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
백범 김구 선생이 흉탄에 시해된 장소
글·사진 남상학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옆에 있는 경교장 건물
1949년 6월 26일, 한 방의 총성과 함께 백범 김구(金九)가 안두희(安斗熙)가 쏜 흉탄을 맞고 서거했다. 그 장소가 바로 김구가 집무실로 사용하던 경고장이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 108-1번지, 강북 삼성병원 옆에 있다.
이 건물은 2001년 4월 6일 서울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6월 13일에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김구가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특히 임시정부의 공관으로 상당기간 활동본부 구실을 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운 민족주의 추구의 우국 정객들이 모여든 경교장은 한국독립당 활동이나 건국실천원 양성에 주안점을 둔 보루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곳 경교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구 휘하의 엄항섭(嚴恒燮) · 조완구(趙琬九) · 조소앙(趙素昻) · 조성환(曺成煥) 등이 정사를 주재하였다. 그리고 자주적 통일운동이 본격화되기까지 광복 후 이곳에 많은 인사들이 드나들었다.
▲경교장에 들어서면 백범 김구의 흉상이 반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건축면적 396.69㎡, 전체면적 945.45㎡(지하 1층, 지상 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1층 왼쪽에 있는 응접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 민족진영 인사들의 회의 장소
8·15 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김구 선생은 일본식 이름을 대신해 주변에 있는 경구교(京口橋)의 이름을 따 경교장이라고 불렀다.
1949년 6월 26일 정오를 조금 넘긴 12시 45분 네 발의 총성이 경교장 2층 김구의 집무실에서 울렸다. 백범의 나이 74세, 총을 쏜 사람은 안두희로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거쳐 서북청년회에서 활동한 우익 인물이다. 일요일이었다. 정동 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방안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참이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던 민족의 지도자가 결국 이념의 희생물이 되었다. 김구는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 26일 서거할 때까지 경교장을 사용하였다.
단아한 2층 양관(洋館)으로 근대 건축가인 김세연(金世演)이 설계하여 1938년에 완공하였다.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다. 1층의 좌우 창을 원형으로 돌출시켰고, 그 상부를 의장의 중심체로 하였다. 현관 2층 부에는 6개의 붙임 원주를 사용하여 5개의 들임 아치 창을 냈다. 1930년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구 선생이 시해되던 날, 총탄에 의해 뚫린 창문 자국과 피묻은 옷
이후 완전독립과 통일지향의 역사적인 영광과 시련이 교차된 경교장은 주인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타이완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67년 삼성 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어왔다. 이후 서울시에서 소유는 그대로 두되 전체 공간을 복원하기로 합의해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하여 2층의 백범 집무실은 2005년 기념실로 단장하여, 일반에게 개방하였다.
경교장 내부의 전시는 대한민국 정부가 모든 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강조했다.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 건국 시점이라는 진보 진영 일각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보수 진영에서는 1919년 건국설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임시정부는 국민 영토 정부 주권 요소를 갖추지 못했고, 건국은 1948년 정부 수립 때 이뤄졌다는 것이다.
건국절 논란의 기원은 임시정부 운영과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이승만과 김구의 대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수 진영은 이승만이 국부라 하고 진보 진영은 김구가 국부라 한다. 해방 정국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에서 시작된 질기고 질긴 국론 분열의 역사가 지금 우리 사회를 ‘우파면 친일, 좌파는 반일’이라는 프레임으로 갈라놓고 있다. 경고장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소모적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왠지 씁쓸하고 답답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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