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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석파정(石坡亭), 인왕산 북동쪽 바위산에 숨은 '도심 속 비밀정원'

by 혜강(惠江) 2022. 1. 19.

 

석파정(石坡亭)

 

인왕산 북동쪽 바위산에 숨은 '도심 속 비밀정원'

 

 

글·사진 남상학

 

 

 

 

 

  서울에는 별서와 정자가 많다. 조선 왕조의 도읍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도가, 명망가, 풍류 문사들이 600년을 두고 줄곧 이어졌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많던 서울의 별서와 정자는 원래 모습과 크게 달라진 몇몇을 제외하곤 세월의 힘 앞에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그런 가운데 변하긴 했어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별서와 정자가 조선 시대 지은 석파정(石坡亭)이다. 현재 석파정은 1974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석파정은 한성의 경승지 중 하나로 빼어난 산수와 계곡을 자랑하는 종로구 부암동에 있다. 경복궁역에서 세검정 가는 길로 자하문 고개를 넘으면 바로 좌측에 있다. 이 일대는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인근에 안평대군 이용(李瑢) 집터인 무계정사(武溪精舍)가 있고, 윤치호(尹致昊)의 별장인 부암정도 멀지 않다.

 

 

 

  인왕산 북동쪽의 바위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석파정은 조선 후기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세도가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조영하여 1837~58년에 걸쳐 별장으로 사용한 근대 유적이다. 김흥근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핵심 인물이다.

 

 

 

 

  개울 옆 바위에 ‘물속에 깃들어 구름으로 발을 건 바위’라는 뜻의 ‘소수운련암(巢水雲簾岩)’이라는 글씨를 권상하(權尙夏)가 새겼다. 김홍근은 여기에 별서를 세우고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집 옆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그 뒤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1863년을 전후해 이를 인수하여 별서(別墅)로 사용하게 되었다. 별서는 별장의 일종인데 잠깐 쉬었다 가는 별장과 달리 비교적 오랫동안 집 대신 거주하는 공간을 뜻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석파정을 소유하게 된 과정이 흥미롭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 집을 오랫동안 탐내어 김흥근에게 팔라고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가 고종이 즉위하자 임금이자 자기 아들인 고종을 행차케 하여 하룻밤을 묶었다.

 

  성리학 예법에 임금이 묵은 곳을 신하가 계속하여 살 수는 없었기에 결국 김흥근이 이하응에게 집을 넘겼다고 한다. 왕이 아니면서 왕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국태공(國太公)이란 최고의 존호를 받은 사람이었으니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난을 치는 등 이곳을 예술적 활동 장소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종의 행전이나 행궁 등 임시거처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별서의 주변 풍경이 거대하고 위엄 있는 바위들로 둘러싸인 풍경에 감탄하여 자신의 호(號)마저 ’석파(石坡)’로 바꿨고, 이곳을 ‘석파정’이라고 부르며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그만큼 석파정은 수려한 건축뿐 아니라 빼어난 산수와 계곡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본래 7채의 산림채와 육모정 등 다양한 건축물로 구성된 흥선대원군의 별서는 세월과 함께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 안채, 사랑채, 별채와 정자로 4개 동만 남아있다. 당대 별서 등과는 다르게, 안채 이외에 별채가 있고 이것을 높은 곳에 놓은 구성, 별채로 진입하는 협문, 과거에 있었던 꽃담 등은 왕이 묵던 곳으로서 손색없게 하려는 의도로 읽혀진다.

 

 

 

  길에서 들어걸 수 있도록 만든,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간판을 단 석파정 정문은 따로 있지만, 현재 석파정 관람을 위해서는 서울미술관 3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마도 미술관과 연계하여 관람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미술관 3층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오면,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석파랑 전체 모습의 윤곽이 드러난다. 높은 담에 둘러싸인 사랑채와 안채 그 뒤 높은 자리에 있는 별채가 비교적 단조롭지만 고풍스럽다.

 

  먼저, 입구에 새워놓은 석파정 야외 안내도와 ‘도심 속 비밀정원’이라는 안내판을 읽어보고, 관람코스를 따라간다. 문인석을 지나 우측 언덕으로 방향을 잡는다. 맨 위쪽에 자리잡은 별채로 가는 길이다. 미술관의 옥상에 설치한 조형물 뒤로 북한산이 가깝다. 석등을 지나 협문을 통과하면 별채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별채는 안채 뒤쪽 별서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고종이 방문하였을 때 거처했다는 방도 별채에 있다. 그 방을 들여다보니 왕이 사용했을 법한 침구도 깔려 있다. 별채에 앉으면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계곡에 안긴 듯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별채를 보고서 서쪽 문으로 나오면 다시 정원이다. 잘 단장된 정원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거북바위와 거북바위 암벽에 새긴 ‘삼계동(三溪洞)’ 각자가 선명한 글자가 선명하다. 김홍근은 별서를 세우고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바로 그 글자다.

 

 

 

  그 옆의 건물이 사랑채다. 담으로 둘러싸인 안채와 떨어져 담 밖에 따로 지었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주로 머물며 외부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별서의 중심부가 되었던 공간이다.

 

  서쪽 사랑채는 'ㄱ'자 한옥 현대루(玄對樓)가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왼쪽 끝엔 누마루 1칸이 돌출되어 있다. ㄱ자로 꺾어 지은 사랑채의 앞에는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소나무(천세송)가 있다.

 

 

 

 

  ‘천세송’은 천년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유구한 세월 동안 석파정과 운명을 함께 해 왔다.  수령 약 650년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는 현재 서울시 지정 보호수 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나무 그늘에는 거대한 맷돌 두 개가 놓여 있는데그 앞에 돌의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찻잔을 놓는 용도로 사용된 것처럼 보인다.

 

 

 

 

  옆으로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 구조의 안채가 있다. 안마당에서 보면 동서 5칸, 남북 4칸으로 제법 규모 있는 집이다. 사랑채와 안채의 담 사이로 누대로 올라가는 홍예문이 있다. 누대에는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구경하는 누대”라는 뜻의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러나 홍예문이 잠겨있어서 별채로 올라갈 수가 없다.

 

 

 

  석파정의 가장 높은 곳에 너럭바위가 있다. 그 형상이 코끼리를 닮았다 하여 ‘코끼리바위’로도 불린다. 또한, 아이가 없는 노부부가 이 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어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소원바위’라고도 불린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바위는 인왕산이 가진 웅장함을 잘 보여준다.

 

 

 

  별채를 둘러보고 별서 앞의 개울로 발길을 옮겨본다. 개울 옆 바위에 권상하(權尙夏)가 새겼다는 ‘소수운련암(巢水雲簾岩)’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물속에 깃들어 구름으로 발을 건 바위’라는 뜻이다. 얼마나 계곡의 운치가 멋스러웠으면 이렇게 표현했을까 싶다.

 

 

 

  계곡을 건너 숲길을 따라가면 정자가 나타난다. 석파정이다.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라고도 불린다.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숲속에 들어앉은 석파정은 전통적인 한국의 정자와 달리 바닥을 화강암으로 마감하고 기둥에 꾸밈벽을 달고 지붕 역시 청나라풍으로 꾸며 이국적이다. 아마도 김흥근이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보았던 모습을 이곳에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계곡 아래쪽에는 숲속에서 신라 삼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2층 기단 위에 삼층으로 쌓아 올려 전형적인 통일 신라 시대 석탑의 모습이다. 완만한 경사와 부드러운 곡선에서 경쾌함이 느껴진다. 경주의 개인소유 경작지에서 수습해 현재의 모습으로 조립되었고, 2012년 현 위치로 이전 설치되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죽은 뒤 별서는 그의 후손인 이희(李喜), 이준(李埈), 이우(李堣) 등으로 석파정은 대략 50년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됐다. 한국전쟁 후에는 보육원·병원 등으로 쓰이다가 이후 개인소유가 되어 경매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였다.

 

  그간 석파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사랑채의 이건(移建)일 것이다. 원래 ‘三溪洞’이란 각자가 있는 바위 앞에 있던 집채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筌孫在馨)에 의해 1958년 세검정 삼거리 부근 그의 집 뒤뜰 바위 언덕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석파랑’이라는 음식점의 부속 채로 쓰이고 있다.

 

 

  현재 석파정은 2006년 의약품 유통업체인 유니온약품 그룹의 안병광 회장이 낙찰받아 석파정 입구에 사설 서울미술관을 개관하고 그가 평소 수집하던 이중섭의 그림들을 전시하면서 서울미술관이 석파정을 관리하고 있다.

 

 

  석파랑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서울미술관과 통합티켓을 사들이어, 미술관 3층을 통해서만 입장할 수 있다.

 

 

◎상세정보

 

►주소 :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11길 4-1 (부암동 201번지)

►관람 : 수~일 11:00~17:00 (입장 마감은 폐장 1시간 전까지)

►휴관 : 매주 월요일, 화요일

►입장료 : 성인 15,000원 / 학생 (초, 중, 고) 10.000원 / 어린이, 경로우대 9,000원

►주차 : 서울미술관 지하 1, 2층 이용 가능(미술관 관람 시 주차 무료)

대중교통

1) 경복궁역 하차 (지하철 3호선 3번 출구) → 지선 버스 승차(1020, 1711, 7016, 7018, 7022, 7212) → 자하문 터널 입구 하차

2) 광화문역 하차 (지하철 5호선 2, 3번 출구) → 지선 버스 승차 (1020, 1711, 7016, 7018) → 자하문 터널 입구 하차

*자가용 이용 : 경복궁역에서 세검정 삼거리(상명대학교) 방향, 자하문 터널 입구 좌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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