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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문화일반

‘훈민정음’을 통해 본, 세종(世宗)이 꿈꾼 새로운 세상

by 혜강(惠江) 2022. 12. 21.

 

국립한글박물관

 

‘훈민정음’을 통해 본, 세종(世宗)이 꿈꾼 새로운 세상

 

글·사진 남상학

 

 

 

  국립한글박물관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9 (이촌동)에 있다. 2017년 첫 방문 이후 두 번째 방문이다. 2014년 한글날 개관한 이후 8년 만에 전시실을 전면 개편했다고 하여 재방문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1443년 세종대왕이 만들었다. 공식적인 이름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었는데, 그 후 '정음', '언문', '반절' 등으로 불렸으며, 19세기 말에 '국문'이라고 불리다가 1910년대부터 '한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세종이 1443년 창제한 훈민정음은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서문이 잘 알려졌다. 세종이 지은 이 문구는 한문으로만 작성된 해례본을 일부 번역한 언해본에 나온다.

 

 

  이어 1446년에는 새 문자를 만든 목적과 원리를 밝힌 책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훈민정음』의 서문(머리말)에는 ‘나랏말싸미 중국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새’라고 시작한다. 세종이 쓴 훈민정음 머리글의 첫 문장은 새 글자를 만든 배경과 새 글자로 세종이 꿈꾼 세상이 담겨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국립한글박물관 상설전시실은 한글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서문을 바탕으로, “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을 주제로 세종이 ‘훈민정음’을 통해 꿈꾼 새로운 세상이 설계돼 있다.

 

 

  상설전시실은 세종이 쓴 글귀를 통시적으로 재해석해 7개의 공간으로 꾸몄다. 즉,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1부)’ ‘내 이를 딱하게 여겨(2부)’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3부)’ ‘쉽게 익혀(4부)’ ‘사람마다(5부)’ ‘날로 씀에(6부)’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7부)’ 등 총 7개의 공간으로 구성했다. 전시실 전체가 하나의 ‘훈민정음’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전시에서는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문자 자료부터 현대의 한글 자료까지 191건 1104점의 한글문화 관련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한글박물관이 소장한 다양한 문화재급 소장 자료와 관내·외에서 새롭게 발견된 한글 자료들을 선보인다.

 

 

  유가사지론(13∼14세기), 선종영가집언해(1495년), 간이벽온방언해(1578년), 곤전어필(1794년), 말모이 원고(1910년대) 등의 보물 자료를 비롯해 무예제보언해(171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훈맹정음(1926년, 국가등록문화재), 송기주타자기(1934년, 국가등록문화재)와 2021년 6월 서울 인사동에서 출토된 15세기 한글금속활자 중 330여 점이 그것이다.

 

  벽면과 바닥 면을 동시에 활용한 실감 영상ㆍ인터렉티브북ㆍ투명디스플레이 영상 등 다양한 ICT 미디어를 사용해 전시 내용을 직관적으로 전달하고, 양질의 전시 관람 경험을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다면 세종이 설계한 천년의 문자 계획이 담긴 『훈민정음』을 따라 한글의 역사와 한글로 이룩된 한글문화를 전시를 통해 느껴 볼 차례다. 먼저,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정인지 서문을 바탕으로 만든 대형 영상이 흐른다. 현대인이 편리하게 사용하는 한글이 자연에서 나는 소리를 어떻게 전하는지 보여준다.

 

 

1부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세종(世宗, 1397~1450)의 시대, 우리말은 중국말과 너무나 달랐다. 그런데도 우리말을 적을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글자인 한자를 빌려 쓰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다른 많은 나라와 민족도 상황은 비슷했다.

 

  우리나라는 ‘이두(吏讀)’ ‘구결(口訣)’ ‘향찰(鄕札)’ 등의 방식으로 한자를 응용해 우리말을 적기도 했으나, 이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퍽 어렵고 불편했다. 한자를 배운 일부 계층을 제외한 많은 사람은 여전히 글자를 읽고 쓸 수 없는 시절을 보내야 했다.

 

 

2부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세종은 글자를 몰라 자기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글자를 아는 것이 곧 권력이었던 시절, 누구보다 큰 권력을 가졌던 왕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쉬운 글자를 만든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이처럼 백성을 깊이 사랑하는 애민(愛民)정신과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글자가 필요하다는 자주(自主)정신, 실생활에 쓰임이 있어야 한다는 실용(實用)정신을 바탕으로 창제된 것이다.

 

 

3부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정인지가 쓴 별도의 서문이 있다. 그는 "천지자연의 말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다."라며 "사방의 풍토가 다르니 소리의 기운 또한 그에 따라 차이가 난다."라고 짚었다. 우리나라 말과 중국어가 다르니 한자 대신 별도의 글자를 만들어 써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런 이유로 1443년 세종이 새로 만든 ‘훈민정음’은 자음 글자 17개, 모음 글자 11개를 합한 28개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 어떤 백성이라도 누구나 쉽게 배워서 편히 쓸 수 있도록 만든 한글은, 그 창제 목적에 맞게 모양이 매우 단순하고 글자의 수가 적었다.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뜬 5개의 기본 자음 글자(ㄱ, ㄴ, ㅁ, ㅅ, ㅇ)는 소리의 세기에 따라 획을 함으로써 17개의 글자로 확장했다. 그리고 하늘·땅·사람의 모양을 본뜬 3개의 기본 모음 ( ·, ㅡ, ㅣ) 글자는 각 글자를 서로 합성함으로써 11개의 글자가 탄생했다.

 

  세종이 만든 쉽고 간편한 스물여덟 개의 글자는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임금이 백성들에게 내리는 배려와 소통의 문자였다.

 

 

4부 

 

“쉽게 익혀”

 

  세종은 우리 백성들이 한글을 통해 삶에 필요한 학문과 지식을 쉽게 익힐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한글 창제 초기에는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불경을 한글로 펴냈다. 이후에는 주로 유교 경전을 번역해 한글로 옮김으로써 조선의 통치 이념을 널리 알렸다.

 

  그런 세종의 뜻이 이어져 16세기 말 임진왜란 이후로는 구황, 질병, 무예 등의 실용 지식과 제도‧법률에 대한 정보를 한글로 보급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가나 기관 차원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인쇄본들이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한글은 지식의 보급과 공유의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아 갔다.

 

 

5부 

 “사람마다”

 

  세종은 모든 사람이 한글을 통해 신분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여성만 사용했다는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실제로 한글은 왕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한 글자였다. 왕족들이 서로 한글 편지를 주고받은 자료들과 양반 여성이 한글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한 문서들이 여럿 남아 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생활용품에 물건의 수량이나 주인의 이름을 한글로 적기도 하고, 삶의 희로애락과 지혜를 담은 각종 문학서와 실용서들이 한글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개인의 일상생활 곳곳에 한글이 스며들면서, 한글은 모든 백성이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소통 도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6부

 

“날로 씀에”

 

  세종이 1443년에 만든 한글은 450여 년이 흐른 1894년에야 공식적인 나라의 글이 됐다. 국가나 공공 기관에서 공적으로 작성한 문서에서는 여전히 한문이 먼저였던 문자 생활에서 한글이 새롭게 주목된 것이다.

 

  한글이 비로소 국문(國文)으로 불리게 된 기쁨도 잠시,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김에 따라 한글도 국문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쓰고 있는 한글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 민족의 정체성은 그 말과 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당대 지식인들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글에 대한 연구·정책·교육·문학 활동 등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낼 수 있었다.

 

 

7부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세종은 한글이 보다 나은 문자 생활을 가능케 하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좀 더 나은 삶과 문화를 누리는 세상을 바랐다. 『훈민정음』 머리말의 마지막에 쓴 문장처럼 말이다.

 

  1945년 광복 이후로도 정확한 한글 소통을 위해 각종 표기법 정책들이 만들어졌고, 한글을 보다 편하고 경제적으로 쓰기 위해 모아쓰기/풀어쓰기, 가로쓰기/세로쓰기 등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다. 또 다양한 서체 연구를 통해 보기 편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한글 서체들이 개발되기도 했다.

 

 

  이처럼 사용자에게 편안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한글은 오늘날 문화 창조와 소통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누구에게나 편한 문자로 거듭난 한글은 세종의 바람대로 늦깎이 학생은 물론이고 신체적인 장애와 다른 언어 배경을 가진 사람까지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문자가 되었다.

 

  한글은 탄생 기록을 가진 유일한 문자이며, 제자 원리가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문자이다. 그런가 하면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음소문자이며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된 문자라는 점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런 자랑스러운 문자를 소유한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우리글을 아끼고 사랑하며 갈고 닦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상세정보

 

►주소 :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9 (용산동6가 168-6)

►전화 : 02-2124-6200

►관람 : 10:00~18 : 00 (토요일 21:00까지)

►휴무 : 1월 1일, 설 당일, 추석 당일, 법정 공휴일(한글날 제외)

►가는 길

*지하철 4호선, 경의중앙선 이촌역 2번 출구 왼쪽 방향의 ‘박물관 나들길’ 이용, 우측 방향으로 400m 직진 / 이촌역 2번 출구 용산가족공원 방면으로 430m 직진하여 국립한글박물관 출입구 이용

*버스는 간선 400번, 간선 502번 타고‘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 정류장에서 하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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