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덕수궁 중명전,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by 혜강(惠江) 2024. 9. 30.

 

 덕수궁 중명전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글·사진 남상학

 

 

 

  중명전은 긴박했던 구한말 역사의 현장이자 비극과 수난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정동극장이 있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명전이 있다. 건물의 명칭인 ‘중명(重眀)' 뜻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주역(周易)의 이괘(離卦)에서 따온 것이다.

 

 

  중명전이 있는 자리는 원래 선교사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나, 1987년 경운궁(현 덕수궁)의 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1899년 이 자리에 서양식 1층 건물을 짓고 당호를 수옥헌(漱玉軒)이라 하고, 주로 황실도서관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1901년(광무 5)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고, 이후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 사바틴(A.I.Sabatin)에 의해 오늘날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되었다. 1904년(광무 8) 경운궁 함녕전 온돌에서 발생한 화재가 경운궁 궁궐 전역으로 퍼지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이에 고종은 수옥헌을 편전으로 사용하며 이곳에서 정사를 돌보았다.

 

 

  특히 이곳 중명전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이 일본군에 둘러싸여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장소다. 울사늑약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원명은 한일협상 조약이며, 제2차 한일협약 · 을사 5조약 · 을사 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을 인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다. 미국의 헐버트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그곳에서 조약 반대운동을 벌이게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6년 6월 평화회의의 주창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가 극비리에 고종에게 제2회 만국평화회의의 초청장을 보내왔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임을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비밀리에 이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특사 일행은 미국·프랑스·중국· 독일·러시아 등 각국 대표들에게도 회의 참석에 협조를 구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하는 수없이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고, 그 전문을 『평화회의보』에 발표하였다. 특사들은 또 7월 9일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스테드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끝내 회의 참석이 거부되자 우분울읍하던 끝에 이준이 7월 14일 순국하게 되었다. 특사 일행은 만국평화회의가 끝난 뒤에도 구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제국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열강 간의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개최되었던 만국평화회의의 성격상 일제에게 외교권마저 유린당한 한국의 특사 일행이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처음부터 어려운 상황이었다.

  표면적으로 고종의 특사 파견은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한국 침략을 가속화시킨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세계 열강에게 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으며 일제의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최초로 알렸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7월 18일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를 서울로 불러들여 그와 함께 고종에게 특사 파견의 책임을 추궁,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켰다. 또한,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집회,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연이어 공포하였다. 31일에는 드디어 군대 해산령을 내려 대한제국을 무력화시켰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제는 덕수궁의 궁역을 축소하였고, 이에 따라 중명전은 덕수궁 궁역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중명전은 경성구락부에 인수되어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사용되었고, 1925년에는 조리실의 화재 사고로 내부의 원형이 크게 훼손된 뒤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주로 쓰이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으로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에게 중명전의 사용권과 소유권을 이양하였다. 하지만 영친왕이 사망한 이후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게 매각되었고, 이 과정에서 중명전은 점차 역사성을 상실하여 일반 건물로 전락했다.

  그러나,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에서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으로 덕수궁 궁역으로 재편입하였다. 이후 고증을 통해 2009년 대한제국 시기의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날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시관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주요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와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학부대신) 등 을사 5적을 포함한 대한제국 8대신이 참석한 회의장 모습이 실물 크기로 재현돼 있다. 또 고종이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파견한 헤이그 특사 관련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당시 일제가 협박했고, 대한제국의 재정이 악화된 건 사실이지만, 왜 관료들이 저항하지 않고 굴복했는지 기가 막힌다. 불의에는 물러서지 않고 정당히 맞서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곳이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 09:30~17:30,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 전화 : 02-751-0734

 

▲가는 길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