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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영인문학관 : '편지글 2022', '작가의 방-박범신', '박경란 그림전, '이어령의 서재'

by 혜강(惠江) 2022. 10. 8.

 

영인문학관 둘러보기

 

문인·예술가 의 《편지글 2022》·작가의 방-박범신》

《박경란 그림전》·《이어령의 서재》

 

 

글·사진 남상학

 

 

 

 

 

  문학을 사랑하는 네 친구(시반사우 : 江·山·岩·浦) 가 대학시절 우상처럼 보였던 이어령의 자취를 느껴보기 위해 영인문학관을 찾았다.

 

  2022년 2월, 우리 곁을 떠난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의 숨결이 깃든 영인문학관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다.  영인문학관은 이어령 선생의 부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강인숙 선생이 2001년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설립한 문학박물관이다. 이어령의 '령(영)' 자와 강인숙의 '인'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어령과 강인숙 부부는 1969년에 설립한 '이어령 한국근대문학연구소'를 시발점으로 하여, 1972년 이어령 교수가 문학종합지 『문학사상』을 창간할 당시부터 다양한 한국문학 관련 자료를 수집,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95년 문학관 건립을 위한 396㎡의 공간을 마련하고, 1998년 이어령 교수가 퇴임하면서 받은 퇴직금과 3년간의 월급을 더하여 기금을 만들고, 그 기금을 종잣돈으로 문학관을 설립했다.

 

  영인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과 세미나실, 야외 정원,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영인문학관의 소장 자료 중 문인초상화와 육필원고는 1972년 이어령 교수가 『문학사상』을 창간, 주간을 맡으면서부터 1985년 그만둘 때까지 이 잡지에 실었던 104점의 문인초상화와 게재된 원고 등이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영인문학관에는 문인초상화 120여 점, 육필원고 800여 점, 문인 서화 및 도자기 자료 150여 점, 문학 작품 삽화의 원화 300점 등 25,000여 점을 소장하고, 그중 일부를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다.

 

  영인문학관은 연 2~3회 기획전을 열고 있다. 문단 전체가 참여하는 파노라믹한 전시와 한 작가나 잡지를 심층적으로 조명하는 심층 탐색형 전시를 병행하여 한국근대문학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조명한다.

 

  현재 영인문학관에서는 2020년 9월 23일부터 10월 28일까지 기획전으로 문인·예술가의 편지전 《편지글 2022》과 함께 융합전시로 《작가의 방-박범신》, 《박경란 그림전》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영인문학관 건물 및 현판

 

▲영인문학관 입구

 

▲로비

 

▲로비에서 바라본 야외정원

 

▲야외정원에서 바라본 전망

 

▲세미나실

 

▲사무실

 

● 문인·예술가의  "편지글 2022"

 

  현재 영인문학관에서는 2020년 9월 23일부터 10월 28일까지 기획전 문인·예술가 편지《편지글 2022》라는 주제로 법정 스님을 포함하여 문인들이 이어령 선생에게 보낸 다수의 편지 등 총 3분의 2 정도가 새로 공개되고 있다. 또, 여러 문인과 예술가가 주고받은 편지와 메모 등 100여 점을 공개하고 있다.

 

 

 

 

  법정 스님은 1970년 8월 소설가 김채원(76)에게 원고지 6장 분량의 자필 편지를 보냈다. 법정 스님은 평소에 여러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요즘은 난초를 볼 때마다 '종연생(從緣生) 종연멸(從緣滅)'이라 뇌이곤 합니다. 인연으로 좇아 왔다가 인연 따라 간다는 말로써 스스로 달래고 있소.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임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오.“

 

  2년 가까이 돌보던 난초가 시들자 물을 주고 분갈이도 해보지만, 상태가 여전히 좋지 않자 난초와 헤어질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하며 "마음이 좀 그렇다"고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후 1975년에도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전남 순천 송광사 뒷산 불일암에 은거하면서 1976년 11월 프랑스에 가 있는 김채원에게 또 편지를 썼다.

 

  스님은 "겨울철에 땔감을 준비하고 도장 손질하느라고 손결이 많이 거칠어졌소. 한보름 지나면 김장을 할 것이오. 산에서 혼자 사니 홀가분해서 좋은데 일이 많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소"라며 근황을 전하면서 "채원이 아니면 아무도 못 쓸 그런 글을 쓰시오. 만 사람한테 한 번 읽힐 글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몇 번이고 읽힐 그런 글을 쓰시오”라며 김채원에게  당부를 전한다.

 

 

▲법정 스님이 소설가 김채원에게 보낸 두 개의 편지

 

  문인들이 이어령 선생에게 보낸 편지는 김남조, 김승옥, 김용직, 김은국, 서정주, 송수권, 이근배, 이남덕, 이상범, 최인호, 루이제린저 등 수없이 많다.

 

  최인호 소설가가 이어령 선생에게 보낸 편지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최 작가는 "선생님이 제가 사는 시대에 계신다는 것은 제겐 큰 용기요, 기쁨입니다. 선생님의 앞서간 발자국은 제게 좋은 교훈이 되곤 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일찍 죽지 말기로 해요"라고 썼다. 최 작가는 2013년, 이어령 선생은 2022년 별세했다.

 

  박경리 소설가는 1987년 12월 7일 손자 원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 년만 견디면 토지는 끝날 것 같고 할머니도 해방이 될 것 같다. 매일매일 너희들 생각을 한다"라고 썼다. 대하소설 '토지'는 1994년 완결된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이용악 시인의 월북 전 육필을 볼 수 있는 편지, 황금찬 시인이 1976년 시집 <민들레의 영토> 출간을 축하하면서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 소설가 권지예가 여고생이 된 후 중학교 시절 짝사랑한 선생님에게 보냈지만 주소가 잘못된 탓인지 반송된 편지 등도 전시되었다.

 

 

▲김남조 시인이 이어령 선생에게(위), 서정주 시인이 이어령 선생에게(가운데), 이근배 시인이 이어령 교수에게 보낸 편지

 

▲독일작가 루이제인저가 이어령 교수에게 보내온 편지와 봉투

 

  또,  마종기 시인과 김영태 시인이 미국과 서울에서 주고받은 편지, 판화가 이성자와 후배 화가 조문자가 서로 응원하고 격려한 편지도 만날 수 있다.

 

  철학자 레비스트로스가 강 관장에게 1981년 보낸 편지,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사망하기 두 달 전 일간지 파리특파원 시절 김성우에게 1980년 보낸 편지도 의미가 깊다.

 

 

▲레비스트로스가 강인숙 관장에게(위), 쟝 폴 싸르트르가 김성우에게 보낸 편지(아래)

 

  편지는 한 사람이 1인칭으로 쓰는 내면의 풍경화다. 그래서 단 한 사람의 특별한 독자를 위해 쓴 문인들의 편지는 하나하나가 보배롭기 그지없다.

 

  또한, 문인들의 편지다 보니 한 편의 문학 작품 같기도 하다. 생활고를 털어놓는 등 사연이 모두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만, 고통 속에서도 단 한 사람의 독자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려 가져온 빛나는 문장이 그 고통마저 아름답게 한다.

 

작가의 방 - 박범신

 

 《작가의 방》은 말 그대로 박범신 소설가의 방을 전시관에 꾸며 놓은 것이다. 작은 책장에는 그의 저서가 있고, 탁자 위에는 원고지와 필기도구, 안경, 탁상달력과 시계, 핸드폰 등이 놓여 있다. 그리고, 방 한 쪽에는 키타도 있다. 그리고 벽에는 그의 글(어록)이 적힌 액자들을 걸어놓았다.

 

  소설가 박범신(朴範信, 1946~ )은 충남 논산 출신으로 전주 교대,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殘骸)〉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어 〈식구〉,〈말뚝과 굴렁쇠〉,〈못과 망치〉 등의 단편과 《죽음보다 깊은 밤》, 《깨소금과 옥떨메》, 《풀잎처럼 눕다》,《불의 나라》 등의 장편을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했다. 김승희‧정호승 등과 함께 ‘73그루프’를 조직하여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78년 첫 창작집 《토끼와 잠수함》을 낸 이래, 《아침에 날린 풍선》, 《죽음보다 깊은 잠》, 《밤이면 내리는 비》, 《덫》, 《미지의 흰 새》, 《숲은 잠들지 않는다》, 《돌아눕는 혼》,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겨울강, 하늬바람》, 《불꽃놀이》, 《숲은 잠들지 않는다》, 《흰소가 끄는 수레》, 《침묵의 집》 《외등》, 《더러운 책생》, 《빈 방》, 《나마스테》, 《촐라체》, 《고산자》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였다.

 

  박범신은 한 때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20여 년 간 전업 작가로 활동하면서 세 권의 쉴새없이 작품을 써내느라 상상력이 소진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1980년 5월 광주 사건을 겪으며 참담한 무력감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한 일간지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던 처지에서 「연재 소설 중단의 변(辯)」을 내놓았는데 그의 ‘절필’은 하나의 사건이 되기도 했다. 

 

  "남다른 문학에의 열정과 소외된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로 무장되어 있던 삼십대는 그 칼날 같은 긴장감을 그래도 견딜 만했다. 어느 때는 아주 행복한 상태로 견뎠다. 베스트셀러는 내 목표가 아니었다. 나는 다만 고독해서 쓰고 쓸 뿐이라고 생각했다. 쓰는 것만이 나를 지탱하고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버팀목이었고, 아아, 그 시절 문학만이 나의 유일한 사랑이었다. 나는 문제작도 썼고 베스트셀러도 썼다. 상상력은 아주 원기 왕성해서 원고지 앞에만 앉으면 수많은 비유의 말들이 나비떼처럼 날아다녔다. 나는 나의 포충망을 들고 그것을 붙잡아 원고지 네모칸 속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마흔아홉 살이었고, 상상력의 우물은 말라 있었다. 눈을 들어 보면, 수많은 형형 색색의 나비들은 간 곳 없고 그 대신, 회색빛 하늘만 무위하게 가로놓여 있는 날이 많았다.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박범신, 「그해 내린 눈 지금 어디에」, 『흰소가 끄는 수레』(창작과비평사, 1997)

 

  3년 남짓의 절필 끝에 작가는 『문학동네』 1996년 가을호에 중편 소설 「흰소가 끄는 수레」를 내놓으며 문단 복귀를 선언한다. “문학이 과연 무엇이고 어디에 바쳐져야 하는가.” 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는 감성적 묘사 위주의 시적인 문체로 현대인의 욕망과 좌절, 배타적 인간성, 물질만능의 속물근성, 기회주의 등 다양한 인간 세상의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낭만적으로, 또는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명지대학교 교수, KBS 한국방송공사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상명대학교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1981년 「겨울강, 하늬바람」으로 대한민국 문학상(신인부문)을 수상하였으며, 원광문학상(1998), 김동리문학상(2001), 만해문학상(2003)을 받았다.

 

 

 

▲박범신 '작가의 방' 모습과 그의 작품집

 

박경란 그림전 “하늘을 굽다”

 

  한편, 화가 《박경란-그림전》은 ‘하늘을 굽다’란 주제로 전시작을 선보이고 있다. 박경란 작가는 “하늘이 곧 우주인데 우리가 하늘에서 보는 별은 사실 흙”이라며, 하늘 자체를 구워 봐야지 생각하고 작품을 만들고 ‘하늘을 굽다’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창작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물감과 캔버스를 뛰어넘어 입체의 영역으로까지 아름다움 또는 생명성을 추구해 왔다. 도예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는 “우주선이 저 하늘 별이 흙인 것을 밝히기 위해 지구로부터 떠났듯이 이렇게 나는 하늘을 흙으로 구웠다. 이런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물은 하늘과 땅을 구분 없이 하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하나이듯 말이다.”라고 말한다.

 

  박경란(朴京蘭, 1949~ )은 성신여대 서양화과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을 나왔으며, 10여 차례 이상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이번 영인문학관에서 <박경란-그림전>을 열기에 이르렀다. 그의 남편은 요절했지만, 도전과 응전의 굵은 흔적을 남긴 대가 박길웅(朴吉雄, 1940~1977) 화가이다.

 

  박경란은 1976년 결혼했지만, 이듬해 혼인신고도 못 한 채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보낸 후 3주 동안 혼인신고, 딸 아이 출생신고, 사망신고를 했으며, 그 후 치열하게 살면서 예술혼을 불태웠다.

 

  미망인 박경란은 남편이 남긴 유작 중 대작 80점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고, 박경란의 순애보 <아직도 내 사랑 끝나지 않았네>(평민사, 1984)로 널리 알려졌으며, 딸 승리는 첫돌 후 아버지와 이별했지만, 미국 시카고 미술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 중이다.

 

 

▲"하늘을 굽다"라는 주제로 전시된 박경란의 작품들

 

▲전시장에서 만난 박경란 작가(왼쪽)와 본인

 

▲박경란 화가가 시어머니에게 띄우는 편지

 

  이들 전시 외에도 전시 기간에는 9월 24일 열린 정한아 소설가의 강연을 시작으로 나태주 시인(10월 1일), 박범신 소설가(10월 15일), 이해인 시인(10월 22일)의 강연도 이어진다. 전공 학생을 위한 전문 강의와 문학 애호가들을 위한 젊은 작가들의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이어령의 서재

 

“혜성처럼 살다 간 한국의 대표 지성(知性)”

 

 

  전시장 한쪽 작은 방에 ‘이어령의 서재’가 있어 들여다보았다. 작은 방 가운데 책상이 놓여 있다. 책상 위에는 필기도구 몇 점, 방바닥 위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한국어판과 일어판 몇 권이 놓여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초라하기 그지없다. 장소가 협소하여 그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는 처지일 것이다.  벽면에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가 쓴 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가 걸려 있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눈으로 읽어보고 마음으로 음미해 본다.  

 

 

   하나님

   나는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촛불 하나도 올린 적이 없으니

   날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사람은 별을 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별사탕이나 혹은 풍선 같은 것을 만들지만

   어둠 속에서는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바람개비를 만들 수는 있어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보셨는지요 하나님

   바람개비를 든 채 잠들어버린

   유원지의 아이를 말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들을 놓아

   헤엄치게 하실 때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저 은빛 날개를 펴고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작은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발톱처럼 무디어진 가슴을 찢어야 하고

   코피처럼 진한 후회와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데

   하! 하나님은 어떻게 그 많은 별들을

   축복으로 만드실 수 있었는지요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지금 이렇게 엎드려 기도하는 까닭은

   별을 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만들지도 다 셀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세요 하나님

   원컨대 아주 작고 작은 모래알만한 별 하나만이라도

   만들 수 있는 그 힘을 주소서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감히 어떻게 하늘의 별을 만들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저 이 가슴 속 깜깜한 하늘에

   반딧불만한 작은 별 하나라도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신다면

   내 가난한 말들을 모두 당신의 제단에 바치겠나이다

   향기로운 초원에서 기른 순수한 새끼양 같은

   나의 기도를 바치겠나이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이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 손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도 풍금소리를 울리게 하는

   한 줄의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이 시는 이어령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2016, 열림원)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이어령 교수는 지성과 이성의 힘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교회로 대변되는 기독교, 하나님은 별다른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냉용을 읽고나면 신앙인과 조금도 다름없는 '믿음'의 고백이다. 

 

 

 

 

  그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딸(이민아 목사)이 암에 걸렸다. 그것도 세 차례나. 딸이 아플 때 그는 혈육의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못 했다. 딸은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통해 위로받고 암이 나았다. 머릿속 지식 혹은 지성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고 느꼈다. 신을 찾는 발걸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후, 딸이 시한부 6개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깨달았다. 딸은 죽음 너머를 보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는 건 죽음보다 더 강한 신념 같은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대 전환이었다.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주관하신다고 믿었다.

 

  맞은편 벽에는 이근배 예술원 회장이었던 이근배 시인이 고(故) 이어령 교수 영전에 바친 “한 시대의 새벽을 깨운 빛의 붓, 그 생각과 말씀 천상에서 밝히소서”라는 헌시(獻詩)가 걸려 있다. 그가 없는 방 안에서 허전한 마음으로 ‘헌시’를 차근차근 읽어보며 그의 위대한 삶과 문학적 자취을 되짚어본다. 

 

   이 땅의 흰옷의 백성들

   독립 만세 산천을 흔들던 삼월입니다

   남녘에서는 동백이며 매화 다투어

   꽃소식이 올라오는 이 나라의 봄입니다

   이어령 선생님

   백천 번은 아니라도 새 생명이 신명으로 일어서는

   열 번쯤의 봄이라도 더 기다리시라 했는데

   어찌 이리 황망하게 떠나시는 것입니까

   머리와 가슴 손끝에까지

   산처럼 쌓이고 바다처럼 넘치는

   생각과 말씀 그 첫 줄도 다 못 적으시고

   어찌 붓을 놓으시는 것입니까

   선생님은 처음 이 땅에 오실 때부터

   훈민정음의 나라, 금속활자의 나라

   팔만대장경의 나라, 고려청자, 조선백자의 나라의

   정신문화 예술창조에 뜻을 입히고

   생각을 깎고 다듬어서 인류 역사 위에

   드높이 올려세우라는 소명을 받고 오셨습니다

   돌잡이로 책을 잡고

   여섯 살에 몽당연필로 동화를 써

   이미 “천재”의 이름을 얻으셨다지요

   어린 날부터 읽은 세계 문학을 바탕으로

   대학에서는 난해하다는 이상의 시를 쉽게 풀어내시고

   달팽이껍데기 같은 한국문학의 낡은 권위에 도전

   스물세 살에 쓴 “우상의 파괴”는

   케케묵은 천장을 깨트리는 폭발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번뜩이는 감성, 꿈틀거리는 레토릭은

   시와 소설과 평론과 에세이에서

   모국어의 새 패러다임을 세우는 혁명이었고

   개벽이었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이었습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저 60년대 비로소 문학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게 되었었지요

   강단에서의 명강의와 신지식에 목마른 이들에게

   명연설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우상으로 떠올랐습니다

   분단의 나라에서 냉전의 벽을 깨뜨리는

   서울올림픽의 한 마당을 가로지르는

   굴렁쇠 소년이 바로 선생님의 모습이었고

   새천년의 아침에 북소리로 띄운 해는

   이 나라 5천 년 역사의 눈부신 새 아침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땅의 한 시대의 어둠을 새벽으로 이끈

   선각이시며 실천가이셨습니다

   붓의 시대에서 오늘의 AI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의 혜안은 먼 미래를 앞서 내다보셨고

   새 이론의 창출은 어김없이 실용화되었습니다

   어찌 이루 선생의 사봉필해(詞鋒筆海)를 헤아리겠으며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저술의 한 줄이라도 읽겠습니까

   선생님은 대한민국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한예종을 비롯한 문화 대역사(大役事)를 이루셨으며

   20세기 한국의 뉴 르네상스를 떠받친

   메디치로 영원히 새겨질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님!

   선생님은 문단에 첫걸음 떼는 철부지 저를

   손잡아 주시고 거두어주셨습니다

   『이어령 전작 집』을 제게 맡겨 장정 편집, 출판에서

   올해 50주년 맞는 「문학사상」 창간을 돕는 일에서

   창조학교 멘토로, 예술원 회원으로, 회장으로

   오늘의 제가 있도록 키워 주셨습니다

   지난해는 편찮으신 몸으로

   저의 “해와 달이 부르는 벼루의

   용비어천가“ 전시에 오시어

   참으로 뜨거운 덕담도 해 주셨지요

   예순 해토록 선생님이 제게 주신

   그 가르침의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선생님이 계시어 너무 행복했습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로는

   안 되는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마지막 뵈온 것은

   임종하시기 이틀 전이었지요

   손을 잡은 저에게 겨우 “이근배 병풍” 하시며

   선생님의 병상 바로 앞에 펼쳐놓은

   글씨도 안 되는 제가 쓴 가리개를 가리키셨지요

   저는 북받치는 울음을 겨우 참고

   문밖에 나오고서야 터뜨렸습니다

   한국을 넘어 세계의 지성이요

   시대를 넘어선 만대의 스승이신

   이어령 선생님!

   선생님의 아호가 밤을 넘어선다. 뜻의

   능소(凌宵)라 하였지요

   계유생 닭띠여서 스스로 “새벽보다 먼저 오는

   빛의 목소리”를 닭 그림 위에 쓰셨지요

   부디 이제 하늘나라에 오르시어

   이 땅의 한 시대의 정신문화를 일깨운

   우주를 휘두르는 빛의 붓, 뇌성벽력의 그 생각과 말씀

   천상에서 더 밝게 영원토록 펼치옵소서.

 

 

 

 

  222년 2월 26일 암 투병 끝에 88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 3월 2일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다.

 

 

<이어령의 삶과 문학>

 

 

  여기서 그의 삶과 문학의 자취를 돌아본다. 이어령 교수는 1934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1952년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여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이었던 1955년 평론 「이상론(李箱論)」을 발표한 뒤, 이듬해인 1956년 『문학예술』에 「비유법론고(譬喩法論攷)」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어 스물셋 젊은 나이에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여 혜성처럼 등장하여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 글에서 김동리를 ‘미몽(迷夢)의 우상’으로, 모더니즘의 기수를 자처하던 조향을 ‘사기사의 우상’으로, 이무영을 ‘우매(愚昧)의 우상’으로 몰아세우며 우상화된 기성문단에 대한 도전을 선언했다. 

 

 

 

 

  나아가 그는 황순원 · 조연현 · 염상섭 · 서정주 등 당시에 문단을 주도하고 있던 대가들을 ‘현대의 신라인’들로 묶어 신랄하게 비판했다. 젊은 문학 지성의 눈에는 패배주의와 은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고루한 기성들의 문학은 공격의 대상 자체였다. 그의 논리는 서구적 수사학으로 단련된 새로운 감각의 한글 문체로 뒷받침된다. 그의 평론집 『저항의 문학』은 이런 정신적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 

 

  젊은 문학 평론가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와 「화전민 지역」 · 「분노의 미학」 · 「수인의 영가」 등은 우상을 깨부수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해머였다. 그 외에 평론 「해학의 미적 범주」, 「사회참가의 문학」, 「현대소설 60년」 등을 발표했다. 이들 평론으로 이어령은 당대 비평에 대한 비판적인 문학비평 활동을 통하여 새로운 감수성을 가진 비평가로 주목받았다. 심지어 한국의 문학평론은 그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문학’으로 격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어령은 당시 문단의 중진 작가였던 김동리와 작품의 실존성에 관한 논쟁을 벌였고, 초기 문학평론의 대가였던 조연현의 전통론을 반박하여 문단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김수영과는 ‘불온시’ 논쟁을 한바탕 벌였다.

 

  이어령은 문학 활동은 비평만이 아니었다. 소설 「마호가니의 계절」(1955), 「장군의 수염」(1966), 「의상과 나신」(1978~1979) 등을 발표함으로써 소설가의 입지를 굳히기도 하였다.

 

  이어령은 탁월한 비평적 시선과 문재를 인정받아 26세의 나이로 『서울신문』 논설위원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여러 신문에 논설과 칼럼을 썼다. 1967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어 30여 년 강단에서 국문학과 교수로 재임했다.

 

  1973년 문학종합지 『문학사상』을 창간하여 주간을 맡아 문예지의 혁신을 일으켜 『현대문학』과 함께 대표적인 문학전문 월간잡지로 발전시켰다. 1977년 『문학사상』에서는 그해 발표된 중단편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이상문학상'을 제정, 이후 유수의 문학상으로 자리 잡았다.

 

  1988년 개최된 서울올림픽 개막식 식전행사의 기획을 주도하면서 '화합과 전진'의 주제를 바탕으로 '굴렁쇠 소년' 등 참신한 프로그램을 제안하여 호평을 받았다. 거대한 스타디움에 등장해 햇빛이 쏟아지는 초록색 잔디밭 위로 하얀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간 8살 소년은 단순한 소년이 아니라 수난의 역사에도 언제나 역경을 극복해낸 한국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1990년에는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예술인 양성을 위한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어 발전을 위한 국립국어연구원을 설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많은 베스트셀러를 생산한 에세이스트였다.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비롯하여 『바람이 불어오는 곳』,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 젊음을』, 『신한국인』,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중 『경향신문』에 연재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흙의 순서를 뒤집어 '저'를 덧붙인 제목만으로도 신선하다는 평을 얻었고, 이를 통해 '언어의 마술사'로도 불리기도 했다. 하찮은 단서에서 우리 문화와 의식의 실체를 찾아낸 그의 천부적인 관찰력이 돋보이는 글로서, 입체적이며 지성적인 한국론이다.

 

  또, 1982년 일본에서 1년 동안 머물며 연구 생활을 한 뒤 일본 문화를 일본어로 비판한 『축소지향의 일본인』(「縮み」志向の日本人)을 비롯 이어령의 책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였고, 지금까지도 번역 출판되고 있다. 특히 2005년 4월 출간된 <장켐 문명론>(신조사)은 <축소지향의 일본인> 이후 문명 융합에 대한 해박한 경륜을 담아 한 중 일 삼국의 미래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았다.

 

  평론집으로 『저항의 문학』, 『전후문학의 새 물결』, 『한국 작가전기연구』 외에 2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소설집으로 『환각의 다리』, 『둥지 속의 날개』, 『무익조(無翼鳥)』 등이 있다.

 

 

 

 

  1979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2001년 서울시 문화상, 2003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화를 재정의하는 작업과 함께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시대의 비평가로 주된 역할을 담당했다.

 

  이야기꾼을 자처한 그의 강연은 엄청난 독서량과 날카로운 현실 분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강연할 때 동서고금의 철학자나 문인들의 주옥같은 명구를 남다른 응용력과 상상력으로 걸러 엮어낸 다음 현실의 맥락과 의미를 꿰뚫는다. 글보다 말로 뭇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어령은 한 시대를 풍미한 비평가였다.

 

  박식과 달관으로 시대를 깨우는 삶을 살다가 그는 2022년 2월 26일 암 투병 끝에 작고했다. 어린 시절 의협심과 반항 의식이 강했던 이어령은 꼬장꼬장한 성격에 이성(理性)과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나. 만년에는 내세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생을 마감했다.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과 작별합니다”,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는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이었으며, 새로운 비평과 글쓰기로 한국 문화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거인이었다. 평생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한 석학으로 국립국어연구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하는 등 큰 업적을 이뤘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문학을 상기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이어령 교수는 세상을 떠났다. 이제 영인문학관은 이어령의 문학의 업적을 돌아보며 그의 향취를 느끼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시적 안목으로 한국 문학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사업은 앞으로 우리 몫이다. 우리 문화계가 앞장서야 한다.

 

  기존의 영인문학관은 장소가 협소하고, 접근성도 좋지 않다. 그가 이룬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널리 선양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기념관이 반드시 필요하다. 문화계가 한마음이 되어 지자체나 정부의 협조 아래 그의 문학적 향기를 드러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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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한 강산암포 시반 사우(詩伴 四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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