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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抗日) 의병의 효시, 지평 의병

by 혜강(惠江) 2022. 8. 5.

 

지평 의병

 

항일(抗日) 의병의 효시, 지평 의병

 

글·사진 남상학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에 있는 지평 의병·지평리전투 기념관에는 민족의 암흑기에 횃불처럼 타올랐던 지평 의병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기록 전시되어 있다.

 

  2016년 2월 16일 개관한 기념관은 연면적 540.96㎡의 지상 2층 건물이다. 1층에는 최초의 의병과 지평리 전투의 생생한 소개와 진행 과정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증 지평 의병을 알리는 코너에는 <희망의 횃불, 지평 의병>이라는 주제로 6개로 구분하여 지평 의병에 대하여 자세하게 보여준다.

 

 

 

 

의향(義鄕) 양평

 

  양평 지평면 주민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큰 활약을 했다. 한말 일본의 침탈에 거센 저항을 보여준 인재들이 양평에서 적지 않게 배출되었던 것은 양평을 대표하는 인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년~1868)(정조 16)의 영향이 매우 컸다.

 

  이항로는 윤리와 아울러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처럼 한다는 애국사상과 자주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조 말기의 민족사상인 위정척사 사상(衛正斥邪思想)의 기초가 되고, 나아가서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승화되었다.

 

  위정척사란 정학과 정도를 지키고 사학과 이단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즉 위정이란 정학인 성리학과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 척사란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 및 사상을 배격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정립한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한 화서 학파 문하생들은 양평이라는 지리적, 정신적 영향으로 투철한 의사상으로 무장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만주지역 항일 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광복군을 이끌었었다. 화서학파에서 독립 유공 서훈을 받은 사람이 200명이 훨씬 넘고, 103명이 순국했다.

 

 

 

 

 

2. 일제의 침략과 저항의 역사

 

  19세기 말, 서구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은 문호를 개방하였다. 조선은 개화사상과 위정척사 사상의 갈등 속에서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동학 농민운동을 일으키고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이 본격화하자 애국 계몽운동과 의병 운동 등 국권 수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3. 항일 운동의 효시, 지평 의병

 

  1895년 10월,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사변)과 그해 11월의 단발령 공포 후 지평과 양동 등지에 양반 유생들이 들고일어나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지평 의병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양평군 지평면 출신의 김백선·이춘영이 이끄는 포수 400여 명이 국가의 위기를 인식하고 전국 최초로 의병을 조직하였다. 원주 안창에서 지평의진을 창의하여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원주 관아와 제천 관아를 잇달아 점령하고, 단양의 장회협 전투와 충주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지평 의병은 최초의 을미의병으로 인근 강원지방과 충북지방의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된 대표적인 척사의병이었다.

 

 

 

 

 

4.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힘

 

  안종응은 거병을 상의하기 위해 지평 상동면으로 찾아온 이춘영에게 김백선을 만나보라고 권한다. 이춘영은 야밤인데도 불구하고 즉시 김백선의 집을 찾아 나섰고, 그 자리에서 함께 거병을 다짐했다. 이날이 1895년 음력 11월 21일(양력 1896.1.5.), 이춘영과 김백선이 만나 지평 의병 조직에 합의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로부터 7일 후인 1895년 11월 28일 의병을 조직하게 된다.

 

 

 

 

 

5. 꺼지지 않는 희망, 양평 의병 전쟁

 

  일제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의 반식민화 되자 의병 활동은 다시금 봉기하게 되었다. 을미의병이 화서학파에 의한 거의였다면, 정미의병은 평민층과 해산된 군인들이 주도했다.

 

  1907년 11월 초, 전국 각지에서 의병 5,000여 명이 서울 진공 작전을 위해 지평 산삼리에 모여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고, 근거지였던 양평지역의 유서 깊은 사찰인 용문사, 상원사가 화마에 휩싸이는 피해를 입었고,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의병의 항일의지는 독립군으로 계승되어 민족해방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6. 푸른 눈의 이방인이 본 지평 의병

 

1906년부터 1907년까지 2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의병전쟁 지역을 답사한 맥켄지는 1907년 11월 7일과 8일, 삼산리전투가 벌어진 직후의 양평지역을 방문해 그 모습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만난 의병에는 군인과 유생, 농민, 어린 소녀 병사도 있었다.

 

그는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고 기록하고 한국인들의 애국심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을미의병 기념비

 

 기념관 앞뜰이 끝나는 곳에 양평 을미의병기념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화서학파의 문인인 이춘영·안승우 등과 김백선을 주축으로 포수 400여 명이 의병을 일으켜 활동ㅎ란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양평의병이 일어난지 100주년을 기념하고 의병들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양평문화원을 중심으로 1996년에 세웠다.

 

 

 

 

◎상세정보

 

►주소 :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지평리 385-3)

►전화번호: 031-771-6625

►가는 길

(1)기차. 전철 이용 : 경의중앙선지평역 1번 출구(도보 16분)

(2) 버스 이용

* 향교말A 1-13, 1-43, 1-63, 2-6, 7-2, 22, 24, 77-2(도보 3분)

* 향교말B 1-3, 1-23, 1-33, 1-53, 2-6, 22(도보 3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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