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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묘, 그리고 고종 후궁 묘

by 혜강(惠江) 2022. 9. 8.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묘, 그리고 후궁 묘

 

슬프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

 

글·사진 남상학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묘로 가는 길은 쓸쓸하다. 왕족이면서도 나라가 힘이 없어 기울어가는 마지막을 눈으로 목격하며, 오히려 왕족이기에 더 큰 수모와 아픔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는 홍·유릉과  영친왕과 마지막 황세손인 이 구 씨의 묘역을 나와 솔밭길을 따라 잠시 걷다 보면 조선의 역대 왕릉과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판넬을 전시했다.

  여기에 한눈을 팔다 보면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묘가 나온다. 두 사람은 이복남매간이다. 오른쪽의 묘는 의친왕의 묘이며, 그 왼쪽으로 50여m 거리에 덕혜옹주의 묘가 있다.

 

 

의친왕(義親王, 1877~1955)의 묘

 

  의친왕(義親王, 1877~1955)은 조선 제26대 고종과 귀인(貴人) 장씨(張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강(李堈)이다. 호 만오(晩悟).

  1892년(고종 27) 의화군(義和君)으로, 1900년 의친왕으로 봉해졌다. 1893년 김사준의 딸(의친왕비)과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다.

  1894년 보빙대사(報聘大使)로 도일하여 일제의 청일전쟁승리를 자축하는 연회에 참석하였고,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고 1896년 귀국했다.

  1899년(광무 3) 미국에 유학,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교와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귀국하여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다.

  1919년 일진회에서 활동하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전협(全協), 대동단(大同團)의 최익환(崔益煥) 등과 협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여 상하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항일투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는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기차로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 만주 안중(현 랴오닝성 단둥)에 도착하였지만,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다시 국내로 송환되었다. 그 뒤 여러 번 일본 정부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남 이우(李鍝)와 2남 이건(李健) 등의 자녀를 두었다. 광복 후에는 평민의 신분으로 살다가 1955년 8월 안국동 사동궁에서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친왕 묘는 1955년 서울 광진구 화양동에 조성되었다가 1965년 서삼릉 경내로 묘를 옮겼다. 의친왕비(1878~1964)는 종로구 궁정동 칠궁에서 87세로 세상을 떠난 후 1964년 홍유릉 후궁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996년 현재의 자리에 의친왕과 합장되었다.

 

 

덕혜옹주(1912~1989)의 묘

 

  역시 덕혜옹주의 묘는 남양주시 금곡동 아버지인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는 홍·유릉 인근에 있다. 가까이에는 영친왕 그리고 마지막 황세손인 이 구 씨의 묘도 있다.

  덕혜옹주의 묘는 의친왕의 묘에서 50m 거리에 있다.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는 1912년 조선 제26대 고종(高宗)과 복녕당(福寧堂) 양씨(梁氏) 사이에서 고명딸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翁主)라고 호칭했다. 그녀는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 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인 1925년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왕세자 이 은처럼 13세 꽃다운 나이에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동경 학습원(學習院)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부모를 떠난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인 조발성(早發性) 치매증으로 고생하였다.

  1931년 쓰시마섬(대마도) 도주의 아들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정략 결혼하여 3년만에 딸(正惠, 일본명 마사에)을 얻었으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지병이 계속되었다. 1955년 이혼을 당한 이후 결혼에 실패한 딸마저 실종되자 병세가 더욱 악화하였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1961년 11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가 미국 방문 도중 일본에 기착한 기회에 영친왕(英親王)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가 면담하여, 1962년 1월 26일 38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지만, 귀국 20년이 지나서 198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다.

  귀국 직후부터 5년간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는 등 치료에 힘썼으나, 실어증과 지병이 호전되지 않아 결국 1989년 4월 21일 창경궁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묘에는 장명등, 망주석, 상석, 표석이 있고, 표석에는 ‘대한 덕혜옹주지 묘’라고 쓰여 있다. 덕혜옹주의 묘 현판에는 '고종황제와 귀인 양씨의 고명딸인 덕혜옹주(1912∼1989)의 묘이다. 덕혜옹주는 9세가 될까지 복녕당 아가씨로 불리다가 1921년 덕혜옹주로 봉해졌고, 1925년 일제가 유학이라는 명분을 세워 일본으로 데려갔다'라고 적혀 있다.

  덕혜옹주는 황실의 옹주로서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사던 10년도 채 안 된 삶이 37년 동안의 일본 억류 생활을 통해 산산조각이 나고 짓이겨졌다. 덕혜옹주는 황제의 총애를 받다 조국의 버림을 받기까지 최고·최저점을 찍은 아픈 역사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이야기는 2016년 허진호 감독, 손혜진, 박해일 주연으로 영화화하여 560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기록을 세웠다.

  덕혜옹주라는 권위 높은 황족의 이름, 고종 고명딸로 13세에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 늦은 나이네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지내지 못한 불우한 여인의 생애를 생각하며 묘소를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홍릉·유릉 내 후궁(소실) 묘까지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수인당 묘, 귀인 장씨 묘, 삼축당 김씨 묘, 광화당 이씨 묘가 차례대로 자리를 잡았다.

 

 

  덕혜옹주의 묘를 둘러보고 홍유릉둘레길을 걸어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면 왼쪽으로 정통묘목양묘장이 줄을 잇고 길의 오른쪽으로는 대한제국 황실복장, 장례의 모습 등을 보여주는 사진 판넬을 설치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조금 지나면 후궁묘로 들어가는 길이 보여 그곳으로  들어가 보았다.

 

    ▲후궁묘 쪽으로 내려가는 길

 

고종의 후궁묘역

 

▲후궁묘 입구

▲수인당 김씨 묘, 의친왕의 측실이자 이우, 이주, 이곤의 생모의 묘

▲수관당 정씨 묘, 의친왕의 측실이자 이건의 생모

▲귀인 장씨 묘,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의 후궁이자 의친왕 이강의 생모인 장씨의 묘

▲삼축당 김씨 묘,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 묘,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후궁이자 이육의 생모

 

  홍유릉을 비롯하여 영원, 회인원,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묘, 그리고 고종의 후궁묘까지 둘러보았다. 슬프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나라가 온전히 섰을 때 국민의 삶도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음을 노송의 푸르름처럼 새롭게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상세정보

 

►주소 :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 전화 : 031-591-7043

►대중교통 : 경춘선 금곡역에서 하차 (도보 15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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