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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by 혜강(惠江) 2022. 6. 30.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글·사진 남상학

 

 

 

 

 

  서울 남산(중구 예장동 2-1) 기슭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피해 할머니들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공간으로 ‘기억의 터’가 조성되었다. 원래 이곳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따라 설치되었던 통감부의 관저 터였다. 그리고 민족반역자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이 한일강제합병조약을 체결한 곳이다. 이 땅에 식민시대가 시작된 국치(國恥)의 현장이다.

 

  이 치욕의 터에 2016년 서울특별시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록과 피해 기록 그리고 일제의 만행 등을 기록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억의 터’를 조성하고 체험과 인권 및 평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는 할머니들의 외침을 영원히 기억하고, 이 땅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하는 소망을 담은 ‘대지의 눈’을 비롯하여 ‘세상의 배꼽’ 두 작품이 설치되었고, 기존의 ‘통감관저 터 표지석’ 과 ‘거꾸로 세운 동상’이 함께 어우러져 역사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대지의 눈

 

  ‘대지의 눈’은 사람이 눈을 뜬 모습을 형상화한 공간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록과 피해 기록 등이 새겨져 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의 성함과 함께 할머니들의 증언을 시기별로, 끌려가던 순간에서부터 위안소에서의 처절한 삶, 해방 후 귀국, 귀향하던 때, 반세기의 침묵을 깬 그 이후 인권활동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새겼다. 또한, 고(故)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 ‘끌려감’ 이 함께 새겨져 할머니들의 아픈 역사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본이 ‘위안소’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치한 것은 상해(上海)사변이 있었던 1932년 전후였다. 국제법에서는 개인이 성매매를 위한 인신매매를 시도하는 행위도 범죄로 보고 조약에 가입한 국가들로 하여금 이를 막으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군 '위안부' 동원이라는 범죄행위를 기획 실행하였다.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은 중일전쟁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41년에는 대소공격을 준비한 관동군 특별 연습과 관련하여 짧은 기간에 조선총독부의 지원하에 조선인 여성 2000~3000명을 동원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1941년 12월 일본군이 동남아와 태평양지역을 침략한 이후 군 '위안부' 배치를 위해 다수의 조선인 여성들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여성 동원에 필요한 돈은 일본 정부에서 상당 부분 조달하였다. 일본군과 조선총독부, 중국 괴뢰기관 사이에 군 '위안부' 모집에 필요한 돈이 오간 사실이 자료로서 확인되었음에도 일본 정부는 관이 직접 관여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하며 망언을 일삼아 왔다. 군 '위안부'제 운영에는 일본군과 정부만이 아니라 일본기업도 긴밀한 협조 관계에 있었다는 점 역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침략전쟁 중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들은 현장에서 학대받아 죽고 병들면 버려졌다. 해방이 됐다 해도 만신창이의 몸으로 험난한 귀국길에서 쓰러져갔거나 오도 가도 못 한 채 낯선 타국에서 파편처럼 박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을 찾았다 해도 그들의 고통은 외면당하고 공동체는 그들을 배제했다.

 

  그러나 이들은 반세기만의 침묵을 깨고 세상을 향해 진실을 외쳤다. 거리에서, 법정에서, 세계 각국의 인권 무대에서. 이곳에 서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내 나이 12살. 언니와 나물을 뜯는데 차가 오더니, 모자 쓴 사람들이 차를 타라고 했다. 둘이 끌어안고 버텼더니 나를 발로 차버리고 언니 머리채를 쥐고 차에 태웠다. 내가 울어대니 나까지 주워 올려 한꺼번에 잡혀갔다. 대만에서 다른 차에 실린 언니와 헤어져 생사도 모른다.” (심달연)

 

  “징용으로 끌려간 남편이 남양군도에서 죽었다고 소식이 왔다. 남편 죽은 보상금을 직접 가서 받아야 한단다. 어린 것들 둘을 친정에 맡기고 따라나섰더니 목단강 근처 군부대였다. 목단강! 어린 것들 던져두고 끌려온 목단강을 어찌 잊겠는가.” (정윤희)

 

  “처녀를 잡아간다기에 또래들과 20여 일을 화장 막에 숨어 있었다. 동생이 '배고파 죽겠다. 누나가 신민 서사 외우니까 배급 좀 타주라.' 애원해 배급 타다 들켰다. 순사 한 명과 헌병 두 명이 항의하는 아버지를 총대로 내리쳐 이마에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열네 살의 나는 끌려갔다. 군인들과 함께 군함에 실려 남태평양 팔라우로.” (강순애)

 

  할머니들은 이렇게 강제로 끌려가 갖은 수모를 겪으며 비참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도망가자마자 붙들려 끌려들어 왔어. 순사가 때리다가 군인 시켜 또 때리지…. 군화로 짓밟고 칼 차고 권총 차는 큰 허리띠로 때렸어. 온몸이 시퍼렇게 굴뱅이진 몸으로 다음 날부터 또 군인을 받았어. 그놈들도 놀라서 달아나더라구.” (이옥선)

 

  “몸이 혹사당해 약할 대로 약해진 여자들은 '나카이'들이 끌어내고 건강한 다른 여자로 바꿔 치웠다. 끌어낸 여자들은 골방에 가두고 밥도 제대로 안 줬다. 주사를 놔도 소용이 없으면 군인들이 트럭에 싣고 산으로 끌고 갔다. 죽은 여자는 산에 갖다 버리고 풀잎으로 겨우 가려줬다.” (이귀분)

 

 

 

  이렇듯 할머니들의 삶은 너무 험한 악몽의 날들이었다. 반인륜적 전쟁범죄 피해자였지만 당당히 평화․인권활동가로 활약하신 할머니들의 메시지를 계승하자는 다짐으로, 뒤늦게 사회단체, 정계, 여성계, 학계, 문화계, 독립운동가 후손 등이 모여 ‘기억의 터’ 조성하기로 하고 국민 모금을 시작했고, 이에 19,754명의 참여로 목표액이 달성되어 서울시의 협조로 이 ‘기억의 터’를 마련한 것이다.

 

 

 

세상의 배꼽

 

  ‘세상의 배꼽’에는 윤석남 화가의 작품과 함께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한글, 일본어, 영어, 중국어로 함께 새겨졌다.

 

  주변에 놓인 자연석들은 전국, 전 세계에서 마음을 모아온 할머니들고 국민들을 뜻한다. 이 돌들은 기억의 터를 찾는 모든 이들이 편하게 앉아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할머니들의 외침을 영원히 기억하고, 이 땅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하는 배움의 장이자 사색의 터라고 할 수 있다.

 

 

 

통감관저 터

 

  기억의 터는 본래 을사늑약~한일강제 병합기까지 조선 통감이 머물렀던 곳이다. 조선 통감부는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조선을 빼앗을 목적으로 남산자락에 설치한 총독부의 전신이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은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한일강제병합을 체결했다.

 

  그리고 8월 29일 일왕과 순종의 조서가 공포됨으로써 조선왕조 519년, 대한제국 14년 만에 조선은 망하게 되었다. 조선 통감부는 그 후 조선총독부로 이름이 바뀌고, 1926년 광화문으로 옮길 때까지 이 자리에서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다. 

 

 

 

거꾸로 세운 하야시 곤스케 동상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이 세워졌던 동상대에 거꾸로 세워져서 전시하고 있다. 하야시 곤스케는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한일협약 체결 등에 깊숙이 관여한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문제의 동상은 1936년 그의 업적을 기념해 통감관저 앞뜰에 세웠던 것이다.

 

  조선 침탈의 상징 하야시 동상 좌대 판석의 글자 ‘남작 하야시 곤스케 상’ 중 ‘조’ 자의 좌변과 ‘군’자의 ‘입 구’ 부분이 깨진 채 2006년 8월 3일 발견된 것을 서울시가 9년간 보관하고 있다가 동상의 잔해들을 모아 표석을 만들었다. 동시에 국가적인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동상을 거꾸로 설치하여 옛 통감관저 터에서 일반에 공개하게 되었다.

  

 

 

  지금 이곳에는 당시 치욕스러운 역사를 지켜본 400년 넘는 두 그루의 고목이 자리를 지키고 그날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매년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제정한 것도 일본 위안부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8월 14일은 1991년 김학순 (1924~1997)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중 최초로 기자회견을 통해 피해 사실을 증언한 날이다.

 

 이 ‘기억의 터’는 할머니들에게는 위로가, 지금 이곳을 찾는 세대와 미래 세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고, 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문

 

  '기억의 터'에서 서울 유스호스텔로 이어지는 길의 벽면에는 세계인권선언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 게시물은 인권을 짓밟은 일본 당국의 잘못된 처사를 상기시킨다.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기억의 터’에서 나와 숭의여자대학교와 남산 케이블카 앞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 남산 회현동 자락 옛 조선 신궁 터 부근(서울교육청 교육 연구정보원 앞)으로 걸어 이동했다. 이곳에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SEOUL ‘COMFORT WOMEN’ MEMORIAL)가 있어 함께 둘러보기 위해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2019년 0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설립된 김진덕‧정경식 재단과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기념비를 기증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비가 세워진 이 남산자락은 일제 강점기 아픈 역사를 간직한 조선 신궁 터 앞쪽이다. 원래 조선 시대 국사당이 있었던 자리였지만 일제가 철거한 후 일본 국가종교시설인 신궁을 세웠던 곳이다.

 

 

 

 

  일본은 1925년 건국 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주제 신으로 한 조선 신궁을 이곳에 건립했다.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조선을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조선인들에게 신궁 참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캘리포나아 교민들의 뜻을 받아들여 서울특별시와 교육청, 그리고 정의기억연대가 주축이 되어 시민들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좀 더 가까이 접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시민들이 많이 찾는 일상적 공간이자 일제 침탈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 장소를 택하여 평화와 인권의 상징물인 기림비를 설치한 것이다.

 

  서울 기림비는 샌프란시스코 기림비와 똑같이 손을 맞잡은 한국, 중국, 필리핀 3명의 소녀와 이들을 바라보는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세 명의 소녀상 옆 한쪽을 비워 누구나 이들과 손을 맞잡아 채움으로써 완성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시선은 용기의 표상이자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세 소녀가 맞잡은 손은 연대를 뜻한다. 동서남북으로 손을 잡고 서 있는 세 소녀 형상 중 한쪽은 자리가 비어 있다. 소녀상과 만나는 이가 이들과 손을 맞잡아야 비로소 완성되는 형상인 것이다. 손을 내밀어 함께 기억하면 역사가 된다.

 

 

 

 

  기림비 주변으로는 안중근 의사기념관, 한양도성 현장유적박물관, 기억의 터 등이 조성되어 있어 일제 침탈의 아픈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기림비에 가려면 지하철 4호선 회현역 3번 출구에서 오르는 것이 제일 가깝다. (711m) 버스는 02번을 타고 남산도서관 앞에서 내리면 된다.

 

기억의 터, 찾아가는 길

 

*4호선 명동 1번 출구로 나와 대한적십자사 본사 앞 건널목까지 약 217m 이동 후 건널목을 이용하여 서울소방재난본부로 이동. 서울유스호스텔 방향 오르막길로 30m가량 이동하면 된다. (약 500m, 도보 7분)

*충무로역 4번 출구로 나와 중부세무서까지 약 212m 이동 후 중부세무서 왼쪽으로 약 100m 이동. 서울소방재난본부, 서울유스호스텔 방향 오르막길로 30m가량 이동하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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