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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정치 활동 근거지

by 혜강(惠江) 2023. 11. 15.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정치 활동 근거지

 

글·사진 남상학

 

 

 

   종로에 나간 김에 오랜만에 운현궁(雲峴宮)에 들렀다. 서울 한복판(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에는 고즈넉한 옛 정취와 함께 늦가을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운현궁은 조선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의 사저(私邸)였으며,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출생하여 12세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잠저(潛邸)이다.

  ‘잠저’는 왕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집을 가리키는 말로, 이는 『주역』의 “잠룡(潛龍: 덕을 닦으며 숨어 사는 성인 혹은 영웅)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의 태조·중종·인조·선조·철종·고종 등 왕족이나 왕자가 아니었던 이들이 혁명·반정·추대 등의 방법으로 왕이 되었거나, 세조·효종·영조 등 당초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왕자로서 궁궐에서 나가 살다가 뒤에 왕이 되어 입궐한 자들의 즉위 전 사저를 지칭하였다.

 

 

►사저에서 궁으로 승격

 

  운현궁은 본래 사저였다. 제25대 임금인 철종이 후계자 없이 죽음을 맞이하자 대왕대비 조 씨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여 왕위를 이었다. 그가 바로 고종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하응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되고, 흥선군의 부인 민 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졌고, 이때부터 그의 본궁이 되어 운현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즉 ‘운현’이란 서운관의 약칭이다. 고종이 즉위한 뒤 운현궁으로 부르게 된 것은 왕의 잠저시의 거처를 본궁이라고 하는 선례와 ‘운현’이라는 지명에 유래한 것이다.

 

 

►당시의 운현궁의 규모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이었다.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한옥이었던 운현궁도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점점 규모가 커졌다.

  1864년 노안당(老安堂)과 노락당(老樂堂)을 짓고, 1969년에는 이로당(二老堂)과 영로당(永老堂)을 세웠다.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 경근문(敬覲門)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恭覲門)을 두고, 1912년에는 양관(洋館)을 세워 손님을 맞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10년 동안 대원군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운현궁은 그 위용이 자못 왕궁과도 같았다.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역, 일본문화원, 중앙문화센터. 운현초등학교 일대까지 포함된 넓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 큰아들인 이재면을 거쳐 손저ㅏ 이준용에게 상속되었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상당 부분이 헐리면서 집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

  지금은 유실되었으나, 운현궁 이로당 뒤편으로 있었던 양관은 3층짜리 흰색 건물이었다. 1911년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이 지은 르네상스 양식의 저택인데, 전통 한옥 안에 서양식 저택을 지어 함께 썼다는 것이 흥미롭다.

  또, 당시의 영로당도 원래 운현궁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개인 소유가 되어 김승현 가옥(서울특별시 민속자료, 1977년 지정)으로 남아 있다. 문도 정문, 후문, 경근문, 공근문 등 사대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운현궁 건물

 

  1996년 운현궁이 중수되면서 현재는 면적 9,413㎡의 대지를 동서로 크게 양분하여, 동편에는 사랑채인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과 별당채인 이로당이 남아 있고, 서편은 빈 마당으로 남겨 도로와 접하고 있어 마치 소박한 한옥마을처럼 보인다. 1977년 서울특별시 사적 257호로 지정되었다.

 

 

수직사

 

  출입문을 들어서서 우측에 있는 건물은 수직사(守直舍)이다.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맡았던 이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지금 건물은 1998년 운현궁 복원공사 때 새로 지었다.

  흥선대원군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아들을 대신하여 권력이 커져 전치 전반에 걸쳐 관여하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운현궁으로 군졸을 파견하였다. 현재 수직사에는 화로와 가구, 호롱불이 전시되어 있고, 벽에는 군졸들이 입었던 의복이 전시되어 있다.

 

 

노안당

 

  멋스러운 한옥 앞에 거대한 느티나무 한그루가 거의 잎을 떨군 채 서 있다. 그 옆을 지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운현궁의 사랑채인 노안당이다. 노안당은 전체적으로 정(丁)자형의 건물로 대원군이 국정을 의논하던 곳이다. 대원군은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노안당 동쪽에 남쪽으로 돌출된 곳을 '영화루'라고 한다. 영화루는 대원군이 손님을 맞이하던 곳이란다. 10년간 정치하는 동안, 모든 정치적 사안을 경복궁이 아닌, 운현궁의 사랑채에서 논의하고 결정했다고 한다. 뜰 앞으로 늘어진 노송이 당시의 세도를 짐작게 한다.

  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사라진 경복궁 건물들을 중건하고, 서원을 철폐하고, 서양의 세력을 막으려고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 문명의 흡수가 늦어졌다. 천주교 사상이 왕실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천주교인들도 박해했다. 역사가들은 이런 일련의 일들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처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1873년 그의 실정을 비판하는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로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운현궁의 권위 역시 실추되었다. 또한, 임오군란, 갑오개혁 등으로 하야와 재집권을 반복하였고,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이곳에서 중국 청(淸)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운현궁은 대원군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정치적 부침을 거듭한 영욕의 세월을 함께했다.

 

 

노락당

 

  중문으로 들어서면 운현궁의 안채인 노락당이다.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되었다.

  특히 1866년 3월 고종과 명성 황후 민 씨가 가례(嘉禮)를 치른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가례란 왕의 성혼(成婚)이나 즉위, 또는 왕세자·왕세손·황태자·황세손의 성혼 및 책봉 의식을 일컫는 말이다.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다. 복도 각을 통해 뒤 별채인 이로당까지 이어져 있다.

 

 

 

이로당(二老堂)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던 곳이다.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 안 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된다.

  고종과 명성 황후의 가례 이후, 그들이 운현궁을 방문할 때, 노락당을 사용하였다. 노락당이 안채에서 별궁으로 역할이 바뀌자 새로운 안채가 필요해짐으로써 1869년(고종 6년) 새로이 이로당을 지었다.

  이로당은 여자들이 거주하면서 살림하던 곳이므로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되었다. 마당이 막혀 있고, 건물이 ‘ㅁ’자 형태로 되어 있다. 높은 툇마루 때문에 마치 정자처럼 느껴진다.

 

 

 

유물전시관

 

  이로당을 둘러보고 옆문으로 나오면 넓은 마당(뜰)이다. 바로 우측(북쪽)으로 유물전시관이 있다.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전시를 통해 운현궁의 가치와 조선 말기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전시공간이다.

  운현궁의 모형, 왕과 왕비가 가례를 올릴 때 착용한 예복, 운현궁의 각종 생활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척화비, 당백전 등 대원군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유물과 외세 침략에 대응하는 모습들도 볼 수 있다. 이곳의 유물은 모두 복제품이고, 실제의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전시되어 있다.

 

 

쉼터

  서쪽 도로 쪽으로 관람하는 이들이 잠시 쉴 수 있는 쉼터가 있다. 이곳에는 고종의 즉위로부터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연대별로 보여주는 패널이 설치되어 있다.

  개항 전후 격변하는 국내외의 상황에 대처하면서 왕권을 지키려는 몸부림과 함께 국권을 잃어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소설가 김동인이 쓴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을 생각했다. 김동인(金東仁)은 이 역사소설에서 구한말의 복잡한 내외 정세를 배경으로 흥선대원군의 일대기를 그렸다. 대원군이 권좌에 오르기까지의 역사적인 변동과 그에 적응해 가는 그의 수난이 담겨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 안동김씨 세도기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좌근(金左根) 일파의 세도 밑에서 수모를 당하며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지만, 한편으로는 조대비와 은밀히 접촉을 계속하여 철종 승하 후 끝내 아들을 등극시킨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도 운현궁의 ‘봄’이 되었다.

 

 

  그는 왕통이 아니면서 왕통을 이어 주고, 제왕이 아니면서 제왕의 권력을 누렸다. 시대는 달라도 정권을 향한 야욕과 정파 간에 벌어지는 모략과 음모, 치열한 싸움은 어제나 오늘이나 매한가지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오늘도 운현궁에서 가까운 세종로 일대에서 데모대의 함성이 확성기 소리에 섞여 들려온다. 자기편은 무조건 옳고 정의롭지만, 반대편은 옳지 못한 악의 세력이라고 규탄한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암담하다, 언제, 이곳에 <진정한 봄>은 올 것인가?

 

◎관람 정보

 

 

►주소 :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64(운니동 114-10) /전화 : 02-766-9090

►관람 : 4~10월 09:00~19:00 (입장 마감 18:30), 11~3월 09:00~18:00 (입장 마감 17:30) / 휴무 :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이면 정상운영)

►입장료 : 없음

►교통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 5호선 종로3가역 5번 출구 이용

►기타 : 주차 불가/ 예약 불가/ 음식물 반입 금지/ 반려동물 동반 불가/ 휠체어접근 가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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