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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경복궁, 조선의 으뜸 궁궐

by 혜강(惠江) 2022. 9. 27.

 

경복궁, 조선의 으뜸 궁궐

 

 

글·사진 남상학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된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법궁이란 왕이 거처하는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을 가리킨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대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다.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경복(景福)’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져 270여 년간 복구되지 못하다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당시 경복궁에는 왕과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외전과 궐내 객사들, 왕과 왕비 및 궁인들의 생활을 위한 전각들, 휴식을 위한 정원 등 500여 동의 건물이 조성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고,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구실로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의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맛보는 것은 즐거움 그 자체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른 주말 오후라 나들이객이 몹시 많아 사진에 담기 힘들었으나 우리의 격조 높은 옛 궁궐을 즐기는 모습에 마음은 흐뭇했다.

 

 

 

1. 궁성(宮城)과 문

 

궁성(宮城)

 

  궁성은 궁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장을 이른다. 경복궁의 궁성은 1398년(태조7)에 동쪽, 남쪽, 서쪽이 조성되었으며, 이때 궁성 문인 건춘문, 광화문, 영추문도 세워졌다. 이보다 뒤에 북쪽 담장이 완성되고 북문인 신무문도 갖추어졌다. 궁성은 거의 네모난 형태를 이루고 있고 전면 좌우 끝에는 각루(角樓)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다.

 

  경복궁의 궁성은 임진왜란으로 궁궐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에도 일반 백성들로부터 궁궐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종 때 경복궁 중건 시 궁성이 새 단장을 하게 되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앞부분이 헐려 나가고 또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다. 현재의 궁성은 그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쌓은 것이고, 일부는 본래 위치보다 안으로 들여 쌓은 상태이다.

 

 

 

 

정문 광화문(光化門)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 앞은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고 복잡했다. 광화문 앞에서 올려다보니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의 정문답게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장대하게 보였다. 더구나 복식을 갖춰 입은 수문장들이 버티고 서서 관광객을 맞이했다.

 

  광화문은 문루를 받치는 기단 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 데 사용하였다.

 

  광화문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엉뚱하게도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동아일보 사회부장 설의식(薛義植)은 ‘헐려 짓는 광화문’에서팔도 강산의 석재와 목재와 인재의 정수를 뽑아 지은 광화문아! 돌덩이 하나 옮기기에 억만 방울의 피가 흐르고, 기왓장 한 개 덮기에 억만 줄기의 눈물이 흘렀던 우리의 광화문아! 청태 끼인 돌 틈에 이 흔적이 남아있고 풍우 맞은 기둥에 그 자취가 어렸다 하면, 너는 옛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중략)‧…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하는 망치 소리는 장안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하는 백의민족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동아일보, 1926) 라고 서러움을 전했다.

 

  그 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어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또한, 광화문 홍예 개판에는 ‘사령(四靈)’인 기린, 봉황, 거북이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1968년 광화문 복원 때 그려진 것을 현황 모사한 것이다.

 

 

 

동문 건춘문(建春門)

 

  건춘문은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된다.’라는 뜻이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있는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현재의 문은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된 것이다.

 

 

 

서문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은 ‘가을을 맞이한다.’라는 뜻이 있다. 건춘문과 대비되는 개념의 이름으로 서쪽 방위의 개념에 맞게 지어졌다. 이 문은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으로 특히 서쪽 궐내 각사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현재의 문은 1975년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된 것이다.

 

 

 

북문 신무문(神武門)

 

  신무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북쪽 궁성이 마련되고 나서 세워진 것이다.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성종 6년(1475)이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영조 때에는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경복궁 터를 길로 삼았는데, 이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같으며 현재의 문은 경복궁 중건 시 건립된 것이다.

 

 

 

 

궁성의 각루, 동십자각(東十字閣)

 

  동십자각은 궁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 있는 각루(角樓)이다. 궁성 담장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 한가운데 서 있게 되었다. 동십자각은 서십자각과 함께 궁성 전면 양 모서리에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세운 것인데, 서십자각은 일제 강점기에 헐려버렸다.

 

 

 

 

2. 흥례문(興禮門) 영역

 

  흥례문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御溝)가 있고,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어구는 경복궁뿐만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에도 있다.

 

  어구와 영제교는 근정전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 시에 신하들이 도열할 위치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했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2품 이상이 서고, 남쪽으로는 정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

 

  흥례문 행각의 서북쪽에는 서쪽 궐내 각사와 빈청으로 출입하는 유화문(維和門)이 자리하고 있다. 흥례문 영역에서는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 반포 등이 이루어졌으므로 궐내 각사와 빈청의 관원들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유화문이 한 것이다.

 

 

 

3.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영역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다. 근정(勤政)은 정치를 부지런히 한다는 뜻이다. 중심 건물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둥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 기둥에도 4신상과 12지신상을 간결하지만 재치있게 조각해 놓았다. 월대에는 정면 중앙에 답도를 두어 봉황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는 작은 계석을 놓고 계석의 우석으로 해태를 조각했다.

 

  정전의 안쪽은 바닥에 전돌을 깔고, 2층까지 높게 트이도록 하였으며, 북쪽 가운데에 임금님의 어좌를 설치하였다. 어좌 뒤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놓았고 천장에는 칠조룡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전면에는 중요행사를 치를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마당에는 박석(얇고 네모나게 다듬은 얇은 돌)이 깔려 있는데, 표면을 약간 거칠게 마무리하여 단조롭지 않고 빛이 반사되어도 눈이 부시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마당에서는 노인들을 격려하는 기로연(耆老宴)이나 과거시험도 치러졌다.

 

  남쪽 행각의 가운데에는 3간으로 구성된 근정문이 있으며 그 좌우에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동쪽 행각에는 융문루(隆文樓)가, 서쪽 행각에는 융무루(隆武樓)가 있다. 이 누각은 정전 밖으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왕과 왕세자, 궐내 각사의 신료들이 보던 책을 보관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근정전에서는 왕과 문무백관이 조하(朝賀, 조회의식)를 거행하고, 또는 즉위식 등 공식적인 대례(大禮)가 거행되었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정전의 입구인 근정문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참(朝參) 행사를 했다.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하여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즉, 근정문은 단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4.정사와 강론을 펼친 편전(便殿) -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 수정전

 

  편전은 왕이 신하들과 일상으로 정사를 논의하던 곳이다. 편전은 정사와 강론뿐만 아니라 종친, 대신들과 함께 주연을 즐기고,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한 곳이다.

 

  경복궁의 편전 영역은 사정전(思政殿)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정전 영역으로 통하는 사정문과 침전영역으로 통하는 향오문 사이에 사정전, 만춘전(萬春殿), 천추전(千秋殿)이 남향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행각이 감싸고 있다.

 

  사정문은 3간으로 되어 있다. 이 문 역시 가운데 칸은 왕이 드나들 때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은 좌우의 문을 이용하였다. 편전의 중심 건물인 사정전은 고종 4년(1867)에 중건한 건물로 어좌를 가운데 설치하였으며 벽에는 구름 속에 놀고 있는 용을 그려 걸었다.

 

  경회루 연지 남쪽에 자리한 수정전(修政殿)은 세종 때 집현전이 위치한 궐내 각사 지역에 고종 때 새로 지은 전각이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내각 본부인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다.

 

 

 

▲사정문과 사정전 내·외부

 

 

5. 침전영역, 강년전과 교태전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행각에 연이어 있는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침전은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내진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이다.

 

  지금의 강녕전은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강녕전의 공간구성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넓은 월대를 꾸민 것이 특징이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도 강녕전과 같은 공간구성을 띠고 있다. 다만 전면에 월대가 없는 것이 다르다. 또, 지붕 꼭대기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고 내부에는 종도리를 두 개 나란히 두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강녕전과 그 주변

 

▲교태전과 그 주변

 

6.  소주방(燒廚房)

 

  소주방은 경복궁에서 왕의 수라를 마련하던 궁궐의 부엌이다. 자선당 등 동궁 권역에 있는 것을 주로 일컫는 말이나, 강녕전과 교태전에 소속된 내외소주방과 비현각 동편의 장방 및 수소주방도 있었다.

 

  공상천에서 식사 재료를 올리면 사옹원에서 재료와 왕의 건강 상태를 일차적으로 점검하고, 사옹원 감독들이 이차적으로 식단과 반찬 개수를 결정하였다. 이후 소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면 외주방에서는 임금에게, 내주방에서는 임금과 왕비를 위하여 음식을 낸 것으로 본다.

 

  소주방은 한자 그대로 '불을 쓰는 방'이라는 뜻이다. 수라간과는 다르게 쓰이는데, 소주방에서 음식을 조리한다면 수라간에서는 음식을 기획하고 밥상에 올려보낸다. 소주방은 외소주방, 내소주방, 생과방으로 나뉜다.

 

 

 

7. 자경전(慈慶殿) 영역 - 자경전, 복안당, 청연루, 협경당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전(慈慶殿)의 ‘자경(慈慶)’은 “자친(어머니)이 복을 누린다.”라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44간의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온돌방으로 꾸며진 복안당과 자경전, 동남쪽의 청연루로 구성되어 있고, 청연루의 동측으로 협경당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 남쪽으로 행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여자들이 여닫기 쉽게 가벼운 당판문으로 된 만세문(萬歲門)이 있다.

 

  자경전 뒤편에는 십장생과 박쥐문, 당초문을 새긴 굴뚝을 세워 볼거리를 만들었다. 또 서쪽 담은 주황색 벽돌로 축조하여 내벽에는 만수문, 격자문, 육각문, 오얏꽃 등을 정교하게 새겨 넣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 있는 모양벽돌로 꾸며 격조를 높였다.

 

 

▲자경전과 십장생 굴뚝

 

 

  또 굴뚝으로는 아미산 굴뚝이 있다. 아미산은 교태전 일곽 뒤뜰에 경화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산(假山)이다. 아미산에는 두벌대의 장대석 석축이 네 층으로 쌓였고, 그 위에 괴상하게 생긴 돌을 담은 석분(石盆)과 물을 담는 돌그릇(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수석 1기는 1단에, 석분·석지는 1단·2단·3단에 있고, 굴뚝은 3단에 있다. 굴뚝 3기는 3단에 나란히 있고, 나머지 한 기는 동쪽 조금 뒤편에 있으며, 주위에는 화초들이 심어져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아미산 굴뚝

 

8. 동궁 영역 - 자선당, 비현각,. 세자시강원, 세자익위사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나,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되었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이 세자시절 단종을 낳기도 하였으며, 고종 때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다.

 

 

 

 

9. 경회루(慶會樓)

 

  ‘경회(慶會)’는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을 가진 누각으로 외국 사신 또는 군신 간의 연회 등 경사스러운 모임을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침전인 강녕전 서쪽 연못 안에 조성되었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여러 왕을 거치면서 다시 고쳐 지었고, 돌기둥에 용과 꽃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또,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에 중건된 것으로, 연못 주변에 담장이 둘러싸고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북쪽과 동쪽 담장만 복원하였다. 경회루로 가는 3개의 돌다리에는 벽사의 의미가 있는 동물상이 새겨진 엄지기둥을 놓았다. 연못 북쪽 기슭에 하향정이 있다.  

 

  4월~10월 중 개방하며, 관람요금은 추가 요금 없이 경복궁 입장권을 구매한 후 관람하면 된다. 단 하루 네 차례(10시, 11시, 14시, 16시), 매회 20명(내국인 15명, 외국인 5명)으로 제한하며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해야 한다.

 

 

 

▲경회루와 하향정

 

10. 향원지와 향원정

 

  향원정은 고종이 지은 2층의 육모 지붕을 얹은 정자이다.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취향교라 하였다.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라는 뜻으로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라고 이름을 붙였다.

 

취향교는 조선 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 진원 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11. 별당으로 지어진 집옥재(集玉齋) 등

 

  경복궁의 제일 북쪽 신무문(神武門) 안 동쪽에 있는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이 3채의 건물은 애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 것이다.

 

  집옥재는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5간, 측면 3간의 단층 맞배집이며 다포(多包)집이다. 집옥재(集玉齋)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米連)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아다,

 

  이 3채의 건물은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로써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고종은 이 건물들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 사신 접견장으로 사용하였다. 1893년 한 해에 영국, 일본, 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들을 다섯 차례 접견하였다.

 

 

 

12.  건청궁(乾淸宮), 왕과 왕비의 휴식처

 

  건청궁은 경복궁이 중건되고 5년이 지나서 고종 10년(1873년)에 와서 지어진 건물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 한적한 곳에 있다.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건물은 민간 사대부 집의 형태를 따르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더 했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坤寧閤),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서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성을 하였다.

 

  담장에는 벽돌을 이용해서 아름다운 꽃무늬를 꾸몄다. 고종은 이곳을 좋아하여 왕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지 않을 때는 역대 임금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가롭게 휴식할 목적과는 달리 이 건물은 조선 말기 정치적 혼란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들을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 사이에 서재인 관문각은 러시아인에 의해서 2층 벽돌집 건물로 개조되기도 하였다. 궁 안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1895년 일본인들이 궁궐을 습격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이 건물 곤녕합의 누마루인 옥호루(玉壺樓)였다. 이 사건 이후 건물은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철거되고 말았으며, 2006년에 와서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13.  태원전(泰元殿),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곳

 

  태원전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곳이다. 경복궁의 서북쪽 일대는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원전은 나중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다.

 

  이곳은 궁의 외진 곳이어서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었다가 지금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건물은 제사 지내는 집답게 단정하고 엄숙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14. 수문장 교대의식

 

  경복궁 관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수문장 교대의식이다. 조선 시대 수문장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사대문인 흥인지문, 숭례문 등 도성과 궁궐의 문을 지키는 책임자였다.

 

  수문장 교대의식은 1일 2회(10시, 14시)로 진행되며, 소요시간 20분이다. 광화문 파수 의식은 1일 2회(11시, 13시), 소요시간은 10분이다.

 

 

 

15. 경복궁 돌담길 산책

 

  경복궁 산책길은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청와대로 이어지고 다시 삼청동 공원으로 이어진다. 특히 경복궁 동문 입구에서부터 청와대까지 이어지는 길은 산책의 멋을 선사한다.

 

  이 길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경복궁 돌담길이 오른쪽에는 갤러리 현대, 금호미술관 등 미술관과 고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북촌과도 이어진다. 경복궁 돌담길은 경복궁 돌담과 오래된 늙은 나무가 풍성하게 늘어져 있어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세련된 카페도 있다.

 

  이곳을 지나 청와대에 이르기 전 오른쪽 길로 꺾어지면 삼청동 공원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유명 레스토랑, 한식집, 미술관이 많다.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 삼청공원이 있다.

 

  반대로, 지하철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경복궁 서쪽 돌담길을 따라 청와대로 곧바로 이어주는 효자로는 청와대 개방으로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길은 영추문을 지나 효자동에 이른다. 길을 건너면 서촌이다. 서촌에는 미술관 카페, 그리고 그 유명한 통인시장이 있어 젊은이들로 북적거린다.

 

 

 

 

 

 

◎상세정보

 

 

 

►주소 :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세종로 1-91(지번)

►전화 : 02-3700-3900

►관람 : 09:00~18:30, 입장 시간 09:00~17:30

►휴무 : 화요일

►요금 : 대인 3,000원 (단체 2,400월), 무료- 만6세 이하, 만65세 이상, 한복착용자, 대인이라도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은 무료

►해설 : 월수목은 10시부터 매 30분 간격으로 8회 / 금, 토, 일은 10시부터 30분 간격으로 12회

►주차 : 광화문에서 삼청동 가는 길 초입 좌측 편에 위치, 버스 50대(지상), 승용차 249대(지하)

►주차요금 : 소형 3,000원(2시간), 초기요금 매10분마다 800원 / 중대형 5,000원(2시간), 초과요금 10분마다 800원

►기타 : 반려동물 동반 불가

►맛집

<동쪽 방면>

황생가칼국수 (칼국수) : 소격동 84, 02-739-6334

삼청동 수제비 (수제비) : 삼청동 102-2, 02-735-2965

이태리재 (양식) : 소격동 158-1, 070-4233-6262

<서쪽 방면>

토속촌삼계탕 (삼계탕) : 체부동 85-1, 02-737-7444

서촌계단집 (해물, 생선) : 내자동 11-1, 02-737-8412

잘빠진메밀 (메밀국수) : 통인동 120, 070-4142-121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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