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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부산. 경남

합천 황강(黃江)의 모래밭과 함벽루(涵碧樓)

by 혜강(惠江) 2006. 10. 22.

 

합천 함벽루

 

합천 황강(黃江)의 모래밭과 함벽루(涵碧樓)

 

- 대야성 기슭의 수려한 풍광에 풍류시인들이 매료되다 -

 


·사진 남상학



 

 


   황강은 경상남도 거창군(居昌郡)과 합천군(陜川郡)을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강으로 길이는 111㎞나 된다.  거창분지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합천군에서 동쪽으로 흘러 위천(渭川) · 대천(大川) · 옥천(玉川) · 가천(加川) · 가야천(伽倻川) 등을 합하여 청덕면(靑德面)에서 낙동강 중류로 흘러든다.  


  하도경사(河道傾斜)가 심하고 토사의 퇴적이 많은 강으로 범람원 · 자연제방 · 저습지 등 다양한 하천지형이 발달한 강이다.  특히 하류는 한국의 대표적인 천정천(天井川)을 이루고, 맑은 물과 함께 깨끗하고 드넓은 모래밭으로 유명하다.  

 

 

 

* 강 건너에서 바라본 함벽루, 모래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합천8경 중 제5경인 함벽루(涵碧樓)는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203번지에 위치하며, 합천 군청의 남쪽 4리 지점의 대야성 발치에 있다.  이 누각은 뒤로는 응봉산(膺峰山) 암벽이 우뚝하고, 앞으로는 남정강(南汀江)이 흐른다.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 계곡, 황계폭포, 남산제일봉, 황매산 모산재, 합천호 및 그 벚꽃 길과 함께 합천 8경의 하나로도 유명하다. 

 

 



   이 누각은 고려 충숙왕 8년(서기1321년 )에 합주 지주사 김모(金某)가 창건하였는데, 연대가 오래되어 이름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수차례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절벽을 등지고 정면3칸, 측면2칸, 2층 누각, 5량 구조,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누각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는 배치로 유명하다. 

   함벽루에 올라 남쪽으로 바라보면 뭇 산이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함벽루 바로 곁 절벽에 의지하여 옛 절이 있어 새벽 종소리와 저녁 북소리가 은은하게 구름 밖에서 들려오듯 한가로운 풍광을 빚어낸다. 현재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야성 기슭에 위치하여 황강 정양호를 바라보는 수려한 풍경으로, 안진(安震)은 '한 채의 누각이 처마와 기둥이 날며, 춤추고 단청과 그림이 눈부시고 빛나서 봉황새가 반쯤 공중으로 날아가는 듯하다’고 누각 자체의 아름다움 묘사했다.

    또 춘산(春山) 선생은 처마물이 바로 강물에 떨어지는 것을 특기하면서 날아가는 듯한 누선(樓船)이 포구에 정박한 것 같다며, 강과 누각의 기묘한 조화에 대하여 묘사하였다. 

 

 

 

  이 고향인 남명 조식을 비롯해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 등이 현판에 글을 보탰고, 뒤쪽 암벽에 각인된 ‘함벽루’라는 글자는 우암 송시열의 것이다. 남명 조식은 ‘함벽루’라는 시 한 수도 남겼다.  남명 조식이 남긴 ‘함벽루’라는 시 한 수는 함벽루에 올라 감흥에 젖어 이렇게 노래했다. 

 

   남곽자(南郭子)처럼 무아지경에 이르진 못해도 

   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 없구나

   뜬구름의 일을 배우고자 하나

   오히려 높다란 바람이 흩어 버리네

 

     喪非南郭子(상비곽남자)

     江水渺無知(강수묘무지)

     欲學浮雲事(욕학부운사)

     高風猶破之(고풍유파지)

 

 

 

 

 

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시는

 

   북쪽은 산이 높이 솟아 있고

   동쪽은 강물이 유유히 흐르네.

   기러기는 고을(籓州) 밖에 떨어 지고

   연기는 대숲집(竹屋) 위로 올라 오네.

   한가로이 찾아드니 나의 뜻 멀고

   높은 누각 기대서니 강위에 뜬 것 같네.

   다행히 관직에 얽매이지 않아

   여기와 머무는 것이 자유롭네.


      北來山陡起(북래산도기)

      東去水漫流(동거수만류)

      雁落藩州外(안락번주외)

      烟生竹屋頭(연생죽옥두)

      閒尋知意遠(한심지의원)

      高倚覺身浮(고의각신부)

      幸未名韁絆(행미명강반) 

      猶能任去留(유능임거류)

 

 

 

또, 조선 철종 때의 난포(蘭圃) 이대형(李大馨, 1850~1921)의 시를 보면,

 

 

   반백년 남짓한데 오늘이 가장 좋아

   이승에 천만다사 물위에 띄워 놓고

   산승이 잠을 깨니 그 자리 구름 차고

   늙은 어부 돌아오니 눈(雪) 가득 실었구나

   너희야 나를 알아 웃음으로 대하건만

   이름난 좋은 땅에 그저 잠시 머물었네

 

     半百流年今日好(반백류년금일호)

     萬千多事此生浮(만천다사차생부)

     山僧睡起雲盈榻(산승수기운영탑)

     釣叟歸來雪滿舟(조수귀래설만주)

     嗟爾慣顔應笑我(차이관안응소아)

     名區只得片時留(명구지득편시유)

 

 

 

 

함벽루를 시로 읊은 표근석(表根碩, 중종 때 참봉을 지냄)의 시를 보면,

 

   봄 산의 새벽 비는 등라(등나무)를 씻고

   절 밑의 시냇물은 저녁 되어 더욱 많다.

   고기잡이 피리소리에 날씨가 차가운데

   저 멀리 강 건너에 두 세집이 보인다.

 

     春山曉雨洗藤蘿(춘산효우세등라)

     寺下寒流晩更多(사하한류만경다) 

     漁笛數聲天氣冷(어적수성천기냉) 

     隔江遙見兩三家(격강요견량삼가) 

 

 

 


  석벽을 등지고 황강을 굽어보고 있는 정자
는 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보다 연륜이 깊다. 단청을 새로 입혀 옛 맛은 덜하지만 석벽과 바위에 핀 ‘돌꽃’이 지나온 세월을 대변해 준다. 당대 선인들은 왜 천년 세월 핏빛 역사를 고이 간직한 절집 옆에 정자를 세워 풍류를 즐겼을까

 

  이들은 어부의 피리소리와 차가운 하늘 기운을 노래(표근석)하기도 하고, 공명의 굴레에 벗어난 여유로움을 읊기도(이황) 하였다. 가만히 구양수의 취옹정(醉翁亭)에 견주는 사람(권시경)이 있는가 하면, 함벽루를 중수하고 난 다음의 풍경과 연회를 묘사한 사람(조진익)도 있었다. 시대를 오르내리며 많은 시인들이 이곳에 와서 저마다의 흥취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아름다운 누각에 오른 시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감흥이 없을 수 없었으리라. 예부터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기고 편액을 남긴 사람은 참으로 많지만 현재 게판(揭板)되어 있는 경우를 중심으로 거명하면 다음과 같다.


정이오(鄭以吾), 표근석(表根碩), 이황(李滉), 조식(曺植), 조준(趙俊), 권시경(權時經), 김시영(金始英), 조진익(趙鎭翼), 조두순(趙斗淳), 민치순(閔致純), 이범직(李範稷), 허사렴(許士廉), 이중하(李重夏), 상집(尙集), 김영헌(金永憲), 이대형(李大馨), 문경종(文璟種), 최익현(崔益鉉), 송병선(宋秉璿) 등이 그들이다.

 

  함벽루 옆에 연호사(烟湖寺)가 있다. 종교적으로 보면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고 있다. 연호사는 합천을 대표하는 해인사(802년)보다 159년 앞선 643년 와우선사가 세운 천년이 넘는 절이다.  단청 화려한 일주문을 지나 절로 향했다. 절로 가는 입구에 비각들이 우뚝 서 있다. 합천지역에 흩어져 있던 비들을 이 자리에 옮긴 것이다. 산비탈에 남명 조식 선생이 짓고 고산 황기로가 쓴 ‘이증영(李增榮~1563) 유애비(遺愛碑)’가 반긴다. 비는 합천군수 이증영이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구호하고 청렴하게 관직 생활을 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연호사는 와우선사가 대야성 싸움에서 숨진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의 가족과 장렬하게 전사한 장병 2,000여 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원사(願寺)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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