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최치원문학관
신라의 대학자이며 문필가인 최치원
글 · 남상학
▲최치원문학관 정문
최치원문학관은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길 241에 있다. 최치원문학관은 신라의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2019년 설립되었다.
최치원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은 먼저 산문(山門)을 지나 굴참나무 금강소나무 우거진 천년의 숲길을 걸으며 산 냄새를 맡는다. 고운사 입구에서 경내까지 이어지는 천년 숲길은 걷기만 해도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변할 것 같은 힐링을 선사한다.
천년 숲길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21년 비대면 안심 관광지 25선 중 한 곳으로 선정되어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솔향에 취해서 어느덧 천왕문(天王門)을 지나면 명당자리 위 절집이 보인다. 고운사(孤雲寺)다.
▲고운사로 드는 천년숲길
고운사에 가운루, 우화루를 세우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 명당에 자리한 이 사찰은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다. 지금의 ‘고운사(孤雲寺)’로 개칭한 것은 통일신라 시대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다.
통일신라 말 진골 귀족 세력 중심의 신분체계의 벽과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감과 몰락을 느낀 최치원은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산중 칩거에 들어간다. 그중 한 곳이 이곳이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고운사로 들어가는 길목 옆에 최치원문학관을 세웠다.
▲고운사의 가운루(위)와우화루(아래)
신라의 대학자이며 문필가인 최치원문학관
최치원문학관은 고운 최치원의 삶을 조명하고 그의 문학을 집대성한 전시 관람과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문학관은 최치원 선생의 삶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영상실, 상설 전시실, 기획전시실, 게스트 룸, 세미나실, 대강당, 고운 차실, 고운 문학공원을 갖췄다. 등운산의 수려한 경치로 문학관 특유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상설전시관에는 최치원 생애를 전시 중이다. 고운의 인생 여정, 문인 최치원, 역사가 최치원, 관인 최치원, 전시실(유물) 사진, 고운 쉼터, 중정으로 구분하여 최치원의 삶과 업적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최치원의 숨결을 느끼도록 했다.
기획전시실은 개폐월, 무빙월, 이동형 쇼케이스 등을 갖추고 있어 공간 분할을 활용한 다양한 전시를 수용할 수 있고, 체험교육 및 강의 시설로 이용된다.
게스트룸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예약은 최치원 문학관 방문 또는 전화로 할 수 있다. 고운차실은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 다양한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고운 문화공원의 유교 마당에서는 충효 사상을 바탕으로 한 유교의 덕목 및 가치관을, 불교 마당에서는 무아사상을 토대로 불교의 주요사상과 불교 문화를, 신선 마당에서는 무위사상을 바탕으로 자연에 순응한 자연 휴식 체험을 할 수 있다.
문학관에서 살펴본 최치원의 사상과 학문
신라 대학자 최치원((崔致遠, 857~?)은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868년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 가서 장안 체류 6년 만에 18세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하여,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879년 고변(高騈)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쓴 글이 「격황소서(檄黃巢書)」, 일명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다.
최치원은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이 되었으며,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또 882년에 자금어대(紫金魚袋)도 하사받았다.
▲최치원문학관에 걸린 최치원 초상
●「격황소서(檄黃巢書)」집필
「격황소서」(일명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는 당나라 희종 광명 2년, 황소(黃巢)가 모반하여 복주를 점령하고 민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고변으로 하여금 적을 치게 하였다. 이때 최치원이 그 토벌 총사령관인 고변의 휘하에 종군하며 황소에게 보내기 위해 지은 격서이다. 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전한다.
“… 천하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까지도 너를 베려고 의결하였다. … (중략) … 너는 모름지기 진퇴를 참작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라. 배반하다가 멸망하기보다 귀순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느냐. … ( … 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仰亦地中之 鬼已議陰誅 … 爾須酌量進退 分別否臧 與其叛而滅亡 曷若順而榮貴 …)”
내용은 도(道)와 권(權)을 내세워 천하대세의 운행 이치를 밝히고, 당나라 조정의 바르고 강성함과 황소 무리의 비뚤어지고 무모함을 대비시켜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여 항복하도록 권유한 것이다.
이 격서는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명문으로서 문필의 대공을 세웠다. 최치원은 이 한 편의 글로서 중국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우리나라 문인이 중국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다. 또한, 이 사건으로 최치원은 우리나라 한문학의 원로로서 후세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게 되었다.
▲적장의 간담을 서늘케 한 최치원의 '격황소서'로 유명해지다.
●시무책 10조를 상소하다.
중국 당나라 유학에서 신라로 돌아온 29세의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를 올려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진골들의 견제로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비록 빛을 보지 못했지만, 후손 최승로가 계승해 고려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는 정국을 안정시키고 유교 정치 실현에 이바지했다. 이후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등장하는 수많은 상소(上疏)의 기원은 최치원의 시무소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각지를 유랑하며 경주, 합천, 부산 해운대 등을 떠돌다가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렀는데,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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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필경』, 최치원의 시문집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우리나라 최고(最古) 최초의 『계원필경』이다. 최치원이 885년(헌강왕 11)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이듬해인 886년(정강왕 1) 당나라에 있을 때 지은 작품을 28권의 문집으로 간추려서 정강왕에게 바쳤는데, 이 가운데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등 8권은 전하지 않고, 『계원필경』 20권만 전한다.
『계원필경』의 제목은 “모래를 헤쳐 금을 찾는 마음으로 계원(桂苑·과거급제)을 이루었고, 난리를 만나 융막(戎幕)에 기식하며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필경(筆耕)으로 제목으로 삼았다.”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계원필경』이 1,000여 년을 두고 인멸되지 않고 계속 간행된 까닭은 후대 과문(科文·과거 문장)의 한 전범(典範)으로 원용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문집은 사육변려문(四六騈儷文, 4·6 대구의 화려한 시문)의 유려한 문체가 수많은 전고(典故)를 담은 채로 수록되어 있다. 대구와 압운이 뛰어나 중국 신당서에 언급될 만큼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 광종 때 처음 실시한 우리나라 과거시험 과문(科文·과거 문장)의 전범(典範·본보기가 되는 규범)이 되었다.
▲정강왕에게 바친 계원필경
●금석문, 사산비명(四山碑銘)
계원필경이 당나라에 있을 때 저술한 대표 작품이라면, '사산비명(四山碑銘)'은 귀국 후 쓴 작품 가운데 백미라 할 수 있으며, 그의 비문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높은 4편을 모아 엮은 금석문집이다.
네 편의 비문은 ①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 터에 있는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국보 제8호), ②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에 있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碑銘, 국보 제47호), ③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 대숭복사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 ④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는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 국보 제315호)이다. 네 군데 산 이름을 취하여 일반적으로 ‘사산비명’이라 일컫는다.
신라 고승 네 분의 생애와 공덕을 지은 이 비문은 지금은 세 개가 남아 있는데, 모두 변려문의 전형으로 전고를 적절히 구사해 화려함과 함축미, 전아함을 모두 갖추고 있어 불교 학인들의 독본으로 널리 사용되었고 신라 말기 불교·역사·문학·정치·사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유(儒)·불(佛)·선(仙) 통합 사상
유-불-선의 뿌리인 신교(神敎)를 밝힌 고운 최치원의 신교(神敎)는 본래 뭇 종교의 뿌리로, 동방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 그 도맥(道脈)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일찍이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 /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시문집 『고운 문집』
『고운 문집』은 최치원의 시문을 모은 문집이다. 고운 문집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많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지금 전하는 문집은 1926년 최치원의 후손인 최국술(崔國述)이 금석문과 『계원필경』, 『동문선』, 불교 서적 등지에 흩어져 있는 시를 한데 모아 발간한 것이다.
●유유자적, 방랑 생활의 길을 걷다.
유불선(儒佛仙) 모두에 통달했던 그의 식견으로 신라의 국운이 다했음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나라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가 나라를 버렸을 것이다. 속세의 소임이 끝났음을 직감한 그는 그렇게 스스로 ‘고운(孤雲)’ 즉 구름이 되었다. 산천 이곳저곳 부대낌 있을 리 없는 구름이 된 것이다.
그는 전국을 유람하며 많은 자취를 남겼다. 고운사와 해운대는 그의 호를 직접 따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유적이 정읍의 무성서원과 함양의 상림이다. 특히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의 냇가에 자리 잡은 호안림이며 신라 진성여왕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조성한 숲이라고 전한다.
석각은 부산 해운대와 창원 월영대·청룡대를 비롯해 산청 고운동계곡, 하동 쌍계사계곡, 합천 홍류동계곡, 문경 선유동계곡 등지에 있다.
신라 골품제에 한계를 느낀 최치원은 고려에 우호적이었다. 해인사에 머물며 고려 왕건에게 보낸 서한에 '경주 계림은 누런 잎이요, 개성 송악은 푸른 소나무다(鷄林黃葉 鵠嶺靑松)' 하여 신라가 망할 것을 예견했고 후손들은 고려 관리가 됐다.
안타깝게도 그의 정확한 생의 마지막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치원은 가족과 함께 해인사에서 일생을 마쳤고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그의 자취에 대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최치원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과 사우(祠宇)는 곳곳에 있다. 서원·사우, 석각 및 유적으로 모두 80여 곳에 있다.
최치원을 기리는 기념관(문학관)은 우리나라 외에 중국에도 세워졌다. 경남 함양 상림에 고운기념관이 있고, 경북 의성에는 최치원의 전설이 담긴 아름다운 사찰 누각, 가운루와 우화루가 있는 고운사 입구에 최치원문학관을 만들어 그의 일생을 영상으로 꾸몄다. 그런가 하면 중국 장쑤성 양저우 수서호 남문 밖 당성(唐城) 유허지에 최치원기념관을 세웠다.
▲최치원문학관 내 대강당(상), 고운차실(중), 고운도서실(하)
◎상세정보
►주소 : 경북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길 241 (단촌면 구계리 177)
►연락처 : 054-834-8200
►관람 : 09:00 ~ 18:00(17:30까지 입장 완료)
►휴관일 : 월요일(월요일과 공휴일이 겹칠 때는 그다음 평일 휴관), 1월 1일, 설날 당일, 추석 당일
►가는 길 : 의성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고운사 버스에 승차하여 구계2리에서 하차한다. 여기서 8분 도보 이동(500m 거리)하거나 안동 일직정류소에서 438번 버스에 승차하여 구계2리 하차 후 8분 도보 이동(500m 거리)하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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