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한글비근린공원의 한글 고비(옛 비석), 이곳에 16세기 한글로 기록된 묘비(墓碑)가 있다고?

by 혜강(惠江) 2023. 11. 11.

 

한글비근린공원의 한글 고비(옛 비석)

 

이곳에 16세기 한글로 기록된 묘비(墓碑)가 있다고?

 

글·사진 남상학

 

 

▲한글비근린공원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한글과 관련하여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서울 노원구에 한글비 근린공원이 있다고 하여 단숨에 달려갔다. 공원이름에 ‘한글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한글비근린공원은 서울 노원구 하계동 288-2에 있다. 중계역 3번 출구로 나가 서라벌고등학교 쪽으로 10분 남짓 올라가면 서라벌고등학교 못미처 닿게 된다.

  한글비근린공원은 그리 넓지 않으나 조경 시설이 인근의 학교나 아파트와 잘 어우러져 있어 공원에 들어설 때부터 친근하게 다가온다. 언제라도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잘 다듬어진 잔디밭, 길게 늘어진 산책로, 그 누구와도 같이 앉아 얘기할 수 있는 벤치 등이 마련되어 있어 산책하거나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 공원에는 특별한 비석이 있다. 한글로 쓴 옛날 비석인 한글 고비(古碑)가 그것이다. 이 고비는 노원구청에서 이 공원을 조성할 때, 하계동 산12번지에 있는 조선 시대의 유일한 한글고비와 똑같은 모양의 비를 만들어 세운 것이다. 그리고 공원의 이름을 ‘한글비근린공원’이라고 정한 것이다. 남다른 한글 사랑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1446년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하신 이후 조선시대를 통틀어 만들어진 한글 고비는 모두 5개(한개는 일본에) 로 알려져 있다. 여러 해 전, 문경새재에서 본 '산불됴심'도 그 하나일 것이다.

 

▲한글비근린공원에 있는 한글 고비의 복제품, 앞면(위)과 뒷면(아래)

 

한글 고비 제작 경위와 이전(移轉)에 얽힌 이야기

 

  본래 이 비석은 조선 중기의 문신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승문원(외교문서 담당 관청) 부정자를 지낸 부친인 이윤탁(李允濯)의 묘를 모친인 고령(高靈) 신씨(申氏)의 묘와 합장하면서 조선 중종 31년 (1536)에 묘 앞에 세운 한글 묘비이다. 묘소는 하계동 산 12-2에 있다.

  당시 선비였던 이윤탁과 고령 신(申)씨 사이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문건 공은 집안이 연산군 때 일어난 기묘사화에 휘말려 몰락하면서 평생을 학문에만 정진했다. 이문건의 아버지 이윤탁은 이문건이 7세 때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묘는 지금의 태릉(泰陵)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훗날 그 부지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능역으로 수용되자, 1536년 정월 모친 신씨가 운명하자 하계동 산12번지,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면서 부친을 합장하면서 이런 일이 다시 없길 바라는 염원에서 사람들의 훼손을 막기 위해 경고문이 담긴 내용의 비석을 세웠다.

  이 묘비를 만들게 된 경위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일상생활을 꼼꼼히 기록한, 이문건의 『묵재일기(黙齋日記)』 중 1535년 11월 1일부터 1537년 6월 3일까지의 기록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하계동 산 12-2에 있 는  이윤탁(李允濯)의 묘와 영비각, 영비, 해설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비석은 높이 142㎝, 폭 63㎝, 두께 18㎝ 규모다. 이 비석에 담긴 경고문 때문에 묘비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1992년 중계동과 하계동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비석이 있는 자리에 큰길을 내기로 했다. 그러나 경고문 때문에 인부들이 겁을 먹고 손을 대지 않으려 했다.

  결국, 비석을 그대로 두고 길을 내면서 왕복 6차로가 비석 앞에서 갑자기 2차로로 줄어드는 기형적인 구조가 됐고, 그 바람에 교통사고가 잇따르자 1998년 비석과 묘소를 15m 뒤로 옮겼다. 이때도 인부들이 손대길 꺼려 어렵게 공사를 진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문건의 본관인 성주 이씨 문중에서 예를 갖춰 제사를 지낸 후에 비석을 옮기고 도로를 개발했다는 후문이 있다.

 

▲한글비근린공원의 묘비와 안내문

 

한글고비의 가치

 

  묘비의의 이름을 ‘영비(靈碑)’라 적고, 앞면과 뒷면에 각각 묘주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다른 비석처럼 모두 한문으로 새겨져 있고, 양쪽 모서리에 한문과 한글로 경계문을 적었다.

묘비의 오른쪽에는 한자로 ‘불인갈(不忍碣, 건드릴 수 없는 묘비)’이라고 새긴 큰 글자 밑에 두 줄로 글이 새겨져 있다.

  “爲父母立此誰無父母何忍毁之石不忍犯則墓不忍凌明矣萬世之下可知免夫 (위부모입차 수무부모 하인훼지 석불인범 칙묘불인능 명의 만세지하가지 면부)”

  이는 “부모를 위하여 이것을 세우는 것이니, 누구인들 부모가 없겠으며 어찌 차마 이것을 훼손시키겠는가. 비석을 차마 범하지 못한다면 묘도 차마 능멸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만세의 후인들은 이를 알아야 하니 힘쓸지어다.”라는 뜻이다. 섬뜩한 경계문(警戒文)이다.

 

▲묘비 오른쪽 옆면에 ‘불인갈(不忍碣 )'로 시작한 한문 글귀

 

  한편, 묘비의 왼쪽에도 한자 정자로 ‘영비(靈碑)’라고 쓴 큰 글자 밑에도 비슷한 내용의 경고문이 두 줄로 적혀 있다.

    영비(靈碑)

   "녕ᄒᆞᆫ 비라 거운 사ᄅᆞᄆᆞᆫ ᄌᆡ화ᄅᆞᆯ 니브리라 / 이ᄂᆞᆫ 글모ᄅᆞᄂᆞᆫ 사ᄅᆞᆷᄃᆞ려 알위노라”

  쉽게 풀어보면, 이 글은 “신령한 비석이므로 훼손하는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 이를 글(한자) 모르는 사람을 위해 알리노라.”라는 뜻으로 뜨끔한 내용이다.

  이 한글 고비는 비석의 이름인 ‘영비(靈碑)’를 제외하고는 국한 혼용이 아닌 순 국문으로 씌어있다. 이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 해례본」(1446)과 「용비어천가」(1447)와 같은 문체임을 보여 준다. 16세기 전반기에 순수 국문으로만 쓴 한글 고비라는 점에서 당시의 국어생활사와 한글 서체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묘비 왼쪽 옆면에 한글로 기록한 경계문구

 

  1446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했지만, 당시 양반사대부들은 한글을 천대시하여 거부했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 한글로 비석을 새기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런데 16세기 초엽에 일부라도 한글로 비석에 남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현재 3점이 불암산 기슭에 남아 있는데, 한글 영비를 제외한 나머지 2점은 모두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이처럼 한글 영비는 한글로 쓴 최초의 비문이라는 의미 외에도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건립 내력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는 점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 이윤탁 한글 영비는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고, 문화재청의 심의를 거쳐 보물 1524호로 승격됐다. 조선 전기의 유일한 한글 비석으로 중세 국어와 서체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 점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에 서울시와 노원구는 ‘한글 사랑과 효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글 비석과 같은 크기의 묘비를 공원에 세우고, 공원 이름을 ‘한글비근린공원으로 정했으며, 그 앞의 도로명을 '한글비석로(碑石路)'로 명명했다.

 

▲한글비근린공원의 자음조형물이 공원의 성격을 알려준다.

 

  한국인의 우리 글자 사랑은 우리 스스로가 생각해도 상당히 유별나다. 이것은 단순한 민족주의 감정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글 한글은 과학적·실용적인 면을 고려하여 창조된 합리적인 글자인 것을 세계 언어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이런 글자에 대한 자부심으로 민족 전체가 힘을 합쳐 지켜낸 게 바로 우리글·우리말이기 때문이다.

  묘비를 둘러보고 나온 시간이 마침 하교 시간이어선지, 중계동 은행사거리에서 서라벌고등학교 방향으로 넓은 도로가 셔틀버스 및 승용차들로 꽤 혼잡했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