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곳에서 발원한 물이 중산 삼산으로 흐르다가 양당에서 합쳐져 덕천을 이루면서 아담한 들판을 여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선생이 이곳을 선정한 이유는 '덕산복거'(德山卜居)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다만 천왕봉이 옥황상제와 가까이 있는 것을 사랑해서라네
빈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을 건가
은하수 같은 맑은 물 십리에 흐르니 먹고도 남겠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도로변의 산천재로 들어가다 보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선생을 위시하여 문인들의 학덕을 연구하기 위하여 설립된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뜰의 울타리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산천재가 있는데, 그곳에는 산천재와 작은 사랑채 하나, 그리고 남명선생 문집책판을 보관하는 서고 등 세 채의 건물이 있을 뿐이다.
산천재는 1561년(명종 16년)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방치되다가 1817년(순조 17년)에야 복원되었다고 한다. 산천재(山天齋)란 이름은 주역대축괘(周易大畜卦)에서 따온 것이고, 남명 조식 선생이 학문과 인격, 정신과 경륜을 후학들에게 전해준 곳으로, 특히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쳐(倡義討倭)’ 나라를 구한 선비정신의 도량이다.
이 산천재에서 남명이 학생들을 가르친 교육철학의 요체(要諦)는 '경(敬)'과 '의(義)'다. 이는 조선 유학교육 중에서 좀 빈약했던 행동을 중시한 것으로, 산천재는 바로 행동철학의 발상지라고도 볼 수 있다.
산천재 현판 옆 세 면에는 그림이 있다. 지금은 희미해져서 정확한 그림을 볼 수 없는데, 그 그림은 각각 밭을 가는 농부와, 소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신선들, 개울에서 귀를 씻고 있는 선비의 그림이라 한다.
이런 산천재가 건물이나 안내판 등 전반적으로 보아 관리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산천재 앞으로 도로가 뚫려 있다. 남명이 늘 창을 열고 대했을 천혜의 스승인 자연이 잘린 것 같아 씁쓸하다.
남명의 삶과 학문의 태도
합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고,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짖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후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1551년 오건(吳健)에 이어 정인홍(鄭仁弘) ·하항(河沆) ·김우옹 ·최영경(崔永慶) ·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선생은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중국의 죽림 칠현(竹林七賢)을 본받은 산림학파(山林學派)의 한 사람으로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이 살았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만큼 사화가 자주 일어난 시기로서 훈척(勳戚)정치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였다. 그는 성년기에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선생의 사상은 노장적(老莊的)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하였다.
경으로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외부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거듭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폐정(弊政)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하였고,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서 참여의지를 보여준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선생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다. 선생은 퇴계와 함께 영남의 2대 종사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퇴계가 벼슬에 나아가 왕권에 충성한 데 반해 선생은 사림에 묻혀 도의를 강마하고, 민본주의 정치사상으로써 백성들 편에 서서 국정을 비판하면서 실천유학을 고취하였으니 그 취향이 크게 달랐다.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홍 등 남명의 문인들이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남명에 대한 폄하(貶下)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南冥學)은 그 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學記類編)》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율곡 이이(李耳)는 그를 가리켜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온전히 지킨 이는 남명 선생뿐’이라 했고, 택당 이식(李植)은 ‘선생은 고고한 자세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선생은 진정 조선 선비정신의 전형이었다.
산천재 입구에 세원진 남명 선생 시비(詩碑)
산천재가 있는 공원에는 남명 선생의 시비가 서있다. 시비에는 그이가 예순한 살 때 이곳에 들어와 산천재를 짓고 시냇가 정자에 써 붙였다는 시가 새겨져 있다.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지리산으로 귀의한 남명의 마음을 표현한 듯하다. "지리산을 다른 이름으로 ‘두류산(頭流山)’이라 부른다. 꽃봉오리 같은 산봉우리들과 꽃받침 같은 골짜기들이 백두산으로부터 연면히 흘러내려와 솟구쳤기 때문이다." 고려 문인 이인로(李仁老)의 설명이다. 선생이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고 두류산(지리산)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할 때 선생은 몇 편의 시조를 지었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듯고 이졔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셰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오 나는 옌가 하노라.
은둔 생활 중에 자연애. 자연귀의(自然歸依)를 노래한 작품이다. 벼슬을 마다하고 산 속에 들어가 학문 수업에만 전념한 선생은 이 곳 지리산 양단수를 무릉도원에 비유했다. 선생은 이상향인 무릉도원을 지리산에서 찾았고, 그 속에서 마음껏 즐긴 것이다.
삼동(三冬)에 뵈옷 입고 암혈(嚴血)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볏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지다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벼슬을 극구 사양하여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면서도 선생은 중종 임금의 승하를 애도하는 노래를 지었던 것이다.
새로 조성한 남명 기념관(南冥記念館)과 유적들
산천재에 비해 길 건너편의 남명기념관은 잘 정돈되어 있다. 3000평 부지에 54억 원을 들여서 세운 남명기념관 경내에서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왼편 뜨락에 세운 남명의 석상(石像)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화강암 석상은 멀리 천왕봉을 배경으로 서 있다. 멀리 우람한 천왕봉의 위용은 아마도 실천적 학문과 고매한 정신을 지녔던 선생의 모습이 아닐까.
선생의 탄신 500돌을 맞아 지난 2001년 그 초석이 마련되어 건립된 기념관에는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소상하게 밝혀 전시하고, 그의 저서와 관련 유품을 전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알려주는 영상실을 갖추었다.
기념관 옆에는 선생의 가묘(家廟)인 여재실(如在室)과 종가, 신도비 등이 있고, 뒷산에는 선생의 묘소가 있다. 여재실은 문중에서 제사를 드리는 가묘로 남명 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여재(如在)란 『예기(禮記)』『중용(中庸)』의 「귀신(鬼神)의 성덕(盛德)이 지극하도다.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만져도 만져지지 아니하나…… 넓고 넓게 마치 우리의 머리 위 그리고 우리의 좌우(左右)에 여실(呂實)히 계신다.」 고 한 말을 따다가 이름한 것이다.
신도비(神道碑)는 처음 내암 정인홍이 세웠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철폐되고, 미수 허목의 글로 다시 세웠으나 약 90년 전에 철폐되었고, 현재의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글로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그리고 뒷산의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선생의 묘가 있다. 임좌원(壬坐原)에 자리잡고 있는 선생의 묘소는 선생이 생전에 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대곡(大谷) 성운(成運) 선생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있다.
조국이 위란(危亂)의 처지에 놓였을 때 선생의 문하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일어나 국란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한 교훈을 새기며, 오늘날 행동 없는 지성인’들의 무기력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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