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길상사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한 법정 스님과 ‘길상화’
글·사진 남상학
“한 사람의 맑고 조촐한 삶은 그 자신이 의식하건 말건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 달빛 같은, 혹은 풀향기 같은 은은한 그늘을 드리우게 마련이다.” - 법정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서
▲사찰의 중심인 극락전, 팔작지붕의 전통 한옥이 인상적이다.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한 법정 스님과 ‘길상화’(본명 김영한) 보살의 자취를 찾아보기 위해 길상사(吉祥寺)를 찾았다. 길상사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사찰이다.
길상사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 마을버스(성북 02)를 타고 성북파출소 전 골목으로 고급주택가를 잠시 오르면 된다.
▲일주문, 사찰 규모에 비해 거대한 것이 특징이다.
길상화(본명 김영한)의 보살의 ‘무소유’ 실천
본래 길상사는 '대원각(大苑閣)'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다. 그런데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金英韓, 1916~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와 집을 시주함으로써 사찰로 바뀌게 되었다.
김영한은 1916년 민족사의 암흑기에 태어나 열여섯 살 때 금하(琴하) 하규일(河圭一)의 문하로 들어가 조선 권번에서 궁중 아악과 가무를 배우며 ‘진향(眞香)’이라는 기명을 받았다.
특히, 김영한은 춤에 소질이 두드러져 ‘무산향’, ‘검무’를 잘했고, 특히 ‘춘앵무’는 그녀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학 기생'으로도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스물두 살 때 김영한은 함흥의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에서 스물여섯 살의 백석을 기생과 손님으로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 후 김영한은 시인 백석과 사랑에 빠졌고, 김영한은 일본 강점기에 쓴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내 사랑 백석』등의 책을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토록 각별했던 두 사람은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맹세를 하였으나 이별은 너무 일찍 찾아왔다. 백석이 홀로 만주로 떠났고, 해방 후 백석이 평북 신의주시에 잠시 거주한 후 정주로 이동한 사이 6.25 전쟁이 발발해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김영한은 현재의 길상사 자리에 있었던 한식당 ‘청암장’을 사들여 제3공화국 시절 대형 고급 요정 ‘대원각’을 열었다. 당시 대원각은 대한민국을 뒤흔들던 권력가와 부자들이 즐겨 이용했던 최고급 요정이었다. 김영한은 대원각을 경영하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고, 대원각에서 백석을 기리며 살았다고 한다.
30여 년 세월 동안 요정을 경영하던 그에게 삶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소유를 얻을 수 있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세상 쾌락과 얼룩진 욕망의 바다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정신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1985년 김영한은 생애의 높고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7천여 평의 대원각 터(당시의 시가로 1,999억 상당)를 절로 만들어 줄 것을 청하였다. 김영한은 대원각을 시주할 때 “그까짓 1000억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며 한 치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요청을 받은 법정 스님은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 스님을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다.
▲공덕주 길상화 보살에 대한 안내판 , 고급요정을 경영한 그는 전 재산을 시주하여 '길상사'가 탄생에 기여했다.
법정 스님의 길상사 창건
마침내 법정 스님은 김영한의 요청을 받아들여 1995년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했다. “행복은 구하거나 노력한다고 얻는 것이 아니라 불만을 없애고 욕심을 절제함으로 얻을 수 있다”라는 법정 스님 말씀을 실천한 사람이 김영한이다. 김영한의 무소유 삶이 쾌락과 욕망의 집 대원각(大苑閣)을 부처님의 큰 깨달음인 대원각(大圓覺)으로 바꿨으니 말이다.
법정 스님은 그 뒤 2년 동안 개·보수를 거쳐 1997년 12월 14일 송광사의 말사 ‘길상사’로 사찰명을 바꾸어 창건하였다. 길상사의 절 이름은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란 의미로, 묘길상(妙吉祥) 곧 문수보살의 별칭에서 인용된 불교 용어이며, 승보사찰인 송광사(松廣寺)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이날 대원각 터가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상사’로 창건되는 아름다운 법석에서 법정 스님은 공덕주 김영한에게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주었다. ‘길상화’란 이름은 ‘불길한 것을 파괴하고 길상한 것을 성취한 꽃’이란 의미로서 무소유의 주인공 김영한 보살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특히 길상사의 개원 법회가 열리던 날,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법회에 참석해 법정과 함께 나란히 축사했고, 법정 또한 이에 답하여 그 이듬해인 1998년 2월 24일에 명동성당을 찾아 법문을 설법하였던 일은 당시 종교계의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법정 스님 진영(위), 김영화 보살의 시주를 받아 길상사를 창건하다
길상사 둘러보기
길상사 경내에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설법전, 지장전, 적묵당, 범종각, 진영각이 있고, 대중들의 정진 수행공간인 ‘길상선원’과 ‘침묵의 집’이 있다.
우람한 길상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팔작지붕의 전통 한옥이 극락전이다. 단청하지 않아 소박하고 깔끔하다. 쾌락과 욕망의 그림자가 사라진 대원각이 극락전이 되었다.
극락전 앞에는 서울특별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느티나무는 두 그루가 있다. 그중 하나는 수령 265년, 흉고 직경 105㎝, 높이 12m이고, 다른 하나는 수령 165년, 흉고 직경 80㎝, 높이 12m이다. 길상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동시에 맑고 향기로운 정신을 머금은 듯 푸르고 청청하다
느티나무와 함께 사찰 곳곳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아름드리나무가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봄·가을에는 명상에 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 길상사에서는 가끔 날씨가 좋은 날, 보호수 아래에서 법회를 열기도 한다. 또 설법전, 길상선원에서는 사찰체험, 불도체험, 수련회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도심문화공간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전면으로 보이는 극락전
▲시설 안내판
▲극락전의 건물과 내부
▲ 길상사의 분위기를 그윽하게 만드는 느티나무(보호수로 지정)
▲설법전 및 불교대학(템플스테이)
▲종각
▲길상선원
▲적묵당(명상의 집)
▲침묵의 집
▲지장전
▲선행상담실
▲스님 숙소
진영각(眞影閣)
길상사 제일 안쪽의 진영각에는 법정 스님의 진영과 친필 원고, 유언장 등 각종 유품이 전시돼 있다. 법정은 불교 승려이자 수필가이다. 스님은 1932년 전라남도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나 1956년 효봉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가초를 다지고 1959년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60년 통도사에서 불교사전편찬작업에 동참하였고, 1967년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 스님과 더불어 불교 경전 번역을 하여 불교계 언론과 유력한 신문에서 죽비 같은 글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3년 불교계 처음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그는 1975년 수행자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자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을 짓고 무소유 사상을 설파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수십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했다.
1992년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을 피해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 정진하였다.
그 후 1994년 우리 마음에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발족하여 순수 시민운동을 주창하였고, 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길상화(고 김영한) 보살로부터 대연각을 시주받아 1997년 12웡 14일, 송광사의 말사로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를 창건하였다. 길상사가 전남 순천 송광사의 말사가 된 것은 지역과 상관이 없고 법정 스님이 송광사 소속이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법문을 해오면서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1976년 4월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달아 내면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저서는 『무소유』 외에 『서 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오두막 편지』, 『텅 빈 충만』, 『홀로 사는 즐거움』 등의 산문집과 명상집 『산에는 꽃이 피네』, 『아름다운 마무리』,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등 많은 저서를 통하여 많은 독자에게 큰 감명과 울림을 전했다.
폐암으로 투병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사후에 '더 이상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들이 모든 책을 절판하기로 했다.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로 입적한 후 유골은 진영각 오른편 담장 아래 모셨다. 진영각 옆에는 생전에 스님이 줄곧 앉은 나무 의자가 흔적을 대신한다.
▲진영각에는 법정 스님이 남긴 유물과 저술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진영각 옆 계곡으로 흐르는 물줄기, 나무그늘과 함께 시원함을 더해준다.
김영한 공덕비와 사당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영한의 공덕비와 사당이 있다.‘길상화’ 김영한은 1999년 11월 14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언에 따라 길상 내에 뿌려졌다. 이 땅에서의 영욕을 삶을 마감하고 한 줌 재로 신성한 뜰에 잠들고 싶어 한 것이다.
공덕비에는 김영한 보살의 공덕 내용과 함께 생전에 사랑했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가 같이 새겨져 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시는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과 인간 모두의 마음속에 근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사랑에의 환상적인 꿈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서정시의 한 진경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이 시에서 그녀를 나타샤로 등장시킬 만큼 사랑한 백석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법정 스님은 김영한이 “내가 죽거든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유골을 길상사에 뿌려달라”라고 한 유언에 따랐고, 김영한 사후에도 길상사에서 그녀를 위한 정기법회를 열었다.
수행자로서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법정과 김영한은 이 시대의 맑고 향기로운 연꽃이 되어 우리의 영혼을 밝히고 있다.
▲'무소유'를 실천한 길상화공덕비와 사당
▲공덕주 길상화 보살 안내판과 백석 시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관세음보살살상
또, 극락전 우측, 설법전 아래에는 1.8m 크기의 화강암 관세음보살상이 서 있다. 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 예술가인 최종태가 조각한 것으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았다. 그는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로서 종교 간 화해와 화합을 염원하며 기증한 작품이다.
생각에 잠긴 듯 살짝 감은 눈, 목 주변 둥근 띠 모양의 옷은 국보 미륵반가사유상의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가늘고 긴 목과 길게 내린 천의(天衣), 그리고 아기를 안은 것처럼 큰 감로수 병을 안고 있는 모습이 마리아상을 닮아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성모 마리아상을 닮은 관세음보살상(천주교 신자 최종태의 조각)
7층 길상보탑 (석탑)
그리고 그 옆에는 7층 길상보탑이 서 있다. 이 섭탑은 기독교 신자인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기증한 것이다. “이 석탑은 길상사를 무주상보시한 길상화 보살님과 법정 스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 성당, 덕수교회와 함께한 종교 간 교류의 미를 전하기 위해 무상으로 기증하였습니다.”라는 글귀가 세겨져 있다.
이 역시 불교와 천주교의 교류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 화합의 상징처럼 보여져 눈길을 끈다.
▲길상7층보탑 (덕수교회 신자인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기증)
북카페 다라니원
길상사 경내는 수령이 꽤 되는 보호수도 있지만, 울창하지 않아도 숲의 느낌이 제법 진하고, 잘 가꾼 정원을 보는 듯하다. 계곡 주변으로 철 따라 들꽃이 피고 진다. 곳곳에 벤치도 마련되어 있어서 고목이나 계곡과 어우러진 숲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좋다.
그리고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 불교 서적과 일반 서적을 갖춘 길상사 도서관을 만들었다. 도서관은 2016년에 새롭게 단장하면서 북카페 ‘다라니다원’으로 운영된다. 휴식과 독서 기능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차 한잔 마시면서 법정 스님의 글을 읽어도 좋다.
▲계곡 곳곳에 마련된 쉼터(명상의 공간)
▲길상사 경내에는 동자상, 석등, 석탑, 연못들이 있다.
▲선열당과 도서관, 다라니다원은 방문객을 위한 공양처 역할을 한다.
길상사를 둘러보는 동안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세 글자가 머리를 맴돌았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법정 스님 - 『산에는 꽃이 피네』)
그 누구보다 진향은 이 세상에서 ‘무소유’를 실천한 으뜸 인물이다. 가슴을 쥐어짜던 사랑의 슬픔도, 세상에서 누리는 쾌락도, 그 많은 부(富)와 영화도 모두 ‘하찮음’인 것을 깨닫고 나서 완전한 ‘비움’을 통해 새로운 ‘채움’을 얻고자 한 것이다.
법정 스님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의 맑고 조촐한 삶은 그 자신이 의식하건 말건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 달빛 같은 혹은 풀 향기 같은 은은한 그늘을 드리우게 마련이다.”
법정 스님과 공덕주인 김영한은 가고 없지만, 그분들이 남긴 글과 길상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또한, 길상사는 법정 스님과 ‘길상화’ 김영한의 정신에 따라 불교 자선재단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으로써 소리 없이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길상사 경내에는 ‘맑고 향기롭게 사무실’이 있고, 가게도 있다.
▲'맑고 향기로운가게' 사무실(위), '맑고아름다운가게'(아래), 길상사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으로 이웃을 향한 많은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상세정보
►주소 : 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 68 (성북동 323)
►전화 : 02-3672-5945
►가는 길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 마을버스 성북 02 승차(길상사 하차)
<탐방일> 2022. 9. 6 오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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