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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김제 가볼 만한 곳 총 정리, 모악산 아래 만경평야에 펼쳐진 삶의 이야기

by 혜강(惠江) 2024. 12. 10.

 

 

김제 가볼 만한 곳 총정리

 

모악산 아래 만경평야에 펼쳐진 삶의 이야기

 

글·사진 남상학

 

 

 

   김제에는 모악산 아래 4대 종교유적지들이 있다. 모악산 아래에는 불교 개신교 천주교 증산교 등 종교의 성지가 오롯이 남아 있다. 불교를 대표하는 금산사와 귀신사 개신교의 금산교회 천주교의 수류성당 증산교의 동곡약방이 그것. 종교도 다른 만큼 둘러보는 느낌이나 풍광도 사뭇 다르다.

  그런가 하면, 호남평야의 중심인 김제에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유서 깊은 벽골제가 있고, 소설가 조정래의 장편소설 아리랑의 이야기가 담긴 아리랑 문학관과 아리랑문학마을도 함께 방문해보면 좋다.

 

▲김제 문화관광 홈페이지

 

김제군 관아와 향교 (사적)

김제시 동헌4길 46-1 (교동 9), 063-547-6477

 

  김제는 삼국시대 때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 동안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 동안 중요한 정치세력이 배출되지 않았음에도 군으로써 읍의 격이 비교적 높은 지역으로 관아와 향교 건물들이 남아있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인 김제관아는 조선 시대 당시의 건물(동헌, 내아, 피금각, 관리사로 부르는 건물 1채)이 다수 남아 있다. 현종 8년(1667)에 외아와 함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숙종 25년(1699)에 수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러 차례의 수리와 개축을 거쳐 최근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원래는 안채, 안행랑채, 안측간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만이 복원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외관을 갖추었으며, 동헌의 내아 건물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유구 중의 하나이다. 내아의 바로 앞 남쪽에 외아가 있다. 

 

▲김제관아

 

  관아와 향교가 인접한 거리(관아의 동헌과 향교 사이의 거리 약 130)에 함께 보존되고 있다. 김제향교는 대성전이 조선 시대 건물이고, 명륜당과 문루인 만화루 등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그러나 향교 건축의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어서,  향교를 중심으로 교화 기능을 담당하던 우리나라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김제관아와 향교는 조선 시대 행정기관과 교육기관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고, 관아의 동헌과 내아가 함께 남아 있는 매우 드문 예라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다.

 

▲김제향교

 

모악산 (도립공원)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산 1

 

  높이 795.2m. 노령산맥의 말단부에 솟아 있는 모악산(795.2m)은 주위에 선각산·국사봉 등이 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모악이라고 했다. 동쪽 사면을 제외한 전사면이 비교적 완만하다.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계류는 구이 저수지에 흘러든 뒤 삼천천을 이루어 전주시로 흐른다.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두월천·원평천은 동진강에 흘러들며, 김제 벽골제의 수원이 된다.

  지금도 주변에는 사금광산이 몇 군데 있다. 또한 이 일대는 계룡산의 신도안, 풍기의 금계동과 함께 풍수지리설에 의해 명당이라 하여 좋은 피난처로 알려져 있다. 한때 수십 개의 신흥종교 집단이 성행했으며, 미륵신앙의 본거지로서 용화교 등이 일어났다.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한국 거찰의 하나인 금산사를 비롯한 많은 문화유적이 있어 호남 4경의 하나로 꼽힌다. 금산사-심원암-산정-수왕사-원기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봄 벚꽃, 가을 감나무 숲이 운치를 더해주며, 금산사-심원암-산정-수왕사-원기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어 관광객과 등산객이 많이 찾아온다.금산사 (사찰)

 

 

금산사 (사찰)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1 (금산리 39), 063-548-4441~2

 

  모악산 도립공원 입구에 우뚝 서 있는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고, 776년에 진표율사가 고쳐 지어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국보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지정문화재 10여 점이 있으며, 그 외에도 부속 건물이 많아 호남 제일의 고찰로 손꼽힌다.

   특히, 금산사에는 보물이 많다. 미륵전 미륵보살상은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대라 하며, 삼존불 중 가운데 미륵불상이 11.82m, 좌우불상은 8.8m이나 된다. 절 안에는 보물로 지정된 금산사 노주, 금산사석련대 ·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 금산사 오층석탑 · 금산사 금강계단 ·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 금산사 당간지주 ·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 · 금산사 대장전 · 금산사 석등 등의 귀중한 국가유산이 있다.

  목조로 된 미륵전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삼층법당으로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있다. 봄철이면 산 입구에서부터 금산사까지 늘어선 벚꽃나무의 장관을 보려고 각지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며, 한겨울에도 신도들이 미륵전의 미륵 보살상을 찾아와 절을 올리거나 탑을 빙빙 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금산교회 (개신교, 문화재)

김제시 금산면 모악로 407 ( 금산리 290-1), 063-548-4055

 

  금산사 아래 용화마을에 오래된 교회가 있다. 1908년 전주 선교부의 데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기 지은 한옥교회이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사기(事記)에 의하면, 처음의 교회는 1905년에 5칸으로 지었으나, 190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 금산교회 옆으로 1988년에 새로 지은 교회 본당과 사택이 들어서 있다.

  건물은 남북방향으로 5칸이며, 여기에서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 뒤집힌 ㄱ자 형태를 이룬다. 내부는 통칸으로 이루어졌으며, 남북방향 5칸과 동쪽 방향 2칸이 만나는 곳에 강단을 설치하여 남쪽으로 남자석, 동쪽으로 여자석을 분리하여 마련하였다. 이는 한국 초기 교회건축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로 한국 전통사회의 남녀구분 관습을 고려한 것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서양식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킨 이 교회는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각 구조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문화재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금산교회에는 김제 땅의 거부였던 지주 조덕삼과 그가 거느린 머슴이자 마부 이자익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국인 선교사의 전도로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지주와 머슴은 신실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나란히 장로에 입후보했다. 그런데 사재를 털어 금산교회를 지은 거부 조덕삼은 떨어지고, 한낱 마부인 데다 그것도 열다섯 살이나 어린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됐다.

  지주는 머슴이 장로가 된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훗날 조덕삼은 이자익을 평양으로 유학 보내 목사교육을 받도록 했고,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금산교회로 초빙해 담임목사로 깍듯이 섬겼다. 교회는 지금도 반들반들 잘 관리되고 있다.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신앙 앞에서 겸허했던 지주와 머슴의 동화와 같은 일화를 생각해 본다. 목사가 된 머슴보다, 그 목사를 섬긴 지주의 신앙을 생각한다.

 

 

귀신사 (사찰)

김제시 금산면 청도6길 40 (청도리 81), 063-548-0917

 

  귀신사는 금산사에서 모악산 서쪽 고개를 통하여 전주로 넘어가는 길옆 청도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귀신사는 676년(문무왕 16),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백제 법왕 때 왕실의 내원사로 처음 세워졌다는 주장도 있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국신사였다고 한다. 그 후 통일신라 말기 도윤이 중창한 뒤 귀신사로 개칭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원명국사(1090~11410가 중창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구순사로 불렸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부분적인 중수와 대대적인 중창을 거쳐 1934년에는 대적광전 등을 중수한 뒤 다시 귀신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귀신사는 원래 금산사를 거느릴 정도로 규모가 큰 절로 고려 말에는 쳐들어온 왜구들 300여 명이 주둔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쇠퇴하여 작고 소담한 사찰로 남았다. 현재 절에는 지방유형문화재인 3층석탑 석수(石獸), 부도 등의 석조물이 있으며, 건물로는 보물 대적광전, 명부전 그리고 한 채의 공양 집이 있다.

  삼층석탑은 귀신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시대의 미를 나타내는 빼어난 작품이다. 부도는 청도원 마을 입구의 논 가운데 있는데 전성기에는 이 부도가 있는 곳까지가 절의 경내였음을 알 수 있다.

  귀신사 석수는 독특한 양식으로 앉아 있는 석수의 등 위 중간에 남근 같은 석주가 당당하게 꽂혀 있다. 불교사상과 남근 숭배 사상이 어우러진 특이한 형태의 석조물로서 터를 누르기 위하여 세웠다는 설과 백제 왕실이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세웠다는 설이 있다.

 

 

동곡약방,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 (증산교 성지)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590

 

  동곡마을은 금산사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증산교의 성지로 동곡(銅谷)이란 지명은 예전에 도예지가 있던 까닭에 ‘그릇골’이라 불리다가 ‘구릿골’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구리 ‘동(銅)’자와 골 ‘곡(谷)’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곡약방은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이 신도의 집에다 차린 약국이다. 1903년 당시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 김형렬의 집에 머물던 그는 1908년 동곡마을에 살던 김준상 아내의 발에 난 종기를 치료한 후, 김준상의 방 한 칸을 빌려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09년 6월 24일 강증산이 세상을 떠난 후 여러 차례 집주인이 바뀌면서 제대로 관리되지 않다가, 2003년 대순진리회에서 동곡약방과 인근 부지를 매입하여 종교 성지로 복원하였다.

  현재는 대순진리회 입도식을 한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다. 동곡약방 뒤 대나무 숲에 있는 나무들은 강증산이 심은 것들이라 전한다. 대순진리회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동곡약방



  인근에 있는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은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로 증산도 교주 강일순(姜一淳) 부부의 무덤을 봉안하면서 형성된 성지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묘각인 영대는 2층의 목조 건물로 강일순 부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삼청전 내부는 통층이며 증산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이외에도 교당 안에는 태평전, 숭도묘, 전하전, 경춘대, 대령전 등 웅장한 건물이 즐비하다.

 

▲ 김제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


금평저수지(동곡마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063-540-3374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와 청도리에 걸쳐 있는 금평저수지는 1961년에 축조되었으며 모악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산 정상에 어미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어 이름이 붙여진 모악산은 전주와 완주, 김제 시민 등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산이다. 이곳에서 흘러든 물들이 모여 호남평야의 젖줄 구실을 하는 여러 개의 저수지가 있다. 금평저수지는 주변에 오염원이 적어 수질이 깨끗하고, 겨울철 우리나라를 찾는 철새 도래지로도 유명하다.

  전주 시내에서 불과 30여 분, 김제 시내에서 20여 분 거리에 위치해 봄이면 저수지 주변으로 벚꽃이, 가을이면 단풍나무가 곱게 물들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하기 위하여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저수지 일대에 수변문화 체험 숲, 가로수 터널을 조성하여 특별한 운치를 자아내고 있어서 산책과 드라이브 코스로도 주목받고 있다.

 
수류성당 (천주교 성당)

김제시 금산면 수류로 643 (화율리 223), 063-544-5652 



  1889년 5월 배재성당으로 설립되었고, 1895년 성당이 금구 배재에서 수류(현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로 이전됨과 동시에 수류성당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에는 성당이 금산면 원평리로 이전되었다가 1966년에 수류로 복귀하였다. 성당 주보는 「성모성탄」이다.

  1909년에는 남학교인 인명학교(현 화율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고, 1918년에는 여학교도 개교하였으나, 이 학교는 재정 문제로 1928년 폐교되었다. 수류성당의 신자 수는 일제강점기 말까지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9월 24일 성당이 전소되고 50여 명의 신자들이 인민군에게 피살되면서 수류 신앙 공동체는 한동안 김제성당의 공소가 되었다.

  이후 1960년 성당을 면소재지인 금산면 원평리로 이전하면서 ‘원평성당’이 되었다. 그럼에도 수류 신자들은 성당 이전 직전인 1959년에 현재의 붉은 벽돌의 성당과 옛 사제관 · 수녀원을 자력으로 완공하였으며, 1966년 4월에는 성당이 다시 수류로 복귀하면서 ‘수류성당’이 되었다. 이후 1980년에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1999년에는 청소년 야영장을 건립했으며,  2010년에는 야영장 내에 숙박 시설 산촌체험관을 건립하였다.

  풍광이 아름다운 수류성당은 신부님과 스님이 지도하는 두메산골 어린이 축구팀의 이야기를 그린 ‘보리울의 여름’이라는 영화의 촬영소이기도 하여 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광객도 많이 찾고 있다.

 


김제 외갓집마을 (체험마을)

김제시 금구면 사방길 110-5, 063-547-0087 



  외갓집마을은 김제시에서 전주 방향으로 약 4Km 지점에 있으며, 호남고속도로와 1번 국도가 마을을 감싸 돌고 있는 사통발달의 교통요지로 마을 인근에 3곳의 인터체인지 (김제 IC, 서전주 IC, 남전주 IC)가 있다. 

  마을은 광활한 호남평야의 일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주민 대부분은 농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물은 대단위 시설 원예단지에서 재배되는 각종 야채, 친환경 농산물로 지정받은 배 과수원과 쌀 등이 있다.

  낙성농장에서는 한우, 염소 등의 가축을 사육하고 있으며 민간에서 건강보조식품으로 특별하게 취급하는 녹용의 생산을 위해 사슴을 사육함으로써 가정의 건강식품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은 우리나라의 곡창지대로 알려진 호남평야에 속해 있어 삼한 시대에 조성되었다는 벽골제를 비롯한 크고 작은 저수지가 곳곳에 있으며 지금까지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특히 대율저수지는 농업용수로 뿐 아니라 붕어와 메기 등 씨알 굵은 민물고기가 많아 현재까지 강태공들의 발길이 잦다.

  예부터 이 마을에선 충효의 정신이 남달라 마을 내에 선조들의 효부·효자 정문과 충신 정문이 마을 내 곳곳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강거사 장태수 선생을 들수 있다. 일제의 회유에 거부하고 경술국치에 단식으로 항거하며 순국한 장태수 선생은 정부에서도 인정하여 2000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고, 선생의 생가인 남강정사는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전시하고 있다.

 


벽골제 (사적)

김제시 부량면 벽골제로 442 (신용리), 063-540-4094, 4993



  벽골제는 백제시대 축조된 저수지 제방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김제 벽골제는 《삼국사기》에 기록으로 전하는데 백제 비류왕 때인 330년에 쌓았으며, 둘레가 1천 8백 보였다고 한다. 이후 원성왕 때인 790년에 제방을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들어서 대규모 증축이 이루어졌다.

  이후 1420년(세종2년)에 큰 폭우로 유실되어 지금은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 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현재, 둑의 북쪽에는 조선 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중수비)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당시 둑의 아랫부분 넓이가 70자, 윗부분은 30자이고 높이는 17자로 기록되어 있다.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벽골제를 두고 저수지가 아니라 바닷물을 막는 제방이라는 논쟁이 있다.

  벽골제 안에는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 농경사주제관 및체험관, 조정래문학관, 벽천미술관, 우도농악관, 단야각, 테마연못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현재 체류형 관광상품으로 전통가옥 숙박체험을 위한 한옥이 세 채 자리하고 있다.

  또 선비체험과 서당 체험이 가능하도록 준비된 명인학당과 전통찻집, 짚풀공방, 민속놀이 도구 공방, 전통한복, 지평선한우명품관 등이 다채로운 풍미와 다양한 체험학습의 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아울러 민속놀이 상설체험장이 연중 운영되고 있다.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은 벽골제의 역사적 의의 및 발굴 경과, 그리고 수리와 치수의 역사 및 농경 도구를 비롯한 농경문화와 오래된 고을 김제를 주제로 꾸몄다.

  벅물관은 3개의 상설 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설 전시실은 농경문화와 생활 민속·벽골제언을 주제로 구성되었다. 제1전시실은 농경의 기원부터 농경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5000년 농경사가 함축된 봄갈이·여름 김매기·가을 거두기·겨울 갈무리로 한 해 노동의 순환을 조명하였다.

  제2전시실은 농경의 물적 토대로부터 꽃핀 세시풍속과 일상의 삶, 그리고 소박한 민간신앙을 엿볼 수 있다. 제3전시실은 벽골제 발굴 현황 및 벽골제 전설, 1415년(태종 15) 벽골제 중수 시의 모의 구성을 통해 고대 수리 유적 벽골제를 보다 가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벽천미술관

김제시 부량면 벽골제로 442 (신용리 225-2)



  벽천미술관은 벽골제단지 내에 있는 미술관으로 한국 화단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나상목(羅相沐 ; 1924~1999)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미술관이다. 미술관 이름이기도 한 벽천(碧川)은 나상목의 호이다.

  나상목은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서 출생했다. 대각선적 포치법(布置法)으로 화면에 자연사물을 배치하고 간결하면서도 생명력 있는 선묘적(線描的) 해석으로 진경산수의 고요한 미를 표현하였다. 국전 초대작가이자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벽천미술관은 상설전시관으로 나상목의 산수화 및 병풍, 스케치 등이 전시된 제1전시실과 나상목의 제자들이 기증한 작품이 전시된 제2전시실, 그리고 나상목의 그림도구와 상패들이 전시된 로비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화, 목물 황해도장, 도자기, 소장품, 화구, 제자 기증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조정래아리랑문학관

김제시 부량면 용성1길 24 (용성리 226-23), 063-540-3934



  김제시 벽골제 부근에 자리한 조정래아리랑문학관은 2003년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배경 무대인 김제 만경의 문화사적 의미를 조명하기 위해 세워진 문학 전시관이다. <아리랑>은 1990년 한국일보 연재로 시작됐고, 1995년 8월 해방 50주년을 맞아 전 12권으로 출간됐다.

  3개의 전시실을 갖춘 이곳은 제1 전시실에서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제 내촌, 외리 사람들이 생존, 독립운동, 강제 인력수탈, 야합 등 선택과 대응을 통해 해외로 이주하는 고난의 대장정을 담은 시각 자료가 전시됐다. 또한 작가의 인사말이 영상물로 상영된다.

  제2 전시실은 작가 연보와 작품 연보, 사진으로 보는 작가의 인생, 취재시 사용한 일용품, 창작의 과정을 좇아 빼곡히 정리된 취재 수첩 및 자료 노트들이 전시돼 있다.

  제3 전시실에는 인간 조정래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이 진열돼 있다. 자화상 및 가족 사진, 신문기사, 앨범, 안경, 문진용 자연석, 조정래의 아버지인 시조시인 조종현의 시비(詩碑) 기념사진, 아내 김초혜 시인에게 선물한 펜화, 다양한 캐리커처들을 볼 수 있다.

 



아리랑문학마을 (소설 ‘태백산맥’ 테마마을)

김제시 죽산면 화초로 180 (홍산리 212), 0507-1360-2926



  아리랑문학마을은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아리랑 속 장소들을 재현한 곳으로 김제를 배경으로 민족의 수난과 투쟁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문학마을 안에는 홍보관, 하얼빈 역사, 이민자 가옥, 내촌 외리 마을, 근대 수탈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보관 1층 벽면에 12권짜리 대하소설 대강의 줄거리를 한눈에 볼 수 있고, 2층은 죽음도 불사하고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전진했던 김제 출신의 독립투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장면을 실감 나게 볼 수 있는 하얼빈 역사, 일제의 수탈에 고향을 떠나 타지로 갔던 사람들의 열악한 이민자 가옥, 근대 수탈 기관을 재현해낸 내촌이 재현되어 있다.

  외리 마을의 촌락과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의 땅을 빼앗는 데 활용되었을 망원경, 나침반, 카메라, 주판, 등사기 등이 전시된 죽산 면사무소, 주재소(일제강점기 순사가 근무하던 기관), 우체국, 정미소 등도 관람할 수 있다.

 

 

망해사 (사찰)

김제시 진봉면 심포10길 94 (씸포리 1004), 망해사 063-543-3187



  망해사는 김제에서 서북방 약 27km 지점에 있으며 심포 어항에 이르기 1km 전방에서 오른쪽 언덕바지 진봉산 능선 따라 올라가 고개 넘어 왼쪽으로 즉 큰길에서 약 500m 지점 정도를 내려가면 망해사가 나타난다.

  막다른 언덕 너머, 인적도 없는 곳에 망해사는 깎은 듯이 세워진 기암괴석 벼랑 위에 서 있다. 망해사에 서면 망망대해 서해바다 물결이 출렁이고 고군산열도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어 이름 그대로 망해사이다. 그러나 사찰 아래로는 새만금으로 흘러드는 지천의 물줄기기 끝없이 이어져 있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은 본시 섬이었다 하여 642년(백제 의자왕 2년)에 부설거사가 이곳에 사찰을 개창하여 수도하다가 입적하신 곳이라 하며 그 후 754년(경덕왕 13년)에 당나라의 중 중도법사(일명 통장화상)가 중창하였으나 조선조에 들어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그 뒤 인조대왕 때 만경 불거촌출신인 고명한 화상인 진묵대사가 재건 복구하여 크게 번창하였는데 그때가 망해사의 최강전성기였으며, 그 후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보광명전, 낙서전, 칠성각, 요사, 그리고 4개의 부도가 있다.

 



휘게팜 (이색식물원, 카페)

김제시 백학로 75-59 (백학동 1141), 0507-1331-9696

 

  휘게팜은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융복합사업 인증 사업자로 혼자 또는 가족, 친구와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편안하고 기분 좋게 소박한 행복을 즐길 수 있는 힐링농장이다. 휘게는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을 뜻하는 덴마크어이다.

  농촌의 활력을 느끼며 도시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예쁜 꽃과 식물들을 실컷 구경하고 맛있는 음료도 마실 수 있는 문화치유 체험농장이기도 하다. 혼자서, 가족과 함께 소박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며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식물들이 반겨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아열대 식물과 과일들을 만나볼 수 있어 김제의 제주도라 불린다.

  휘게팜에서는 벼, 유황쌀, 귀리, 블랙보리 등 다양한 농산물도 판매하고 직접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농산물과 여러 프로그램들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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