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고하문학관
최승범 시인의 집필 공간이자 전주 문인들의 사랑방
글·남상학
▲고하문학관(출처: 전주시청 공식 블로그)
“흰빛 부신 속을/ 도랑 졸졸 물소리/ 토끼 노루도/ 마을 찾아 들 것 같은/ 안산의/ 눈구렁 속 빗 질러 끌끌 수꿩이/ 난다 ⃫ 부엌 잿불에 묻어/ 설 구워진 고구마/ 그 설겅거린 맛/ 되려 입을 달게 하고/ 대살문/ 눈빛 어려 환하던/ 옛 고향을/ 본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수제자인 최승범 (1931- )의 「설후(雪後)」라는 시다. 봄이 오는가 싶더니 어젯밤 눈발이 날렸다. 그러나 3월이 가까워지니 계절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봄을 재촉하는 소리를 들으며 전주한옥마을에 조성된 고하 문학관을 찾았다. 고하문학관은 전주 성심여중고 남쪽 향교길에 있다. 학인당에서도 가깝다. 주소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28 (교동 233-1)
고하(古河)는 최승범(崔勝範) 시인의 호(號)로, 전주시는 과거 동사무소로 사용하던 건물을 고쳐 최승범 시인의 호를 따서 그의 집필 공간이자 전주에 있는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문학관으로 꾸몄다.
1931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한 최승범 시인은 1958년 『현대문학』에 시조 「설경」, 「소낙비」, 사온일(四溫日), 「등고(等高)」로 추천을 받아 등단한 후 1969년 동인들과 함께 사비를 들여 『전북문학』을 창간하여 50년 넘게 이끌어 국내 최고 지령(紙齡)의 동인지로서 지역 문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고하 최승범 선생이 평생 정성 들여 간행한「전북문학」(출처 : 전주시청 공식블로그)
그는 고서적 수집광(狂)이었다. 대학 시절 버릇처럼 고서점가를 헤매고 다녔다.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고나올 땐 횡재했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평생 모은 고서와 그동안 기증받은 책들과 여러 문인과 주고받은 책을 소중히 보관하였고, 자신의 고문헌을 비롯한 소장된 자료들을 전주시에 기부했다.
전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전북대학교 교수, 인문대학장을 역임하며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지금은 전북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전북의 원로시인이기도 한 그는 지금도 꾸준히 작품을 구상하고 시작(詩作) 활동을 하면서 얼마 전엔 시조 풍류를 엮은 『시조로 본 풍류 24경』이란 책을 펴냈다. 또, 전북지역 이야기를 한데 모아서 『신전라박물지』를 12번째 시집으로 출판하며 전주와 시조 문학을 지켜오기도 했다.
창가에는 전주 덕진 공원의 사계절 모습을 담은 사진작가 작품들과 서울에 있는 문인이 보내준 동양화가 눈에 들어온다. 동양화는 『전북문학』 표지로 활용되기도 한다.
고하문학관은 다른 문학관과는 다르게 장서(藏書)로 가득하다. 2층은 온통 빽빽한 서고일 뿐이다. 최남선 김억 이상화 김기림 채만식 김광섭 신석정 서정주 박목월 정지용… 등을 포함하여 현재 5만 여권의 장서와 1,900권의 고서, 서예 작품과 그림 500점의 예술작품, 주고받은 수천 통의 편지도 보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유가(儒家)의 문집과 역사서, 지리지, 백과사전만도 1,000여 권에 이른다. 『두시전집(杜詩全集)』 25권, 송하진 전북지사 할아버지의 문집 8권도 이곳에 있다. 마치 작은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빽빽하게 들어찬 2층 서가
전시관 안의 고하 시인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공모한 ‘공공 도서관 주요 소장 자료 디지털화 지원 사업’에 선정된 고문헌들이다. 이 사업은 1945년 이전 보존 가치가 있는 고서와 고문서, 지도, 고서화 등을 대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문가들이 내려와 2주간에 걸쳐 디지털화 작업을 마쳤다.
책상 위에는 탈고를 마친 자기 자신의 원고와 문인들이 보내온 원고가 사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시인은 학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이병기, 박목월, 김동리 등 시인들에게 받은 편지를 비롯하여 평생 주고받은 편지와 방문객들이 남긴 메모 등을 꼼꼼히 정리한다.
▲가람 이병기로 받은 서필, 최승범 시인은 가람 이병기 선생의 수제자였다.
편지 중에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제자이자 신석정 시인의 맏사위로서 가람 선생님과 석정의 친필 편지와 서적을 소장하고 있다.
“일림아/ 촛불을 꺼라/ 소박한 정원에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달빛을 어서 우리 침실로 맞아 와야지…/ 유리창 하나도 없는 단조한 나의 방…/ 침실아―/ 그러나 푸른 달빛이 풍요히 흘러오면/ 너는 갑자기 바다가 될 수도 있겠지…/ 일림아/ 어서 촛불을 끄렴. <중략> 일림아/ 너와 나는 푸른 침실의 작은 배를 잡아타고/ 또/ 어디로 출발을 약속하여야겠느냐?” -신석정 「푸른 침실」 중에서
‘일림’은 신석정 시인의 맏따님 이름으로 고하(古河) 최승범 시인의 아내이기도 하다. 그는 아내를 앞서 보내고 구순(九旬)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품격 높은 선비로 책 속에 묻혀 시를 쓰고 있다.
“설청의 눈부신 아침/ 너를 바라본다 ⃫ 너를 바라본다/ 따로 날이 있으랴 ⃫ 사철을/ 바라보아도/ 너로 설 수/ 없는 것을 ⃫ 설청의 이 아침에/ 너를 다시 바라본다./ 개운히 스미는 빛이여/ 성글어 맑은 소리여 ⃫ 빼어나/ 밋밋한 마디여,/ 부추겨다오/ 나를 나를.” - 최승범의 「대나무에게」전문
깨끗하고 고결한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다. 고하 시인은 지금까지 시집으로 『후조(候鳥)의 노래』, 『설청(雪晴)』, 『계절의 뒤란에서』, 『자음송(子音頌)』, 『호접부(胡蝶賦)』, 『여리시오신 당신』, 『이 한 점 아쉬움을』, 『지등 같은 달이 뜨면』, 『바람처럼 구름처럼』, 『천지에서』, 『난 앞에서』, 『자연의 독백』, 『가랑잎으로 눈 가리고』, 『팔팔의 노래』, 『짧은 시, 짧은 여운』, 『시간의 물레』, 『화시』 등 50여 권에 이르는 책을 냈다.
▲최승범 시인의 시집, 선생이 출판한 책이 무려 50여권에 이른다.
시인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을 통해 진실성을 확보하고 그에 대한 참된 묘사를 시에 담아내려고 힘써 독창적인 교술시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는다. 평범한 소재를 통해 나름의 전통과 주체성을 살려내고, 서정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의 시적 세계는 독창적인 경지다.
저서로 시집 외에도 『한국수필문학연구』, 『남원의 향기』, 『선악이 모두 나의 스승』, 『시조에세이』, 『풍미기행』, 『한국을 대표하는 빛깔』, 『한국의 먹거리와 풍물』, 『3분 읽고 2분 생각하고』, 『벼슬길의 푸르고 맑은 바람이여』, 『꽃 여인 세월』, 『소리』, 『돌아보며 생각하며』 등이 있다.
정운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김현승문학상, 만해문예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전북대 명예교수, 고하문학관 관장으로 있다.
협소한 공간은 마치 서고나 다름없다. 보존 가치가 있는 고서적들을 제대로 보관·활용하고 지역 문인들의 진정한 사랑방이 되려면 무엇보다 넓고 쾌적한 공간 확보가 시급해 보인다.
▲고하문학관 가는 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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