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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청계천, 자연이 되살아 숨 쉬는 도심 휴식처

by 혜강(惠江) 2022. 5. 4.

 

청계천

 

자연이 되살아 숨 쉬는 도심 휴식처

 

 

글·사진 남상학

 

 

 

 

 

  청계천박물관과 ‘청계천 판잣집 체험관’ 탐방을 마치고 청계천을 걷기로 했다. 청계천은 서울의 도심부를 관통하는 중요한 도시하천이다.

 

  5월 초, 서울의 관광명소로 떠오른 청계천은 서울 중심가에 물길과 함께 자연의 푸르름이 내려앉아 있었다. 시원스레 흐르는 맑은 물에는 각종 물고기와 오리가 헤엄치고 학이 날아든다. 개천가에는 낯익은 꽃과 풀,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양버들도, 물비린내도 다 청계천을 말해주는 무슨 박물관 같다.

 

  청계천은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이전부터 흐르고 있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자연과 어우러진 청계천은 지금 서울 도심의 쉼터 역할을 한다.

 

  2005년 현재의 청계천으로 복원된 후 22개의 독특한 모양새를 갖춘 다리와 각각의 테마를 지닌 채 조성된 청계천변은 그야말로 볼 것 많고, 즐길 것도 많다. 정릉천이 청계천과 합류하는 청계천박물관이 있는 지점에서 상류로 거슬러 오르며 걷기 시작했다. 먼저 만나는 곳이 두물다리였다.

 

 

 

▲청계천 산책길은 국토교통부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에 선정되었다.

 

 

 

두물다리와 청혼의 벽

 

  두물다리는 정릉천이 청계천과 만나는 데서 얻은 이름이며, 다리의 모양도 두 개의 물이 만나는 형상을 이뤘다. 두물다리 위쪽 북단에 자리 잡은 ‘청혼의 벽’은 두 개의 물이 합류하는 곳으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사전 신청을 받아 개인이 제작한 영상이나 메시지 등을 대형 스크린에 띄워 청혼을 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이다. 매주 수~토요일 오후 18시부터 22시까지 운영하며, 회당 20분 이내로 사용할 수 있다.

 

 

 

 

청계천의 과거 품은 ‘존치교각’

 

  두물머리를 지나면 무학교다. 청계로와 무학로를 잇는 청계9가 교차로 지점에 있는 무학교는 무학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무학로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왕십리 일대는 학이 많이 날아들어 예부터 '춤추는 학'을 뜻하는 ‘무학(舞鶴)’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해 왔다. ‘무학봉’이 그렇고, ‘무학여고’가 있다.

 

  무학교 앞 하천 중간에는 어쩌면 흉물스럽기도 한 낡은 콘크리트 기둥이 세 개나 우뚝 서있다. 이름하여 존치교각이다. 이것의 정체는 바로 청계 고가도로의 교각으로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 일부분을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이다.

 

  이 기둥은 그 모양이 멋이 있거나 아름답지는 않아 청계천의 풍경과는 조화를 이루지도 못하는 것 같으나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생생한 역사의 산물로 남겨져 그 의미를 얻고 있다.

 

 

 

 

주변의 버들습지

 

  또한 무학교 일대는 버들습지가 많다. 버들습지는 도시인에게 자연 생태학습장 구실을 한다. 어류, 양서류, 청둥오리를 비롯해 백로와 흰뺨검둥오리 등 조류와 갯버들, 매자기, 꽃창포 같은 수생식물이 살고 있다. 신답철교에서 황학교까지 이렇게 조성된 습지는 무려 10여 개에 이른다.

 

 

 

 

터널 분수와 물고기와 물의 형상을 한 ‘리듬벽천’

 

  무학교에서 발길을 옮기면 비우당교에 도착한다. 하정로와 마장로 19길을 남북으로 잇는다. 동대문구 신설동과 성동구 상왕십리동 사이에 있다.

 

  종로구 숭인동에 조선 초기 정승을 지낸 하정(夏亭) 류관(柳寬 1346-1433년)이 장마철에 우산을 펴고 비를 근근이 가리며 살 정도로 청빈하였는데, 조선 후기 실학자인 지봉 (芝峰) 이수광(李晬光)이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 당호를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하여 청빈한 삶의 중요성을 알렸다고 한다. 이에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청빈의 정신을 살려 다리 이름을 ‘비우당교’라고 하였다.

 

  200m 거리에 비우당 터널분수가 있다. 폭이 50m인 비우당 터널분수는 5m 높이의 석축 위에서 총 42개의 노즐에서 물을 분사하며, 물줄기의 분사 거리는 16m에 이른다. 분사된 물은 청계천 변에 조성된 산책로 위를 넘어 포물선을 그리면서 청계천으로 떨어지도록 설계하여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선사한다.

 

  또, 비우당교와 황학교 사이에 설치된 리듬벽천은 높이 5m, 폭 20t의 대리석 벽면을 따라 하루 4,700톤의 유지용수가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벽에 점점이 박힌 까만 대리석은 물고기가 수면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저녁이면 4색 조명 88개가 리듬벽천을 비추고 마치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리듬벽천과 비우당교 하류의 터널분수 일대는 청계천 8경 중에서도 유난히 물을 이용한 것들이 많아 하늘 물터로 불린다. 봄철인 데다가 아직은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아 가동을 못하고 있어 아쉬웠다.

 

  수경시설과 함께 저수변에는 목재 데크를 설치하여 시민들이 이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벽천 앞에 설치된 돌 징검다리를 건너 청계천을 건너는 것도 시골 냇가를 건널 때의 운치를 자아내며, 어른들에게는 어린 시절 시골의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시민의 소망을 담은 소망의 벽(타일 벽화)

 

  비우당교를 지나 황학교로 간다. 황학교는 황학동에 자라잡은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으며 난계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황학교로 가는 길에는 서울 시민의 꿈이 담긴 소망의 벽이 나타난다. 개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 구간에 설치되어 있다. 성북천이 합류되기 직전 좌우 양쪽 옹벽에 시민 2만여 명이 각자의 소망을 담아 완성한 것이다.

 

  50m, 높이 2.2m의 이 조형물은 가로세로 각각 10cm의 자기질 타일 2만 개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타일에는 참가자들의 소원과 희망이 저마다의 솜씨로 그려져 있다. 소망의 벽에는 만남과 화합,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서울 시민, 이북5도민, 재외동포 등의 작품들도 설치됐다. 부모, 친구, 애인에게 하고 싶은 말, 장래 희망, 자녀들에게 바라는 아버지의 당부 등 갖가지 소원이 어설프지만, 정감 있는 그림으로 담겨 있어 마치 어린이집에 놀러 온 느낌을 준다. 황학교에서는 주방용품으로 가득한 주방거리가 바로 이어진다.

 

 

 

 

인근의 황학동 벼룩시장과 풍물시장

 

  비우당교를 지나면 황학교에 이른다. 황학동에 위치하여 그대로 이름이 되었으며, 난계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인근의 황학동 벼룩시장은 서울의 명소로 꼽힌다. 청계천 복원공사로 터전을 잃은 황학동 노점상들은 동대문운동장에 풍물시장을 개장했다.

 

  이전에는 ‘황학동벼룩시장’이라는 이름에서 2003년 ‘동대문 풍물벼룩시장’이라는 명칭으로 이전했다. 이후 ‘서울풍물시장’이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대한민국의 명소로 태어났다.

 

  서울풍물시장은 골동품, 근현대사 상품, 우리 고유의 옛것에부터 생활잡화, 가방, 구제 의류까지 구매할 수 있는 다양한 상품이 있고, 전통생활용품 전시장 등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한 공간에 함께 있어 편리하고 재미있다. 특히 지난 2015년도에는 풍물시장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다산교는 다산로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지봉로와 다산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의 호인 ‘다산’에서 따온 것으로 다산로가 지나는 데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고, 청계천 복원하면서 새로 지은 다리이다

 

 

 

영도교에 얽힌 사연

 

  소망의 벽을 지나 만나는 영도교는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이다. 청계천7가와 8가 중간, 즉 황학동에서 숭인동 숭신초등학교와 동묘로 나가는 교차로에 있는 다리이다.

 

  영도교는 ‘이별의 다리’로 불린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갈 때 단종비 정순왕후가 이 다리까지 배웅 나와 이별하였는데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였다고 하여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렀다. 성종 때 이 다리를 보수하여 한자명으로 永渡橋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미동(永尾洞)에서 내려오는 하천 끝에 놓인 다리라는 의미와 창신동에 있던 영미사(永尾寺) 승려들이 다리를 가설하였다고 하여 영미교 혹은 영미다리라고도 불렀다.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리의 석물을 궁궐에 쓰는 석재로 징발함에 따라 나무다리로 바뀌었다가 1933년 헐고 콘크리트로 교체했다.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새로 영도교가 가설되었다.

 

  이곳에서 가까운 숭인동에는 주말에 장이 서면 도로가 발 디리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또,  삼국지 장수 관우를 모신 사당인 동묘공원이 있다. 중국의 사당 양식대로 화려하게 지어져 어딘지 모르게 우리 궁궐과 다른 맛이 있다.

 

 

 

 

옛 빨래터 재현, 옛 서민 삶의 터전

 

  영도교를 지나면 다산교에 다다르기 전에 빨래터가 있다. 한양 천도 후 조선 왕조는 청계천으로 인한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치수 사업의 하나인 개천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청계천은 도성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터전이었다. 아낙네들에게는 빨래터이자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로 활용되기도 했다.

 

  옛날의 빨래터를 재현한 이 빨래터는 옛 아낙네의 애환이 담겨 있고, 어른들에게는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세탁기가 일반화된 오늘날에 빨래터는 낯설면서도 아련한 장소인 셈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빨래터에서는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빨래터 위에는 천안 능수버들이 희망이 넘치는 잎을 파랗게 틔우고 있다.   

 

 

 

 

맑은내다리, 주변 패션파운 즐비

 

  빨래터에서 다산교를 지나면 ‘맑은내다리’다. 동대문구 창신동과 청계천 7가 신당동 사이에 있다. 인도 전용 다리로,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꿔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명칭으로 결정했다.

 

  맑은내다리는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꾼 이름이다. 나비의 힘찬 비상을 아치구조와 크로스 케이블로 조화시켜 힘찬 도약을 연출함으로써 패션 중심의 상징성을 부여하였다.

 

  이 일대는 청평화 상가, 동평화 상가, 신평화 패션타운, 동대문 신발도매 상가, 역사 깊은 동대문종합시장 등이 줄을 잇고 있다. 갖가지 의류와 신발과 장신구를 저렴한 가격에 골라 살 수 있는 쇼핑몰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색동벽, 한국의 빛깔, 숨결, 향기를 담다.

 

  맑은내다리를 지나 만나는 색동벽은 동대문 앞 오간수교 하류 북쪽 산책로변 옹벽에 있다. 색동작가 이규한 씨가 한국의 빛깔, 숨결, 영혼을 담아 18m, 세로 1.5m 크기로 제작한 것이다.

 

  색동의 파랑은 하늘, 빨강은 땅, 노랑은 인간을 상징한다. 그래서 색동은 하늘과 땅, 인간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이렇듯 색동의 진정한 아름다운 미감은 개성과 조화로 이루어진다. 이들 색깔은 다른 색과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색동의 빛을 낸다. 제각각 개성이 넘치는 인간이 모여 사는 인생살이와 비슷하다.

 

 

 

 

오수교, 오간수문

 

  색동벽을 지나면 오간수교에 닿는다. 오간수교(五間水橋)는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 즉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에 있던 오간수문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율곡로와 장충단로를 잇는다.

 

  오간수문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초기 한양도성을 수축할 때 물길을 고려하며 성벽 아래 수문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간수문은 크기가 5척이나 되었으며, 각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함과 동시에 외부에서 이 수문을 통해 함부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명종 때의 의적(義賊)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오간수문을 통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오간수문은 외부 사람들이 도성을 몰래 드나들 때 이용하던 주요 통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영조어필과 준천가, 준천도

 

  오간수교 아래에는 북쪽 벽면에는 1760년 영조가 개천 준설에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내린 ‘영조어필(英祖御筆)’과 조선 시대 문신 번암 채재공이 1773년 청계천 석축 공사 완공 후 청계천 준설 공사에 대한 영조의 공덕을 찬양한 ‘준천가(濬川歌)’가 새겨져 있다.

 

  영조 어필 “濬川功訖 卿等竭誠 予聞光武 有志意成”(준설 역사를 끝마친 것은 경들이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내가 듣건대 후한 한무제가 말하기를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

 

“…육칠월 도성에 장마라도 들면/ 땅 위의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네./ 조정대신들 의론이 분분할 때/ 성군의 결단은 명쾌하고 빠뜨림이 없었네./ 국고재정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장정들 앞다투어 떨쳐나섰네./ 임금님 납시어 살피심에 피로를 모르는데/ 물은 옛길 따라 어찌 그리 편하게 흐르는가./ 땅 기운도 막힘없이 소통이 잘 되네….” (채재공의 "준천가"의 일부)

 

  일부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준설 작업을 단행한 영조의 결단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오간수교 남쪽 벽면에는 1760년 영조가 오간수문 위에서 개천 준설의 역사(役事)를 지켜보는 조선 시대 그림 ‘준천도’와 1900년께 촬영된 오간수문 사진을 도자에 전사한 그림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남쪽 벽면에는 벽화 2점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이곳은 밤에 더욱 아름답다. 수조 바닥에 설치된 조명이 은은한 불빛으로 퍼져 나와 수조 바닥과 오간수문을 비춘다.

 

 

 

고사 분수, 색색 조명의 물줄기 쇼

 

  오간수교 상류의 평화시장 앞에는 고사 분수가 있다. 높이 10m, 폭 22m 크기로 색색의 조명을 받아 다양하고 환상적인 물줄기를 뿜어 올린다.

 

  밤이면 65개의 노즐(구멍)에서 뿜어 나오는 물이 빨강 노랑 파랑 하양 등 발광다이오드(LED) 조명과 어우러져 화려한 색동저고리를 연상케 한다. 조명과 합쳐진 환상적인 물줄기 쇼는 산책 나온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건너편에는 수변 무대가 자리 잡고 있어서 공연을 즐기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이들 작품들은 복원된 청계천이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형상화했다. 가동되지 않은 시간이어서 사진만 찍고 상류로 올라간다.

 

 

 

 

현대 미술가 5인이 꾸민 ‘문화의 벽’

 

  고사분수에 이어 만나는 것은 북쪽 옹벽에 설치한 '문화의 벽'이다. '문화의 벽'은 `미래로 가는 길'을 주제로 현대 미술가 5명이 참여해 만든 대형 도자 벽화 작품이다.

 

  ‘미래로 가는 길’(자연, 환경)을 주제로 한 ‘문화의 벽’은 가로 10m, 세로 2.5m 크기의 벽화로서, 당시 서울시립대 전갑배 교수의 ‘자연+인간+환경’, 한국예술종합학교 배진환 교수의 ‘시각의 미로’, 서울대 장수홍 교수의 ‘별’, 서울대 백명진 교수의 ‘중생’, 이화여대 강석영 교수의 ‘생성-빛’을 담았다.

 

  ‘색동벽’과 아울러 청계천에 문화의 향기를 더한다. 청계 수변에서 현대 미술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버들다리, 나래교 주변 대형 쇼핑몰

 

  오간수교를 지나면 버들다리가 나온다. 청계천에 자라는 버들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이 다리 근처에서 분신하여 노동권 보장에 헌신한 전태일을 기리기 위하여 전태일교라는 명칭을 병용하고 있다. 

 

  그리고 평화시장 앞에는 나래교가 있다. 나비의 힘찬 날개짓을 형상화하여 동대문 의류 상권이 비상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맑은내다리~오간수교~버들다리~나래교로 이어지는 이 일대는 두산타워, 밀리오레, 평화시장, 동대문종합시장 등 대형 쇼핑몰이 즐비해 24시간 활기에 넘친다. 특히 야간에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패션의 거리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한다.

 

 

 

 

마전교, 종로5가와 중구 방산동을 잇다.

 

  나래교를 지나면 마전교가 나온다. 마전교는 중구 방산동과 종로5가 사이 현 방산시장 앞 청계천(청계천 5가)에 놓여 있는 다리이다. 동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영조 이후에 우마(牛馬)를 팔고사는 마진(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마전교라고 불렀고 속칭 소다리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또, 다리 옆의 마전이 주로 낮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午橋 또는 오굣다리라고도 불렀다.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새로 마전교가 가설되었다.

 

 

 

 

새벽다리와 광장시장

 

  마전교를 지나면 새벽다리를 만난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2005년 9월 준공된 새벽다리는 종로구 예지동과 중구 주교동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옛 재래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천막의 이미지를 표현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과 향수를 연출하였다. 이른 새벽에 새벽시장에서 전국에 보낼 물건을 위해 몰려드는 곳이기에 ‘새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청계천을 걷다가 출출하다 싶으면 인근의 광장시장으로 가보자. 광장시장의 전신인 종로4가와 예지동 일대에 자리 잡은 배오개(이현=梨峴) 시장은 조선 후기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손꼽혔다.

 

  지금의 광장시장은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 최초의 상설시장답게 사람들로 붐빈다. 특히 광장시장은 육회와 빈대떡 등의 먹거리가 유명하여 외국인들의 필수관광코스로 꼽힌다. 이곳의 마약김밥으로 불리는 꼬마김밥은 광장시장이 발상지이다. 마약김밥은 꼬마김밥에 겨자 소스를 찍어먹는 김밥이다.

 

 

 

 

배오개다리

 

  새벽다리를 지나면 배오개다리가 반긴다. 배오개다리는 종로4가와 을지로4가 교차로를 연결하는 청계천에 놓인 다리이다. 창경궁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다리 이름은 현 종로4가 네거리에 배오개(梨峴)라는 고개가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배오개다리 형상은 배오개길을 넘는 사람들의 만남을 상징화한 것이라고 한다.

 

 

 

 

세운교,  세운상가. 대림상가로 연결

 

  배오개다리를 지나면 세운교이다. 세운교는 종로구 장사동 182번지와 중구 산림동 200번지 사이 청계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옆의 세운상가와 연결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세운상가에 조명가게가 많아 이를 특성화하여 다리에 빛을 표현하였다. 북쪽으로는 세운전자 상가를 거쳐 종묘와 통하고, 남쪽으로는 대림상가, 진양상가로 이어진다.

 

 

 

 

관수교, 종로구 관수동과 중구 수표동 사이

 

  새운교를 지나면  관수교를 만난다. 관수교는 종로구 관수동과 중구 수표동 사이, 돈화문로와 충무로를 남북으로 잇는 다리이다. 다리 이름은 인근의 동명인 관수동에서 유래되었다. ‘관수’란 수위를 관찰한다는 의미며, 옛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천이 복개될 때 다리가 없어졌다가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전통 한옥의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 형태로 새로 건설하였다.

 

 

 

 

수표교, 임시 목재다리

 

  관수교 위쪽에 있는 것이 수표교이다. 청계천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에 옮겨진 옛 수표교를 옮길 자리에 도보를 위해 임시로 지은 목재다리다. 2005년 청계천 복원 공사 때 서울특별시에서 장충단공원에 있던 수표교를 원 위치에 옮겨 지으려 했으나 새 청계천의 길이와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대신 본래 자리에는 수표교를 본 딴 임시 다리를 놓았다. 이름은 그대로 수표교이다. 복원에 성공했으면 몰라도, 복원에 실패하여 15년이 넘도록 임시 수표교를 쓰고 있는 실정이라 수표로 직통으로 연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원래 수표교는 마전교라는 명칭으로 세종 2년(1420)에 개천에 놓은 다리였다. 다리 주변에는 우마시전이 있어서 붙어진 이름이다. 청계천에 수표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1441년(세종 23년) 나라에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들자 세종은 정확한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인 수표(水標)를 개발하고 마전교 서쪽 중앙에 세웠다.

 

  수표는 하천이나 호수 등의 수위를 재는 측량 기구로 청계천 마전교에 설치할 당시에는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 뒤로 마전교는 석교로 바뀌고 수표교(水標橋)라 불렸다.

 

  다리의 석주에는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10척까지 눈금을 새기고, ‘庚辰地平(경진지평)’ 글을 새겨 수준(水準)으로 삼았고, ‘丁亥改造(정해개조)’·‘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등의 글씨가 남아 있어 여러 차례 수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종로구 관수동 20번지와 중구 수표동 40번지 사이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해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현재 임시로 설치된 청계천 수표교 근처에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이 우뚝 서있다.

 

 

 

 

삼일교,  ‘불·꽃길벽화’와 '삼각동천 벽천'

 

  수표교를 지나면 삼일교다. 종로구 관철동과 중구 장교동 사이, 청계천 삼일로에 있는 이 다리는 삼일대로를 남북으로 잇기 때문에 ‘삼일교’라고 이름 붙였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로 이름을 ‘삼일로’라 하였고, 다리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다리 인근의 인사동과 명동성당 등을 연계한 근대 건축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

 

  삼일교 하부 벽면에는 한화가 조성한 ‘불·꽃길벽화’가 설치되어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남쪽 벽면에 설치된 삼각동천 벽천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세계 최대의 도자 벽화 ‘정조대왕능행반차도’

 

  삼일교에서 장통교를 향해 가는 길 북측 옹벽에 ‘정조대왕능행반차도’가 설치되어 있다. 이 벽화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인 김홍도의 그림인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를 도자로 재현한 것이다.

 

  조선 제22대 정조 대왕이 1792년 윤2월에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모친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화성(수원)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의전 행렬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 ‘정조대왕능행반차도’다. 이 그림에는 1700여 명의 인물과 800여 필의 말이 등장한다.

 

  이 도자 벽화는 길이는 무려 192m로 가로, 세로 30cm의 도자기 타일을 무려 5,120장을 사용해 만든 세계 최대 규모의 벽화로 알려져 있다. 왕조의 위엄과 질서를 장엄하게 표현하면서도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인물묘사가 돋보인다.

 

 

 

 

장통교, 젊음의 거리와 연결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종로구 관철동과 중구 수하동 사이 청계천에 다리를 만들고 옛 이름을 따서 장통교라고 하였다. 도보 전용 다리로 조선 시대의 장통교를 계승했으나 제대로 복원되지는 않았다.

 

  본래 장통교는 종로구 관철동과 중구 장교동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였다. 근방이 조선시대 장통방이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이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고 하여 장창교(長倉橋), 장찻골다리, 줄여서 장교(長橋)라고도 불렀다.

 

  다리 서쪽 기둥에 ‘辛未改造’와 ‘己亥改造’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차례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리에는 교각이 없었고, 1929년 홍수로 인해 붕괴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하였다. 지금 장통교 북쪽에는 젊음의 거리가, 남쪽에는 한빛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광교, 종로1가와 을지로 1가 연결

 

  장통교를 지나 ‘정조대왕능행반차도’ 벽화가 끝나면 곧 광교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외국인 듯한 한쌍의 남녀가 천변에 앉자 봄볕을 즐기고 있다. 광교는 종로1가와 을지로1가로 연결하는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의 청계천 위에 놓인 다리이다.

 

  조선 시대 광통방에 자리 잡고 있어서 광통교라 하였으며, 줄여서 광교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 약 12m에 폭이 15m로, 길이에 비해 폭이 넓은 다리였다. 조선 초 도성을 건설할 때 흙으로 다리를 놓았으며, 태종 10년(1410) 큰비로 다리가 유실되어 석교로 만들었다.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다리는 도로 밑에 묻히게 되었다가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광통교에 놓여진 석물인 신장석과 우석(隅石, 주춧돌) 등에 새겨진 세련되고 정교한 조각은 당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

 

 

 

광통교, 조선 시대 첫 도성 안 돌다리

 

  광교를 지나면 광통교에 이른다. 조선 3대 왕인 태종 때 세워진 광통교는 조선 시대 최초로 도성 안에 들어선 돌다리이자 대표적인 청계천 다리에 해당한다. 가장 큰 돌다리여서 대광통교라고도 불렸다.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밀집한 상업활동의 중심지로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원래는 지금의 광교 위치에 있었으나 원래의 위치보다 150m 상류인 현재의 위치(서린동)로 이전했다.

 

  태조 때 토교(土橋)로 축조하였던 것인데, 1410년(태종 10)에 홍수로 파괴되자 다시 석교(石橋)로 개축하였다. 다리 건설에 사용되었던 석재는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의 묘인 정릉의 천장(遷葬)으로 봉토하려던 12개의 석각신장(石刻神將)을 뽑아 이용하였다고 한다.

 

  광통교는 1910년 종로~남대문 전차선로 복선화 공사로 도로 밑에 묻힌 지 95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되었다. 매우 정교한 구름무늬와 당초(唐草)무늬, 그리고 한가운데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에 관을 쓴 신장상(神將像)을 돋을새김한 돌들이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여전히 견고한 자태를 보여준다.

 

 

 

 

모전교, 무교동과 연결

 

  광통교를 지나면 모전교에 이른다. 모전교는 남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해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창동천 위에 있던 다리로 ‘무교(武橋)’라고도 불렀다.

 

  다리 앞에는 조선 시대 무기와 군수물자를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군기시가 있었는데 오늘날 중구 태평로 1가 서울신문사와 시청 일대에 해당한다. 무교동(武橋洞)이라는 지명도 이 다리에서 유래했다.

 

  모전교에서부터 팔석담까지 지금 석가탄생을 기념하는 곱게 채색한 연등과 불상이 개울 중간에 설치되어 아름다운 자태를 뽑낸다.

 

 

 

폭포와 팔석담

 

  모전교를 지나면 곧바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만나게 된다. 청계천 광장 바로 아래 2,106평에 설치된 2단 폭포는 하루 6만5000t의 물을 쏟아내며 빛과 물이 만난다.

 

  촛불 형태 분수와 원형의 슈터 분수, 발광소자(LED) 조명과 어우러진 폭포는 밤이 되면 형형색색의 빛과 물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야경을 연출한다.폭포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모인 곳이 팔석담(八石潭)이다. 경기 일동석, 충청 천안석, 전라 고흥석을 비롯해 함경, 평안, 황해의 돌까지 망라한 ‘조선 8도석’이 물길 바닥을 장식했다.

 

  이 8개의 돌은 만남, 화합, 통합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폭포 주변 돌계단에는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쏟아져 나온 인근 직장인들과 시민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치솟는 분수와 폭포를 보며 탄성을 지르고, 흐르는 물소리를 감상하고 있다. 그중에는 점심식사 대용으로 샐러드와 햄버거, 커피를 들고나와 봄을 만끽하는 모습도 보였다.

 

 

 

 

청계천 광장 도착, 청계천의 시작점

 

  폭포 옆으로 비켜서 오르면, 청계천의 하이라이트 청계광장이다. 서울의 서북쪽 북악산, 인왕산 사이에서 발원된 물줄기가 이곳에 모여 청계천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흐르기 시작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시작된 청계천의 물줄기는 15리 물길을 따라 한강으로까지 흐른다. 청계광장의 바닥은 전통 공예인 보자기의 모양을 본뜬 것으로, 조각조각 각기 다른 모양새가 흥미롭다.

 

  또, 청계천을 133분의 1 크기로 축소한 60m의 ‘청계 미니어처’도 설치돼 있으며, 밤이 되면 각 다리가 놓인 지점에 조명이 들어와 위치를 표시한다. 광장에 설된 조형물 스프링(Spring)은 미국의 세계적 팝아트작가인 클래스올덴버그(ClaesOldenburg)와 코샤반브르군 부부의 작품이다. 청계천 복원의 상징으로 2006년 청계광장에 설치됐다. 복원된 청계천의 샘솟는 모양과 서울의 발전을 상징한다.

 

  청계천의 시작점이기도 한 청계광장은 동아일보 빌딩과 파이낸스 빌딩의 경호를 받는 중심 위치에 들어 서 있어 발전하는 수도 서울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탐방을 마치면서

 

  천천히 걸어 오르며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사진도 찍었다. 청계천 하류 고산자교 부분을 제외하고 약 5.84km 구간의 대부분을 탐방한 셈이다. 점심시간 포함 4시간 남짓 걸렸다.

 

  청계천 광장에서 50미터 가량 떨어진 천변에는 지난 2005년 청계천 복원사업이 끝난 날 세운 기념비문이 붙어있다. `청계천 새물맞이에 부쳐`란 제하의 비문은 청계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 …오늘의 결실을 맺기까지 반세기의 기다림이 있었고, 4200여의 만남이 있었고, 끝없는 대화로 지새운 숱한 밤이 있었으니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면 어찌 소회가 없을까만 기쁨의 소식이 하늘에 닿고 땅에 미치는지라 우리 모두가 덩실덩실 춤출 수 있는 것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22만 청계천 상인 때문이오, 희생을 감내했던 노점상 때문이오, 땀과 눈물로 보람을 일궈낸 기업과 근로자 때문이오, 헌신을 다해준 공직자 때문이오, 끝까지 공감하고 지지해준 시민단체 때문이오, … 이제 청계천에는 맑은 물과 눈부신 햇살, 시원한 바람, 갯버들과 창포가 되돌아 올 것이며, 수변을 따라 전통놀이가 신명을 더하고, 아낙이 빨래하고, 아이가 연날리던 고전의 낭만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청계천 새물맞이에 부쳐- 이명박>

 

 

 

  그렇다. 그의 결단과 지도력은 지금 빛을 발하고 있다.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걸으며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청계천이 역사와 문화와 생활이 숨 쉬는 곳이라는 점이다.

 

  특색 있는 22개 교각과 각종 조형물에서는 역사와 예술이 살아 있어서 예술과 문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그런가 하면, 물속으로는 갖가지 버들치, 잉어 등 물고기가 유영하고, 먹이를 찾아든 흰뺨검둥오리, 중대백로, 황조롱이 등이 보이는가 하면, 천변 돌멩이 사이로 강아지풀, 창포, 억새를 비롯한 많은 풀과 꽃나무 버드나무 잎들이 바람을 타고 손짓했다. 양쪽 벽면을 타고 줄기차게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은 담을 넘고 있었다.

 

  자연이 살아 있었다.그리고 중요한 것은, 역사와 문화·자연을 직접 느끼고 쉼(휴식)을 얻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는 것,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나 역시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몰려나온 시민들로 붐비는 청계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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