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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사육신묘·사육신역사공원, 충절의 표상 사육신을 기리는 실천 도량

by 혜강(惠江) 2024. 1. 6.

 

사육신묘 · 사육신역사공원

 

충절의 표상 사육신(死六臣)을 기리는 실천 도량

 

글·사진 남상학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1456년(세조 2) 목숨을 바친 6명의 신하 사육신의 묘가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한강 인도교와 노량진역 중간의 높은 언덕에 자리한 사육신묘는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사육신공원 입구 쪽 담벼락에 시 한 편이 적혀 있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함석헌 선생 <씨알의 소리> 중에서)

  사육신의 죽음이 의로운 죽음이었음을 일깨우는 글이다. 당대의 최고 윤리는 불사이군(不事二君), 즉 두 명의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육신은 숱한 고문(국문)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죽어가면서도 왕과 신의를 지켰다. 그들의 성스러운 죽음은 대를 이어 백성의 입에 전해졌다.

  이곳은 사육신이 처형당한 이후 오랫동안 ‘박씨지묘(朴氏之墓)’, ‘유씨지묘(兪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 이씨지묘(李氏之墓)’라 새긴 표석이 있는 묘 4개가 있어서 민간에서 이 묘소를 사육신묘라 일컬었다.

  ‘박씨지묘’는 박팽년, ‘유씨지묘’는 유응부, ‘성씨지묘’는 성삼문, ‘이씨지묘’는 이개의 묘로 추정해 민간에서만 인정됐으나 숙종 대에 들어 사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숙종은 1691년(숙종 17) 노량에서 열무(閱武, 역대 왕조에서 행해진 열병의식 및 군사훈련 검열제도) 하던 차에 관리에게 명하여 사육신묘를 단장케 하고, 사육신의 충성심을 기리는 뜻에서 이곳 산기슭에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다. 이후 1692년에 민절사(愍絶祠)라는 편액을 하사하였고, 1692(숙종 18) 서원으로 고치고 조선 후기 사육신을 배향한 대표적인 서원이 되었다. 이때 박팽년의 7대손인 좌익찬 숭고(崇古)가 육신 묘를 수축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사육신묘가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게 되었다.

 

 

사육신공원으로 조성

 

  이후 1978년 서울시는 이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널리 드러내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면서 사당인 의절사(義節祠)·불이문(不二門)·홍살문·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 사상의 실천 도량으로 성역화, 사육신 역사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역사적인 장소답게 입구에는 충절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여 엄숙한 느낌을 자아낸다. 나쁜 액운을 물리쳐준다는 홍살문을 통과하면 갈림길에 ‘사육신 사당’과 ‘조망명소’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오른쪽 사육신 사당으로 방향을 잡으면 두 명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이문이 나온다. ‘불이’의 사전적인 뜻은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것을 모두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평등한 진리를 나타내는 가르침’을 뜻하지만, 이곳의 불이문은 단종 외의 임금은 섬기지 않겠다는 불사이군의 뜻을 담고 있다.

 

 불이문 앞에는 사육신묘 표지판이 걸려 있다표지판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 성삼문(成三問, 1418~1456) :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이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문집에 성근보집(成謹普集)이 있다.

▶ 박팽년(朴彭年, 1417~1456) :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仁叟)이며,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그는 경술(經術)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 하위지(河緯地, 1412~1456) : 본관은 진주,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이며, 호는 단계(丹溪)·연풍(延風)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집현전 직전(直殿)에 등용되어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진설(陣設)≫의 교정과 ≪역대병요(歷代兵要)≫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 이개(李塏, 1417~1456) : 본관은 한산,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이고, 호는 백옥헌(白鈺軒),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758년(영조 2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 유성원(柳誠源, 미상~1456) : 본관은 문화,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낭간(琅玕)이며 시호는 충경(忠竟)이다. 1691년(숙종 17)에 와서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시켰고,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유응부(兪應孚, 미상~1456) : 본관은 기계, 자는 신지(伸之)·선장(善長)이며, 호는 벽량(碧梁),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무신으로 관직에 나아갔고, 첨지중추원사·평안도절제사를 지냈다.

▶ 김문기(金文起, 미상~1456) :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문무겸전하여 함길도 병마절제사와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를 지냈다.

  이들은 단종 3년(1455)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왕위를 빼앗고 단종을 몰아내자 이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이들은 대부분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학자들이다.

 

 

사육신 신도비

 

  불이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의절사가 보이는데 그 앞마당에 좌우로 신도비(神道碑)와 육각형의 사육신 비가 있다.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로서, 사육신 신도비는 정조 6년(1782년)에 사육신(死六臣)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사육신 신도비의 높이는 215㎝, 폭은 80㎝, 두께는 41㎝이다. 네모진 대석(臺石)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 위에 옥개석을 얹은 형태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신도비의 양식이다.

  사육신 신도비 좌측 상단에 ‘유명조선국육신묘비(有名朝鮮國六臣墓碑)’라 새겨져 있고 태학사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이 문장을 지은 사실과 당나라 안진경(顏眞卿)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사육신이 절개를 지키고 사형을 당하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도비는 본래 건립 당시에는 봉분 아래 큰길가에 세워져 있었으나, 1978년 사육신 묘역을 정비하면서 옮겨졌다. 이때 비각이 건립하였다.

 

 

육모 기둥의 사육신비

 

  신도비 맞은편에 있는 사육신비는 1954년 민절서원이 있던 자리에 서울시가 세웠다. 육각으로 된 사육신비의 각 면에는 정면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위쪽 각 면에 전서(篆書)로 사(死)·육(六)·신(臣)·지(之)·묘(墓)·비(碑)를 한 글자씩 새겼다.

  바로 아래 상단에는 육면에 돌아가면서 비문을 새기고, 중간에는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하단에는 그분들이 지은 시를 새겼다. 상단에 새겨진 비문은 다음과 같다.

「비문」

​“성삼문 박팽년 유성원 이개 하위지는 집현전학사로 유응부와 더불어 세종대왕의 높은 신망과 깊은 은총에 감명하며 장손 단종을 보위하라는 간곡하신 고명을 물은 후 세종 문종의 뒤를 이어 단종이 등극하시매 나히 아직 어리신지라 정성으로 임금을 돕고 섬기는 중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정승 황보인 김종서 정분을 죽이고 단종을 밀어내니 때는 단기 삼천칠백칠십팔 년 윤 유월 세조가 왕위에 오르매 사육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지극한 형벌과 무참한 죽임을 당하여 버린 듯이 여기 누워 그 충성과 절개 천추만세에 으뜸 되리니 이에 사육신을 추모하는 삼천만 동포의 마음 여기 모여 서울특별시 시민과 역대시장이 뜻한 바를 김태선 시장이 이루어 지성으로 이 비가 서다.”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의명(依命)

  김광섭(金珖燮)이 짓고 김충현(金忠顯)이 글을 썼다. 중·하단에는 손재형(孫在馨)이 쓴 육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가 각각 1면씩 새겨져 있다. 성삼문을 기리는 면에는 성삼문의 시조를 새겼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에 비분강개하여 사육신으로서 단종복위에 힘쓰고 있을 무렵에 단종에 대하여 끝까지 변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키겠다는 뜻을 우의적으로 읊은 작품이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낙형(烙刑·달군 인두로 살을 지짐)을 당한 뒤에 거열형(車裂刑·사지를 찢어 죽임)된 시신은 각지에 나누어졌다. 그의 남계(男系) 친족은 젖먹이까지 모두 죽여 멸문되었고, 여자들은 계유정난 공신들에게 종으로 주어졌다. 당시 출가해 살아남은 여식의 후손에 의해 외손봉사(外孫奉祀)되었다.

  박팽년을 기리는 면에 새긴 그의 시조 역시 단종에 대한 충절을 읊고 있다.

   "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 야광(夜光) 명월(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박팽년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버지 박중림(朴仲林)과 형제 인년(引年), 기년(耆年), 대년(大年), 영년(永年)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아들 헌(憲)과 순(詢)도 죽임을 당하였고, 분(苯)은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다. 여인들은 종으로 전락해 멸문되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 박순의 부인이 아기를 배고 있었다. 대구에 관비로 간 부인의 유복자로 태어나서 사육신 가운데 유일하게 손을 이었는데, 그가 순천 박씨 충정공파다.

  한편, 이개를 기리는 면에 새겨진 이개의 시에도 비분강개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방 안에 혓는 촛불 누구와 이별하였기에  / 겉으로 눈물 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 저 촛불 나와 같아서 속 타는 줄 모르도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이후, 단종과 이별하는 마음을 촛불에 감정 이입하여 쓴 작품이다. 겉으로는 눈물을 흘릴 뿐이지만 속은 타들어 간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충정심이 드러내고 있다.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

 

  사육신비를 둘러보고 의절사에 오른다. 의절사에는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김문기·성승 일곱 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기존에 알려진 6명 이외에 지난 1982년 사육신에 추가된 김문기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한 줄로 늘어선 위패 앞에 섰다.

  그들 죽음의 발단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부터 비롯된다. 1453년(계유년), 후에 세조로 즉위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올아내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사육신을 비롯한 17명은 정통성과 명분이 없는 수양대군에 항거하여 1456년 6월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했다. 거사일은 세조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명나라 사절단을 맞는 잔칫날이었다. 거사 동지였던 김질이 변심했다.

  이로 인해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충신은 일순간 ‘역적’으로 몰렸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한 지 7일 만에 이들은 처형됐다. 연좌제에 따라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도자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조선 역사상 단일사건으로 가장 큰 희생자를 낸 정치 사건이었다.

  입구에는 향로에서 향긋한 향이 피어오른다, 무소불위의 세조에게 대항했던 그들, 나이 어린 단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의 정신이 배어있다.

  나는 방명록에 “사육신의 충절를 기립니다”라고 적은 후 잠시 묵념을 올렸다. 이곳에선 매년 10월 9일 위패를 모시고 추모 제향을 올린다.

 

 

울창한 소나무로 둘러싸인 사육신묘

 

  의절사 옆문으로 나가면 바로 사육신묘로 오른다. 낮은 언덕에 서남향으로 자리 잡은 사육신묘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ㆍ박팽년ㆍ유응부ㆍ이개ㆍ유성원ㆍ성삼문ㆍ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원래의 묘역에는 박팽년 · 성삼문 · 유응부 ·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후에 하위지 · 유성원의 묘도 만들었다.

  이곳에 7개의 묘가 있는 이유는 이전까지는 남효온(南孝溫) 선생이 지은 <추강집>의 육신전(六臣傳)을 근거로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가 사육신으로 전해져 왔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등 17인이 반역을 꾀했으며, 주모자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순으로 6인 만이 기록되어 있다. 유응부가 빠지고 김문기가 기록된 것이다. 당시 김문기는 공조판서 겸 도진무로서 박팽년과 모의할 때 군 동원의 책임을 맡았다.

〈추강집〉과 〈조선왕조실록〉 사이의 내용이 달라 1977년 `사육신 논쟁'이 터지면서 유응부를 빼고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그 뒤 김문기를 현창(顯彰)하고 그의 가묘도 추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래의 사육신 구성은 변경되지 않았다.

 

 

사육신 역사관

 

  사육신역사관은 2011년 단종의 복위를 주장하다 처형당한 사육신의 충절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사육신 관련 전시실, 교육실, 영상관 등이 있어서, 그 동안 전시뿐만 아니라 시네마 상영, 역사·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대대적인 내부공사 중이어서 차후 방문한 뒤 내용을 보완할 예정이다.

 

 

사육신공원 전망대

 

  사육신공원에는 공원을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와 간단한 운동시설, 한강 및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갖추었다. 따라서 사육신 묘를 찾아온 참배객 외에 간단한 운동과 산책을 즐기러 온 주민도 많다. 특리 봄이면 벚꽃 등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진다.

  특히, 언덕 마루 벤치가 있는 공원 전망대에서는 한강철교방면의 전망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미세먼지 없는 날에는 북한산까지 볼 수 있어 이만한 ‘전망’도 없다. 특히 밤에 보는 야경은 근사하다. 세계불꽃 축제가 있는 날이면 인기가 절정에 이른다. 사육신공원은 오전 9시 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하며, 무료입장할 수 있다.

 

 

  사육신공원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나는 성삼문이 처형장으로 향하며 읊었다는 수형시(受刑詩)를 떠올려 보았다.

   "북을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는 지려 하는구나  /  저승길에는 주막 하나 없다는데 / 오늘 밤은 어느 집에서 묵어갈까"  (擊鼓催人命 回首日欲死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성삼문은 죽음 앞에서도 애써 당당했다. 의인은 그렇게 갔으나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다. 역사는 누가 뭐래도 의인(義人)의 손을 들어주니까 말이다.

 

 

◎상세정보

 

   ►주소 : 서울 동작구 노량진로 191 (노량진동 152-3) / 역사관 전화 : 070-7204-3258

운영 : 매일 09:00~18:00 (역사관은 일요일, 월요일 휴무, 겨울철 역사관 운영은 17:30까지)

가는 길 :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1번 출구, 9호선 노량진역 2번 출구 도보 5분, 9호선 노들역 1번 출구 도보 3분/ 일반버스 (노량진로에서 사육신묘역 하차) : 150, 152, 360, 361, 363, 500, 504, 605, 640, 751, 4511, 5011, 5516 등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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