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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권정생 생가와 ‘권정생동화나라’ 문학관 탐방

by 혜강(惠江) 2022. 3. 6.

 

권정생 생가와 ‘권정생동화나라’ 문학관 탐방

 

가난한 어린이에게 사랑과 소망을 심어준 동화 할아버지

 

 

글 · 남상학

 

 

 

 

 

“내가 거름이 되어 별처럼 고운 꽃이 피어난다면 온몸을 녹여 네 살이 될게.”  -「강아지 똥」 중에서.

 

 

  아동문학가 권정생(權正生, 1937~2007년)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 경북 안동시 일직면 그의 채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과 종지기를 하던 교회, 그리고 ‘권정생 동화나라’ 문학관을 찾지로 했다.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2시간 남짓 걸려 남안동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빌뱅이 언덕에 도착했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5층 전탑(보물 제57호)이 있어 조탑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을 입구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조탑리는 그가 평생 글을 쓰며 보낸 동네다.

 

 

 

▲조탑리 마을의 벽화

 

 

 

  층층이 돌을 쌓고 황토를 발라 만든 돌담길이 먼저 맞이한다. 차 한 대 겨우 들어갈 마을 골목을 통과하면 길은 더욱 좁아지고, 조금 더 걸으면 길모퉁이에 그의 생가가 나온다.

 

  그의 생가를 찾아가면서 가난 속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그의 삶과 문학을 더듬어 본다.

 

 

 

 

권정생의 삶과 문학

 

  아동문학가 권정생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노동 징용으로 끌려간 아버지, 가난했던 어머니 사이에 난 5남 2녀 가운데 여섯째였다. 아명 경수(景守).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일본에서 여러 초등학교를 전전하다가 해방 직후인 1946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으나 빈곤과 6·25전쟁 등으로 곧 가족들과 헤어졌다.

 

  그는 대구, 김천, 상주 등 객지를 떠돌며 나무장수, 담배장수, 가게 점원 등 온갖 일을 하다가 폐결핵, 늑막염 등의 병을 얻어 195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고향으로 돌아왔다. 열아홉에 결핵에 걸려 생사를 오갔던 그는 동생 결혼에 짐이 안 되려 집을 나가 완전한 거지가 되었을 때, “바위 벼랑 위로/ 흘러가는 구름이/ 자꾸 눈앞을 어지럽힙니다./ 어머니/ 배가 고픕니다.”(시 「딸기밭」)에서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신장결핵, 방광결핵 등으로 전신에 결핵이 번져 생사를 넘나드는 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마을의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교회 종지기로 살며 희망의 빛을 보았다.

 

 

 

 

 

  교회 뒤 언덕에 지은 작은 흙집에서 살면서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써왔던 그는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에서 주는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강아지똥」은 세상 무엇이든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동화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생명이 자기희생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림책으로도 만들어져 아동뿐 아니라 유아와 부모들에게도 손꼽히는 그림책이 되었다.

 

 

 

▲조탑리 마을에 설치한 강아지 조형물

 

 

  하지만 평생 건강을 회복하지 못해 늘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펜을 놓지 않고, 197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아기양의 그림자 딸라이」가 가작 당선되었으며,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어 삶의 의미를 얻어 계속 집필을 이어갔다.

 

 「무명저고리와 엄마」는 일본의 침략과 6·25전쟁 중에 일곱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자식을 빼앗기고 잃는 어머니의 슬픔을 그린 단편이다.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게 하고, 한국 어머니들이 지닌 모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화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교회 뒤 언덕에 지은 작은 흙집에서 교회의 종지기로 살면서 완성한 작품들이다.

 

 

 

 

  동화 「강아지똥」을 읽고 찾아온 이오덕과는 1972년부터 평생지기가 되었다. 1973년 이오덕의 권유로 한국아동문학가협회에 가입하였고, 1987년 11월 이오덕 등과 대구·경북 민족문학회를 창립하고 고문을 맡았다. 그러면서도 평생 교회를 벗어나지 않고 아이들과 생활하며 동화 창작에 힘썼다.

 

  대표적인 장편으로는 1984년 출간한 「몽실언니」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6·25전쟁을 배경으로 어른보다 더 큰 고난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살아가는 몽실이의 이야기이자 모진 고난을 헤쳐나온 민족의 이야기이며, 남·북한군 양쪽을 민족이라는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평화의 메시지이다.

 

 

 

 

 『몽실언니』는 해방 이후 짧은 기간에 걸쳐 많은 독자를 확보한 작품이다. 내용의 분량과 문체로 미루어 볼 때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의 아동에서 성인까지 읽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1984년 초판이 나온 이래 50여만 부가 판매될 만큼 많이 읽혀진 베스트셀러로 한국 창작동화의 역사상 가장 많은 독자로부터 사랑 받은 작품이다. 초판 당시 곧바로 문공부 추천도서로 선정(1984년)되었고, 국립중앙도서관(1989년), 어린이도서연구회 등에서도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을 보면 깜둥바가지, 벙어리, 바보, 거지, 장애인, 외로운 노인, 시궁창에 떨어져 썩어가는 똘배, 강아지똥 등 하나같이 힘없고 약하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저서로는 동화집으로 『강아지똥』, 『꽃님과 아기양들』, 『사과나무밭 달님』, 『까치 울던 날』, 『하느님의 눈물』, 『몽실언니』, 『도토리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점득이네』, 『밥데기 죽데기』,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황소 아저씨』, 『오소리네 집 꽃밭』, 『한티재 하늘』,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무명저고리와 엄마』,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깜둥바가지 아줌마』, 『슬픈 나막신』 등이 있다. 또, 작고한 후에 월간지에 연재해 오던 작품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된 『랑랑별 때때롱』, 산불 속에서 새끼들을 지켜낸 까투리의 모성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엄마 까투리』 등이 있다.

 

 

 

 

  동화집 외에도 소설집 『한티재 하늘 1-2』,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수필집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우리들의 하느님』 등이 있다. 특히 『한티재 하늘』은 1895년 을미 의병 무렵부터 해방 전까지 경상북도 한티재 부근의 삼밭골과 칠배골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 민족의 한과 아픔을 그린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모든 어린이가 차별받지 않고 두루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그려냈다. 생전에 기독교 신자로 살아온 권정생은 기독교적인 박애주의를 바탕으로 자연과 생명 그리고 어린이들과 이웃 그리고 무고하게 고난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다뤄왔다.

 

  권정생은 1983년 이후 직접 지은 5평짜리 오두막집에서 강아지와 둘이서 사는 검소한 삶을 실천하며 살다가 2007년 5월 17일 지병이었던 결핵과 심부전증 합병증이 악화되어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여전히 각박한 이 세상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어주고 있다.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이들은 깜짝 놀랐다. 그가 남긴 통장의 잔액이 10억 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평생 덜 먹고, 덜 입고, 덜 쓰며 생활한 탓에 동네 사람들은 선생을 그저 가난한 글쟁이로만 생각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고 또 아끼던 그가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것은 지구촌의 가난하고 헐벗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글을 읽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산과 앞으로 나올 인세도 모두 북한, 아프리카, 중동의 아이들을 위해 쓸 것을 당부했다.

 

 

 

  권정생은 세상을 뜨기 전,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 달라.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2009년 인세를 기본 자산으로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추도사업, 창작기금 시혜 등의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다.

 

 

 

 

흙집으로 된 권정생의 생가

 

 

  조탑리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권정생 선생이 숨지기 전까지 창작생활을 한 생가가 있다. 1983년, 그의 나이 47세에 ‘권정생’ 이란 이름으로 처음 고향에 마련한 집이다. 교회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빌배산 아래에 있다.

 

  대문도, 담도, 문패도 없이 뒤편 빌뱅이 언덕을 병풍 삼고 나무 두어 그루를 담장 삼은 작은 흙집이다. 흙집 안에 방 한 칸과 부엌, 마당 한구석에 화장실과 개집이 전부다. 약 26㎡(8평)짜리 이 작은 집은 동네 청년들이 선생을 위해 지어준 것으로 1983년부터 돌아가시던 해까지 창작 생활을 한 집은 상상했던 것보다 초라했다.

 

  뒷간 주변엔 잡풀이 무성하고, 고욤나무, 산수유, 은행나무에 가려져 집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마분지에 손으로 눌러 쓴 ‘권정생’이라 쓴 작은 문패를 방문 위에 달아놓아 이곳이 그의 집임을 알 수 있을 정도다.

 

 

 

 

  평생을 스승이자 친구로 지낸 아동문학가 이오덕에게 쓴 편지에 그는 “이사 온 집이 참 좋습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요”라고 적었다고 한다. 비록 마을 가장 외진 곳에 낮은 지붕을 이고 웅크리듯 있지만 “작가는 모름지기 외로워야 한다”던 선생에게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겨우 한 사람 누울 정도의 공간, 권정생은 이곳에서 잠을 자고 글을 썼다. 결핵균이 퍼져 콩팥과 방광을 들어내고서 옆구리에 연결한 오줌주머니에 수시로 피고름이 흘러나오고 송곳으로 찌르는 듯 되풀이되는 고통 속에서 글을 썼다.

 

  그래서 평생지기인 이오덕 작가는 “다른 사람은 잉크로 글을 쓰지만, 권정생은 피를 찍어서 글을 쓴다”며 권 작가의 글이 출판돼 빛을 보도록 발로 뛰었다.

 

  문 앞에는 전국에서 온 이들이 흔적을 남긴 방명록이 있다. 문은 잠겨 있지만, 문살에 붙은 손바닥만 한 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앉은뱅이 책상에 영정사진과 향로가 놓였다. 그리고 바로 옆 책장에 책 몇 권을 얹은 것이 전부다. '뺑덕이네'라는 이름표가 붙은 개집도 그대로였고, 평소 그가 앉아 주변 생물을 관찰했을 섬돌도 제자리에 있다.

 

  권정생 선생이 자주 올라 생각에 잠겼다는 집 뒤편 빌뱅이 언덕에 올라본다. 그의 삶처럼 소박하고 야트막한 산이다.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가 뿌려진 언덕이다. 어디선가 반가운 얼굴로 권정생이 환생하여 나타날 것만 같다.

 

  언덕에선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그가 1968년부터 16년간 종지기로 살면서 「강아지똥」을 완성한 일직교회도 가까이 보인다. 고샅길을 따라 일직교회를 가본다.

 

 

 

▲권정생 생가, 문틈으로 찍은 내부, 화장실, 강아지 집

 

 

15년간 종지기로 살아온 일직교회

 

  가족도 없이 혼자 병을 앓던 그가 교회 문간방에 들어간 것은 1968년이었다. 빌뱅이언덕 흙집을 지어 이주한 1982년까지 그는 매일 새벽 긴 줄을 당겨 종을 울리고 교회 일을 도우며 밤이면 글을 썼다. 주일 찾아온 아이들에게 이야기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그해 동시 「강아지똥」을 썼는데 만족스럽지 않아 다음 해 동화로 고쳐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에 응모해 당선됐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무더운 문간방이지만 그는 이곳에서 많은 작품을 썼다. 그가 머물던 문간방과 종탑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모습이 살짝 바뀌었지만, 당시 느낌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권정생 선생이 평생 종지기하며 섬기던 일직교회

 

 

‘권정생동화나라’ 문학관

 

  생가에서 1.5㎞ 떨어진 곳에 있는 일직면 망호리, 옛 안동 일직남부초등학교를 꾸며 개가014년 개관한 '권정생동화나라' 문학관이 있다. 권정생을 기리는 어린이 문학체험장으로 권정생 선생의 삶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권정생동화나라’ 문학관은 아이들이 평화로운 세상을 꿈꾼 권정생의 문학과 삶이 담겨 있는 곳이다. 건물 앞 화단에는 「강아지똥」에서 피어나는 민들레, 젖먹이 동생을 업은 몽실언니, 새끼들을 품고 있는 엄마 까투리 등 그의 대표작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만들어 놓아 권정생의 작품을 상기시켜 준다. 선생의 추억이 깃든 교회 종 모형도 볼 수 있다.

 

  1층 전시실에는 권정생의 체취가 묻은 친필원고, 유언장, 일기장 등 그의 유품과 저작을 모아 놓았다. 유품이라야 번듯한 물건이라곤 전혀 없어서 교실 한 칸을 채우기도 버거운 수준이다.

 

  전시장 한쪽에는 조탑동에 있는 선생의 집 방안 풍경을 재현해놓았다. 내부 물건은 모두 유품들인데 얼핏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물건은 하나도 없다. 책장과 앉은뱅이책상이 가구의 전부이고, 한 사람 누우면 꼭 맞을 정도로 작은 방이다. 선생이 직접 쓴 “좋은 동화 한 권은 백 번 설교보다 낫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생가를 재현한 공간엔 책상을 겸한 소반과 필기도구, 반창고를 붙인 안경 등이 미니어처처럼 들어 있다. 쓰고 버린 비료 포대를 접어 나뭇가지를 끼워 만든 부채, 전기가 없던 시절 마요네즈 유리병에 심지를 넣어 만든 램프, 손수 옷을 기워 입은 천 조각과 반짇고리까지 그의 가난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19살부터 앓아온 늑막염 때문에 평생 몸에 차고 다녔던 오줌주머니를 보노라면 가슴이 찡하다.

 

  또, 권정생의 생전 모습과 인연을 담은 사진들이 여러 장 걸려 있다. 이들은 모두 권정생과 교류하고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들이다. 2층에는 단체 관람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강당도 있다.

 

 

 

▲권정생동화나라 문학관, 내부전시물과 유품

 

 

  1층 현관에서 밖으로 나가면 데크로 된 전망대가 있다. 여기서 보이는 마을이 소설 「몽실언니」의 몽실이가 살던 동네의 배경이다.

 

  계단을 내려가면 연단 주위에는 ‘어머니’라 쓴 조각 앞뒤로 여인의 얼굴 조형물과 ‘평화통일’이라 쓴 한반도 형상의 설치 작품이 세워져 있다. 강아지똥, 엄마 까투리, 몽실언니 조형물이 있어 기념사진 찍기에 좋다.

 

 

 

▲권정생동화나라 문학관 외부에 설치한 조형물

 

 

◎상세정보

 

►생가 주소 :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안길 57-12 (일직면 조탑리 1)

►권정생동화나라 문학관 주소 : 경북 안동시 일직면 성남길 119 (일직면 망호리 819) / 전화 : 054-858-080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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