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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인천도시역사관, 개항 이후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by 혜강(惠江) 2022. 7. 25.

 

인천도시역사관

 

인천항 개항 이후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글·사진 남상학

 

 

 

 

  인천은 1883년 개항 후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로 시작하여 130년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변화와 확장을 거쳤다. 인천의 역사와 변화과정을 다양한 실물자료와 모형을 통해 알기 쉽게 보여주는 인천도시역사관을 찾아갔다.

 

  인천도시역사관은 송도 센트럴파크 바로 옆, 큰길 가에 있다. 자가용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센트럴파크 지하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편리하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서 인천지하철 1호선 센트럴파크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곁에 있다. 2시간이면 족하다.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인천도시역사관에 들어서면 로비에 멋진 올드 카 두 대가 전시되어 있다. 웬 차인가 했더니, 설명을 보니 60년대 인천의 자동차 산업을 상징했던 부평의 신진자동차 공장에서 만든 차들이다. 한때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코로나 자동차, 크라운 자동차가 이젠 역사관의 유물이 되어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이루어진 인천도시역사관은 1층에 근대도시관, 수다방-자앞말, 카페 봄날이 있고, 2층 인천모형관, 기획전시실 아함홀, 다목적실 소암홀, 3층은 강당, 교육실 외에 전시실(개편 중), 4층은 사무실, 유물정리실, 자원봉사실 등이 있다. 지하 1층은 수장고와 지하주차장이 있다.

 

  1층 근대도시관에는 개항 이후부터 광복까지 인천의 형성 과정과 변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개항도시 인천’(1883~1906), ‘감리서의 폐지와 이사청의 설치’(1906~1914), ‘진센과 인천-도시의 양면’(1914~1936), ‘군수공업도시 인천’(1936~1945) 등 네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과 함께 실물을 전시하였다.

 

 

 

(1) 개항도시, 제물포(1883년~1906)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만 해도 인천 제물포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한적했던 이곳에 외국 배들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1883년 1월 정부는 제물포항을 개항했다. 이때부터 제물포 해안은 무역을 위해 입항하는 외국 기선의 정박지가 되었고, 상인과 부두 노동자들이 몰려들면서 개항장이 되었다.

 

 

 

그들만의 공간 조계(租界)

 

  1884년 영국과 체결한 수호통상조약 제4조에서 ‘조계 밖 10리 이내’에서 외국인의 토지 및 가옥 소유를 허용함으로써 정부는 개항장의 질서유지를 위해 개항도시 제물포를 조선지계, 일본지계, 청국지계, 영국을 포함하여 미국, 독일 등 다섯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던 공동조계 등으로 분할했다. 청과 일본은 별도의 조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공동조계안에도 들어갈 권리를 갖게 됐다.

 

  조선에 앞서 중국은 이미 남경조약에 의해 광동과 상해 등 5개 항을 개항하면서 ‘외국인 거주 구역’, 즉 ‘조계’라고 불리는 제도가 만들어지게 됐고, 이것이 일본과 조선에 그대로 적용됐기 때문이다. 조계는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하고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이다. 각국은 조계지에 도로와 관공서, 주거지를 구획하고 기반 시설을 확충했다.

 

 

 

개항장의 중심, 내동

 

  이로써 개항 직전 20여 호에 불과하던 조선인 가옥은 1897년 2,300여 호를 넘었으며, 인구도 9,000여명에 달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행정구역도 내동, 외동, 정동, 답동 용동 등으로 세분되었다. 그중 조계지 동쪽 감리서(監理署, 개항 이후 개항장·개시장(開市場)에 설치되어 행정과 대외관계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가 있던 내동 일대는 감리서를 비롯한 조선 정부의 관청과 은행, 객주 상점이 몰려 있는 명실상부한 개항장의 중심이 되었다.

 

 

 

 

(2) 감리서의 폐지와 인천이사청 (1906~1914)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1906년 2월 일본 영사관을 대신할 이사청을 설치하고, 감리시가 관장하던 외국인 출입사무를 이사청으로 이관시켰다. 그해 9월, 인천의 개항장과 개시장의 감리사를 폐지했고, 감리는부윤이 되어 지방 행정 업무를 관쟁했다. 이러한 행정체재는 한일병합 후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유지되었다.

 

 

 

부제 실시와 조계의 폐지

 

  을사늑약 이후, 한국의 관청인 인천부와 일본의 인천 어사청이 공존하여 유지되던 이중적인 행정체재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과도기를 거쳐 조선총독부는 1914년 4월,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인천 역시 조계 제도가 폐지되고, 다문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던 인천은 왜색 가득한 도시, ‘진센’으로 변해갔다.

 

 

 

(3) ‘진센(jinsen)’과 인천, 도시의 양면(1914~1936)

 

  한일병합 후 일본은 내정간섭을 일삼았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확대 개편하고 본격적인 식민통치에 들어가 우리 쪽 지방관아인 인천부를 폐지했다. 인천은 일본 발음 그대로 ‘진센(jinsen)’이 되어 일본의 신민 도시로 변해 갔고, 인천을 화려한 근대도시로 치장하여 조선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도시의 진정한 주인인 조선인들은 여전히 이곳을 인천이라 부르며, 일본의 식민통치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면서도 일본인과 차별되는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며 민족의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식민도시의 산업

 

  한일병합을 전후해서 인천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대규모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일본 자본은 인천에 정미 공장, 비누·성냥·간장 등 생활용품공장을 건설했고 점차 산업도시로 변모해 갔다. 몇몇 조선인 자본가가 운영했던 정미소, 양조장도 존재했지만, 일본인의 그것에 비하면 규모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도시의 번영, 도시인의 삶

 

  인천거주지를 중심으로 세워진 대규모 산업시설은 인천을 화려한 근대도시로 치장했다. 이 무렵 인천 수족관, 극장, 해수욕장, 유원지 등을 인천 부민을 위한 위락시설도 들어섰다. 일본은 이러한 번영을 식민통치의 치적으로 삼아 국제적으로 널리 선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도시의 번영 혜택은 대부분 일본인에게 돌아갔으며, 인천 부민 중 다수를 차지하던 조선인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4) 군수 공업 도시, 인천 (1936~1945)

 

  식민통치를 위해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설립했다. 이를 계기로 중일 관계가 악화하였고, 일본은 본격적인 군국주의 체제로 전환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데 이어 1941년 미국과의 사이에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강대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본토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 일본은 인천의 기존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중화학공업 위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은 전쟁 수행 물자를 공급하는 군수 공업 도시로 변모하였다.

 

 

 

도시의 확장, 병참 기지화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본격적인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인접 지역이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인천부의 면적은 종전의 20배가량 확장되었다.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수인 철도가 개통되었다. 한편,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통제하는 ‘국가 총동원법’이 공포되면서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 ‘황국신민화’를 내세워 창씨개명과 조선어 말살 정책을 펴나갔다.

 

  아울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란 어용단체를 만들어 일본 정부 시책을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여론을 조성하여 여론을 조성했다. 이에 따라 개항 이후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근대도시 인천은 전재에 모든 자원이 동원되는 통제된 사회, 획일화된 도시가 되었다.

 

 

 

 

2층, 인천모형관

 

  1층 근대도시관은 근대화라는 거센 물결 속에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는 인천의 과거를 보여준 것이라면, 2층의 인천모형관은 인천의 현재의 모습을 모형을 통해 인천 시내는 물론 강화, 영종의 전경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인천 모형도

 

▲카페 봄날과 수다방-자앞말

 

 

  인천도시역사관의 근대도시로의 발전 과정을 좀더 자세히 알려면, 인천 중구에 소재한 인천개항박물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대불호텔전시관·중구생활사전시관, 짜장면박물관, 한중문화관·인천화교관 등을 함께 살펴볼 것을 권한다. 이들 기관들은 5분 이내 거리로 이어져 있어 방문이 수월하다.

 

  지금은 인천은 전국 8대 광역시 중 가장 넓은 면적에 300만 인구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도시로 성장했다. 도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속으로 공존하므로, 앞으로 펼쳐질 미래 인천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대해 본다.

 

◎상세정보

 

▲인천도시역사관-네이버지도

 

 

►주소 : 인천 연수구 인천타워대로 238 (송도동 24-7)

►전화 : 032-850-6000

►관람 : 09:00 ~ 18:00, 10명 이상 방문할 경우 사전 전화 예약

►휴무 :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월요일은 제외), 1월 1일

►해설 : 오전: 09:30~13:30, 오후 : 13:30~17:30 (자원봉사자 해설), 희망 시 안내데스크에 문의

►관람료 : 없음

►가는 길

 *지하철 : 서울 ~ 인천간 전철 환승, 인천지하철 1호선 센트럴파크역 3번 출구

 *버스 : M6405번, M6450번 광역버스, 급행 98번 버스를 타고 센트럴파크역 하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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