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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남해 유배문학관, 유배지에서 핀 찬란한 문학의 꽃

by 혜강(惠江) 2022. 3. 1.

 

남해유배문학관

 

유배지에서 핀 찬란한 문학의 꽃

 

 

글 남상학

 

 

 

 

 

  유배(流配)란 죄인을 귀양 보내는 것으로, 고려ㆍ조선 시대에 죄인을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내어 일정 기간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던 형벌이다.

 

  조선 시대 사림(士林)이 조정에 진출한 이후 당파가 형성되고, 정권을 잡는 당파가 바뀔 때마다 조정의 주요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유배를 갔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15~16세기는 관직에 있던 사람들 4명 가운데에 1명꼴로 유배 갔을 정도로 빈번했다.

 

  이와 같은 유배는 형벌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골치 아픈 현실의 당쟁에서 벗어나 학문에 정진하거나, 위대한 작품과 저서를 남기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은 담양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 유명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으며, 시조 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는 「오우가」,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또 서포 김만중은 유배 시절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을 지은 것을 들 수 있다.

 

 

 

 

  또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되어 수많은 저서를 지었는데 그 중 「목민심서」는 지방의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바른 도리를 설명한 책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조선 시대 선비들이 유배지에서 쓴 작품을 통칭해서 문학 장르와 관계없이 유배문학이라 일컫는다.

 

  조선 500년 동안 유배지로는 왕족이 주로 갔던 강화도를 제외하면, 지역적으로 삼수갑산과 같은 함경도, 평안도 국경 지역과 제주도, 경상남도의 거제도와 남해, 전라남도의 강진, 보길도, 진도, 흑산도, 추자도, 도초도 등 섬 지방이 자주 이용되었다.

 

그중에서 남해는 중앙으로부터 거리가 먼 섬이어서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180여 명에 이르는 유배객이 빈번하게 거쳐 간 곳이다.

 

  그런 특수성을 고려하여 남해군은 발 빠르게 유배와 유배문학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를 수집·전시하기 위해 2010년 11월 남해읍 남변리 일원 3만7천469㎡ 대지에 국내 최초로 남해유배문학관을 개관했다.

 

 

최초의 유배문학관

 

 

 

  문학관 앞에는 김만중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넓은 야외에는 행사마당, 유배문학비, 유배객이 살았던 초가, 십장생 조형물, 사씨남정기 이야기를 설명하는 패널, 남해의 바다를 형상화한 수변공원, 삼자 동산과 은행나무길, 산책로 등을 조성하여 놀이동산처럼 꾸몄다.

 

  지하 1층, 지상 1층(총면적 2,416㎡) 규모의 남해유배문학관은 향토 역사실, 유배 문학실, 유배체험실, 남해 유배 문학실 등 주제별 전시관과 체험장을 통해 유배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두보, 도스토옙스키 등 유배를 경험한 세계적인 인물에 대한 전시도 흥미를 끈다. 또 다목적실(강당), 유배문학연구실 등을 갖췄다.

 

  그리고, 2,600점 이상의 고문서, 고서적, 민속품 등을 소장함으로써 유배문학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조선 후기에 김만중이 지은 수필·시화평론집 『서포만필』을 그의 종손인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이 필사한 필사본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 103책 등이 있다.

 

 

 

 

1. 향토 역사실

 

  향토 역사실은 남해의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역사, 생활과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1/65 비율로 축소된 남해대교와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 팔만대장경 판각지였던 남해의 역사, 민요 직접 듣기 코너,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 전시, 그림자 감응을 통해 멸치를 잡는 체험 코너 등이 갖춰져 있다.

 

 

 

 

2. 유배문학실

 

  유배 문학실은 전 세계 유배의 역사와 문학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조선 시대 형벌과 대표적 유배지, 남해의 대표 유배문학 등을 소개한다. 유배객의 간절한 마음이 배어 있는 사친시(思親詩)를 비롯한 7편의 주옥같은 시를 자연의 소리와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조형물을 통해 조선 시대 형벌을 설명해 준다. 또 유배문학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3. 유배체험실

 

  유배체험실에는 관람객이 유배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유배지의 생활상을 통해 유배라는 절망적인 환경을 예술로 승화시킨 유배객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4D로 보면서 달구지를 타고 압송되는 체험을 할 수 있고, 자신이 직접 유배객이 되어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고 유배객과 대화하면서 전자 상소문을 쓸 수도 있다.

 

 

 

 

 

4. 남해유배실

 

 

 

 「구운몽」은 조선 숙종 때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선천 유배 시절에 지은 고대소설이다. 문체가 우아하고 묘사가 세밀하며 사상적 깊이까지 더해 유식한 독자층에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그 줄거리를 보면,

 

  “성진은 당나라 고승 육관대사의 제자 중 가장 총명하고 지혜로운 승려였다. 스승의 명으로 수부에 간 성진은 용왕이 대접하는 술을 마시고 어지러워 연화봉 아래서 낯을 씻다가 육관대사를 찾았던 팔선녀와 마주한다. 팔선녀와 수작하다 돌아온 뒤로 성진은 속세의 욕망이 일어 괴로워한다. 성진이 스승의 꾸짖음을 받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니 팔선녀도 잡혀 와 있다. 이들은 모두 인간계로 영솔된다. 그중 성진은 양소유라는 사내로 환생해 장수가 되고, 재상이 되고, 공훈을 세우고, 여덟 명의 여인과 생을 즐기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룻밤 꿈임을 깨닫는다.” (출전 : 세계문학전집 72)

 

 

 

 

  그동안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서인의 중심인물로 인현왕후 민씨(閔氏)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남해로 귀양 가 있을 때 지었다는 기록과 앞서 선천 유배설 등 분분하였으나, 『서포연보(西浦年譜)』를 발굴하면서 일단 선천 귀양 시기로 확실해졌으며, 그 완성은 남해 귀양시기로 추정된다.

 

  1687년 9월 평안북도 선천으로 귀양을 간 그는 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 부인의 생신을 맞아 비감한 마음에 어머니의 소일거리로 「구운몽」을 지어 보낸다. 이 해가 김만중의 나이 막 쉰을 한 해 넘긴 때였다. ‘서포’라는 그의 호도 이때 귀양 가서 지낸 곳의 지명에서 딴 것이다.

 

 

 

 

  서포는 다음 해인 1688년 11월에야 풀려나지만, 귀양 장소가 남해로 바뀌는 것뿐이었다. 만중은 이듬해 윤삼월에 남해 상주면 노도(櫓島)에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유배 기간에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집필하였다.

 

 

 

 

  남해에서 쓴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한림학사인 유연수의 부인 사씨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교씨를 첩으로 두는데 아들을 낳은 후 더 간악해진 교씨가 사씨를 모해하여 내쫓고 정실부인의 자리를 차지한다. 교씨의 모함으로 유한림이 유배되었다가 특사로 돌아오던 중 전후의 모의 사실을 들은 후 사부인을 만나 사죄하고 좌승상으로 승직하고 교씨를 살해해 원수를 갚는다. 후에 사부인은 내훈과 열내 전을 지어 후세에 길이 전한다. 이 작품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책봉한 사건에 대해 숙종을 깨닫게 하려고 쓴 '목적소설'이다.

 

 

 

  서포 김만중은 위의 소설 외에도 『서포만필』, 『서포집』, 『고시선』 등을 남기고, 남해에서 1692년 4월 30일, 쉰여섯 살을 일기로 영욕의 삶을 마친다.

 

  또한, 서포 김만중 외에도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자암 김구 선생이 13년간의 기나긴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4대 서예가로 불리는 자암 선생은 남해를 찬양하는 경기체가 「화전별곡」을 그의 귀양지에서 지었다.

 

  그리고 후송 유의양은 남해의 유적, 절경, 세시풍속 등을 기행문체로 쓴 『남해문견록』을 남기기도 했다. 남해는 이 외에도 주로 금산을 노래한 한시를 많이 남긴 남구만, 『남천잡록』의 저자 김용 등 많은 유배객이 다녀간 곳이다.

 

 

 

유배의 섬 남해 노도(櫓島)

 

  먼 거리를 달려 남해의 유배 문학관을 탐방했다면 남해군 상주면 노도를 찾아가 보자. 노도는 흔히 ‘문학의 섬’으로 불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1689년(숙종 15) 서포 김만중이 노도로 유배 와서 1692년(숙종 18) 56세의 나이로 유배 기간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집필하였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섬에는 김만중이 직접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과 시신을 잠시 묻었던 허묘(墟墓), 초옥이 있던 터가 남아있으며, 서포 김만중 유허비와 안내판 등이 설치되어 있고, 그의 생애와 문학작품을 전시하는 김만중 문학관 등이 있다.

 

  또한, 서포 김만중 외에도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자암(自庵) 김구(金絿, 1488년~1534년) 선생이 13년간의 기나긴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벽련마을 포구에서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배를 타고 약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권력도 부귀영화도 모두 빼앗긴 채 '유배'라는 백척간두에 선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을 꽃피웠던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불멸의 혼을 새롭게 느낄 좋은 기회였다.

 

 

 

 

◎상세정보

 

주소 : 경남 남해군 남해읍 남해대로 2745(남해읍 남변리 555)

전화 : 055-860-8888

관람 : 09:00~18:00

휴무 :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이면 다음날 휴관), 1월 1일, 설 당일

입장료 : 없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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