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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나주 백호문학관, 조선의 천재 시인 백호 임제의 호방한 목소리 들리는 듯

by 혜강(惠江) 2022. 2. 26.

 

나주 백호문학관

 

조선의 천재 시인 백호 임제의 호방한 목소리 들리는 듯

 

 

글·남상학

 

 

 

 

 

  나주에는 풍부한 역사문화 자원과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 흥미진진한 스토리들이 있다. 영산강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문화관광 자원들이 있다. 정도전 등 우리 역사를 수놓은 위대한 인물들도 나주 태생이거나 나주와 관계를 맺었다.

 

  오늘은 전남 나주가 낳은, 조선 중기의 대문호(大文豪) 백호 임제(林悌, 1549~1587)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기리기 위해 만든 '백호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이다.

 

  2013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개관한 백호문학관을 가기 위해서 나주읍을 거쳐 영산강과 다시 들판을 지난다. 강과 들을 거느리며 가는 길이다. 이곳은 곡창 나주평야를 이루는 중요한 지역이다. 논과 논이 겹치고 들과 들이 겹쳐 평야를 이루어 비옥한 농토를 자랑한다.

 

 

 

 

문학관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백호 적토마 부조와 임제의 시 「규원(閨怨) 무어별(無語別) ; 수줍어서 말 못 하고」를 새긴 시비가 먼저 반긴다.

 

  十五越溪女 (십오월계녀) 열다섯 갓 넘은 어여쁜 아가씨

  羞人無語別 (수인무어별) 수줍어서 말 못하고 임을 보내고

  歸來掩重門 (귀래엄중문) 돌아와 겹겹이 문 걸어 닫고는

  泣向梨花月 (읍향이화월) 이화(梨花)에 달 밝은데 눈물 짓누나!

 

  어린 소녀의 애틋한 사랑을 절제된 언어를 통해 표현한 작품으로 섬세한 여인의 심정을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영상으로 엮어내고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3875㎡의 터에 지상 3층, 건물면적 387㎡ 규모의 백호문학관은 외관은 전체적으로 세련된 구조이지만, 내부는 고전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1층에는 수장고, 사무실, 영상 회의장, 집필실이 있으며, 2층에는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3층에는 문학 사랑방을 갖추고 있다.

 

  현관에는 ‘16세기 조선의 가장 탁월한 문장가’라고 쓴 촌평이 걸려 있다. 상설전시관에는 임제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과 자료가 비치돼 있다.

 

  임제 선생의 작품을 생애 시기별로 나눠 전시하고, 그의 친필 원고와 문집과 젊은 시절 나주 다시면 복암사에서 공부할 당시 쓴 석림정사 현판 친필 글씨 복제본과 제주도 여행기 ‘남명소승’, 친필 미공개 시편 등 그의 작품과 지역의 유림들이 임제 사원 건립을 청원하는 건원상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편에 호방한 기질, 예속에 구속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그의 시 <이 사람(有人)> 한 줄이 걸려 있다.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우주 간에 늠름한 육 척의 사나이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마음은 어리석어 육운의 병 면키 어렵고

  지모는 졸렬하여 원헌의 가난도 사양치 않아.

 

  풍진 속 벼슬살이야 잠깐 동안 굽힘이니

  강해(江海)의 갈매기와 누가 잘 어울릴까

  나그네 빈방에는 밤마다 고향 꿈

  다호(茶戶)며 어촌으로 옛 이웃들 찾아간다오.

 

   - ‘이 사람’ 전문

 

 

 

  전시실에서 만나는 백호의 시문이 가슴에 와 닿는다. 벼슬을 집착하지 않는 이의 자유와 기상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전시관 편액을 보면, "백호 임제는 기질이 호방하고 예속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지녀 '풍류기남아(風流奇男兒)'라 일컬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종 4년(1549년)에 태어난 백호는 초년에는 늦도록 전국을 유람하며 술과 창루(娼樓)를 탐하며 지내다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고, 속리산에 은거 중이던 성운(成運·14971579)에게 사사해 3년간 학문에 정진할 때 중용(中庸)’을 무려 800() 했다고 한다.

 

  백호는 성운과 떠나면서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려 하지 않으나 속세가 산을 떠나려 한다(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라는 화두를 던졌다는 일화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그의 정신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는 전국을 누비며 자유롭고 호방한 기풍과 재기 넘치는 글로 당대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29세 때인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린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35세 때 평안도 도사(都事)로 부임하는 길에 풍류 여걸 황진이의 무덤에서 읊었던 시는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황진이는 백호보다는 앞선 세대의 인물이지만 조선 최고 여류 시인이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었느냐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는고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이를 슬퍼하노라.

 

  황진이의 기(氣)와 예(藝)를 높이 평가했던 임제는 그녀가 살았을 때, 그녀와의 만남을 바랐지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황진이 무덤 앞에 넋을 달래며 제문을 짓고 제를 지낸 당대 최고의 로맨티스트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사대부가 기생에게 술을 올리고 그를 기리는 시를 지은 것을 문제 삼아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잦고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방랑벽과 호방한 기질로 인해 당대인들은 모두 그를 법도(法度) 외의 인물로 보았으나, 그의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재를 알았던 허균·양사언 등에게 인정을 받았 다.

 

  임제는 성이현과 작별하며 "말 뺕으면 세상은 미쳤다 하고/ 입 다물면 세상은 바보라 하네/ 이래서 머리 저으며 떠나가지만/  어찌 지혜로운 이 알아주지 않으랴(出言世謂狂 緘口世云癡 所以掉頭去 豈無知者知"라고 자신의 심경을 피력하기도 했다.  

 

 

 

▲임제의 친필 작품인 ‘금선요(金仙謠)’. 금선요는 임제가 불교 이야기를 도교적으로 풀어낸 장시 작품이다.

 

  임제는 세상을 누비며 거침없이 풍류를 즐기는 로맨티스트였다.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겼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조선의 풍류남아 백호(白湖) 임제(1549~87)가 기생 한우(寒雨)에게 지어 준 시다. 「한우가(寒雨歌)」로 전하는 이 시는 임제가 기생 한우를 만나 첫눈에 반한 마음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시다. ‘찬비’는 기생의 이름 ‘한우(寒雨)’를 동시에 의미하는 중의적(重意的) 표현이다. 한우에 대한 마음을 담아 멋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이에 재색을 겸비한 데다 시문에도 능하고 거문고와 가야금에도 뛰어났던 한우는 이렇게 화답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는 은근하게 그리고 속되지 않게, 자신의 메시지를 가야금에 실어 청아한 목소리에 실어 보냈다. 이 얼마나 녹진한 에로티시즘인가?

 

  해동가요에는 ”시문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타며 노래를 잘 부른 호방한 선비였다. 이름난 기녀 한우를 보고 이 노래를 불렀다. 그 날밤 한우와 동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사 이항복도 「백호집서」에서 임제를 가치켜 “명산을 두루 유람하여 자신의 분방, 호일한 기운을 복돋아 시에다 토해냈다.”라고 적었다.

 

  풍류를 즐기는 방랑벽으로 인해 임제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날이 저물어 부잣집에 들어가 시를 지어주고 숙식을 해결한 일, 충청도 감사의 아들에게 말 오줌을 신선이 마신 불로주라 하여 마시게 한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하는 이들에게 시를 지어주어 음식을 제공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서 알현한 일 등의 일화 등이 전한다.

 

  임제는 당대의 대표적 한량(閑良)이었다. 평안도 도사를 거쳐 39세 때인 1587년 6월 부친상을 당하고, 그해 8월, 원대한 꿈을 펼치지 못하고 만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아깝게 요절한 그였지만, 여인들과 많은 염문과 정화(情話)를 뿌리고 간 주인공이다.

 

  그는 시문에 능하여 주옥 같은 작품 700여수를 남겼다. 한시뿐만 아니라, 시조도 6수를 남겼는데 모두가 여인들과의 사랑 노래다.  백호 임제의 묘는 나주시 다시면 신걸산 기슭에 있다.

 

 

 

 

  “사해 안의 모든 오랑캐가/ 황제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조선만이 예부터 중국을 주인으로 모시는 신세이니/ 내 살아서 무엇하리 내 죽어서 무엇하리/ 곡(哭)을 하지 마라”(四海諸國未有能稱帝者獨載邦終古不能 生於若此 陋邦 其死何足借命 勿哭)”

 

   이것은 그 유명한 백호 임제 임종 계자 물곡사(-白湖林悌 臨終 誡子 勿哭辭)다. 죽기 전에 조선이 중국의 속국과 같은 형태로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아들들에게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 하겠느냐”라며 곡을 하지 못하게 유언한 것이다. 나주 회진의 옛터에는 후손들이 세운 물곡비가 있다. 백호기념관 앞 비문에는 "白湖林悌 臨終 誡子 勿哭辭 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入主 中國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로 표기되어 있디.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조선 시대 유일하게 사대사상을 배격한 그는 고뇌의 삶과 빼어난 정신을 1천여 수의 시와 산문, 소설로 남겨 16세기 조선에서 가장 개성적이며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다.

 

  문집으로는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이외에도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 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愁城誌)』, 일기체 기행문인 『남명소승(南溟小乘)』, 평양 부벽루에서 김새, 황진이, 이인상 등과 함께 수창(首唱)한 내용을 적은 『부벽루상영록(浮碧楼觴詠録)』, 그리고 식물 세계를 통해 인간 역사를 풍자한 화사(花史)』 등 한문 소설도 남겼다.

 

  백호문학관에서는 백호 임제의 문학사상을 기리기 위해 어린이 글짓기, 백호 문학제를 비롯해 백호 선생의 문학사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하고 있다.

 

  백호문학관 인근에 영모정(永慕亭)이 있다. 영모정은 1520년 임붕(林鵬)이 건립한 정자로임제가 글을 쓰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歸來亭)’이라 불렀으나 1555년 임붕의 두 아들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재건하면서 영모정으로 이름을 고쳤다.

 

 

 

 

  나주임씨 대종가, 백호문학관, 영모정을 꼭짓점으로써 삼각형을 만들면 세 개의 건물은 삼각형의 중심 지점 기준으로 100m 이내의 거리에 있다.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나주곰탕의 원조집이 있고 600년 역사의 홍어음식 거리가 있으니 맛의 향연을 펼쳐보는 것도 나주 여행의 매력이다.

 

 

◎상세정보

 

▻주소 :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길 8 (다시면 회진리 103)

▻전화 : 061-335-5008

▻관람 : 화~일 09:00 ~ 18:00 (겨울철에는 17:00까지)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과 추석 연휴

▻가는 길 : 나주역이나 나주터미널에서 버스로 15분 이내, 회전리행 버스(503, 504, 505) 승차 후 회진 마을 하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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