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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홍릉과 유릉, 나라 잃은 황제와 백성의 한(恨)이 서린 곳

by 혜강(惠江) 2022. 9. 5.

 

남양주 홍릉(洪陵)과 유릉(裕陵)

 

나라 잃은 황제와 백성의 한(恨)이 서린 곳

 

 

글·사진 남상학

 

 

 

 

  홍릉과 유릉은 조선시대 홍릉과 유릉을 통칭하는 능호로서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다. 삼문을 통과하여 왼쪽에 자리 잡은 홍릉은 제26대 고종(高宗, 1852~1919)과 명성황후 민씨(1851~1895)의 묘소이다. 형태는 을좌신향(乙坐辛向), 즉 동남쪽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 앉은 동봉이강릉(同封異岡陵)이다.

 

 

 

  고종은 조선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이며, 어머니는 부대부인 민씨이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1863년 철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안동김씨와 반목하던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 씨(조 대비)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조 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고,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 조선 시대 역사상 살아 있는 왕의 생부는 사후에 추증된 경우를 제외하고 흥선대원군이 처음이다.

 

  고종의 재위 시에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의 갈등으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1865년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강제징수했다. 1866년 프랑스인 신부와 많은 천주교도를 처벌한 사건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같은 해 7월에는 대동강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평양인들이 불태워버렸다.

 

  1871년 지방의 농민수탈 근거지였던 서원을 47개를 제외하고는 폐쇄했다. 이해 4월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대원군 정권은 대내적으로 봉건적 개혁정책을, 대외적으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왕권안정 및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방어를 꾀했다.

 

  하지만 그전에 고종에게 씻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1895년 을미사변으로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된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명성황후가 일제에 살해된 지 6개월 후 고종과 왕세자(순종)는 두 대의 가마를 타고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대내외 정세 가운데, 1910년 일제에 의해 왕으로 격하되어 강제로 유폐되었고,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황제 지위를 물려주고 근대 개혁을 미완의 과제로 남긴 채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67세로 쓸쓸히 죽었다.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의 장례는 황제의 국장도 아닌 왕족의 장으로 치러졌다. 그마저도 7개월도 아닌 3개월로 했다. 처음에는 조선의 국장제인 '상례보편제'를 따랐는데 갑작스럽게 일제가 개입해 일본식으로 치르도록 했다. 이왕 직제로 이루어져 조선의 상왕제에 일본식이 가미된 특이한 장례였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나돌아 국장일인 3월 1일을 기해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온 나라를 울렸던 백성들의 함성은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목소리인 동시에 황제를 애도하는 마음이었다. 고종은 그해 3월 3일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에 초장봉릉(初葬封陵 : 처음 장사를 지내고 능을 만듦)되었다.

 

  한편, 명성황후 민씨는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浪人)들에게 살해되었다. 같은해 10월 28일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청량리(현 숭인원)에 초장되었다가 1919년 1월 16일 현재의 위치로 옮겨 합장했다. 이 일대는 1970년 5월 26일에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홍릉·유릉의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먼저 홍릉·유릉 역사문화관을 둘러본다. 이곳에는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 조선왕릉과 대한제국 황제릉, 대한제국 황실의 국장 등에 대하여 간단히 전시하고 있아서 탐방에 앞서 기초지식을 얻을 수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 민 씨의 묘, 홍릉(洪陵)

 

 

  고종의 능인 홍릉은 일반 능과는 다르다. 대한제국의 선포에 따라 황제가 됨으로써 능역 조성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 방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의 구조물이 대폭 확장되었다.

 

  상설 규모로는 곡장(曲墻) 3연화(蓮花)와 모란문(牡丹文)이 조각된 병풍석 12난간석 12혼유석 1, 망주석 2, 명등석 1, 침전 1, 비각 1, 표석 1, 망료위(望燎位) 1, 문인석 2, 무인석 2, 기린석 2, 상석(象石) 2, 사자석 2, 해태석 2, 낙타석 2, 마석 4, 홍살문 1, 재실 1, 수라간·수복방·금천교 등이 있어 전통적인 제도를 따르고 있다.

 

  홍살문으로 들어가는 우측에 큰 연지(蓮池)가 있다. 조선의 왕은 천원지방의 연못을 기본으로 했는데 이곳은 연못 전체도 원형이고 가운데 섬도 원형이다. 연못에는 부들과 연꽃 등 수생 식물이 자라며 원형의 섬에는 향나무, 소나무, 진달래 등이 심겨져 있다.

 

 

 

  연지를 지나면 왼쪽에 수라간, 오른쪽에 수복방이 있다. 수라간은 제향에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며,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무는 건물이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는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있는데, 이는 황제 능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다. 재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묘소 근처에 세운 건물이다.  

 

 

 

  홍살문에서 침전 기단까지 참도가 깔려 있는데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좌우보다 한 단 높게 마련된 중앙 길은 황제와 황후의 영혼이 다니는 길이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 왕릉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한 단 낮은 삼단이다.

 

 

 

  또, 참도 곁으로 능침의 호석(護石)인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대신 침전 가까이부터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각 1쌍, 마석 2쌍을 2단의 하대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배치는 기존의 왕릉과 크게 달라 참배객들로 하여금 이색적인 느낌이 들게 한다. 각기 좌우 1쌍인데 석마만 2쌍으로 다른 상에 비해 키가 작다. 문인석의 금관조복(金冠朝服)과 무인석의 성장(盛裝)이 강조된 것이 다른 능과 다르다.

 

 

 

  그리고 정자각도 변형되어 중국의 황제 능처럼 일자 모양의 침전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은 고종의 신위를 봉안한 제전이다. 정자각 오른쪽에 비각이 있다. 그 뒤로 제정(우물)도 있다.

 

 

 

  문인석, 무인석, 석수가 모두 침전 앞에 있어 봉분 주위는 웅장한 침전에 비해 단출해 보인다. 능침만 보면 황제 능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소박하다. 그럼에도 현종 이후 보이지 않았던 12면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았고 혼유석 1좌 양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이를 3면의 곡장이 둘러싸고 있다. 혼유석 앞에 작은 대석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유릉(裕陵), 순종과 두 황후의 묘

 

 

 

   삼문을 지나 오른쪽에 자리 잡은 유릉은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純宗)과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閔氏),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의 묘소로 묘좌유향(卯坐酉向)한 동봉이강릉이다.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에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두었으나 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었다. 순종은 2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34세가 되던 1907년 7월 20일,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이다

 

  순종 즉위 직후 일본은 순종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일 대신과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법령 제정권, 관리 임명권, 행정권 등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에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의 모든 통치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순종은 즉위 3년 만에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대한제국은 주권을 상실했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한 지 519년 만에 조선왕조가 망하고 만 것이다.

 

  순종은 일본에 의해 '이왕(李王)'의 신분으로 격하된 채 창덕궁에 기거하다가 1926년 4월 25일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53세로 승하항여 같은 해 6월 11일 이곳 금곡에 초장봉릉되었다.

 

  순종은 살아 있는 내내 병약했고 판단력도 흐렸다. 나라를 잃은 왕의 마지막 모습은 비참했다. 그래도 국민들은 이런 왕을 끝내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순종의 장례식 날, 수많은 국민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며 애통해했다. 또한 울분을 쏟아내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순종은 9세 때인 1882년(고종 19)에 민태호(閔台鎬)의 딸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와 혼인했다. 그러나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황위에 오르기 전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1904년에 34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어 1907년 황후로 추존되었다.

 

  순명효황후 민씨는 1904년(광무 8) 9월 28일 경운궁 강태실(康泰室)에서 33세로 죽어 같은 해 11월 29일 양주군 용마산 내동(현재 어린이대공원 경내)에 초장되어 유강원(裕康園)이라 하였다. 1907년(강희 1) 황후로 추봉되고 능호도 유릉이 되었으며,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곳으로 옮며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이후 순종은 윤택영(尹澤榮)의 딸을 순정효황후(純貞효皇后)로 맞이했으나 역시 후사를 보지 못했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 1월 13일 72세로 죽어 역시 유릉에 합장하였다.

 

  능역에 홍살문, 재실, 수라간·수복방·금천교 등이 있고, 상설로는 곡장(曲墻 :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 3면, 연화(蓮花)와 모란문(牡丹文)이 조각된 병풍석 12면, 난간석 12칸, 혼유석, 망주석 2, 명등석, 침전, 비각, 표석, 망료위(望僚位), 문인석 2, 무인석 2, 기린석 2, 상석(象石) 2, 사자석 2, 해치석 2, 낙타석 2, 마석이 있다. 이 모두 전통적인 제도를 따르고 있다.

 

  홍살문과 석물 침전은 일직선상이나 능침은 옆으로 비꼈으며, 현대감각을 주는 문인석·무인석은 사실적으로 입체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대대적인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경내는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홍유릉 권역 내에는 홍유릉 외에도 의민황태자(영친왕 이은)와 의민황태자비의 무덤인 영원, 황세손 이구의 무덤인 회인원이 있으며, 그 우측으로 의친왕(이강)과 덕혜옹주의 묘도 있다. 그리고 후궁묘도 자리 잡고 있다. 

 

 

◎상세정보

 

►주소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금곡동 141-1)

►전화 : 031-591-7043

►입장시간 : 09시~17:00(2~5, 9~10월), 09:00~17:30(6~8월), 09:00~16:30(11~1월)

►요금 : 1,000원 (단체 800원), 경로 무료

►대중교통 : 경춘선 금곡역에서 하차 (도보 15분)

 

►맛집

*봉평산골메밀촌 (메밀국수) : 금곡동 427-29, 031-592-8592

*맛있는 해장국 (해장국) : 금곡동 154-20, 031-595-3440

*남가네설악추어탕 (추어탕) : 금곡동 433-3, 031-591-5551

*부산복집 (복지리, 복매운탕) : 금곡동 156-38, 031-592-171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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