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로 떠나는 문학여행
고산 윤선도의 문향(文香) 가득한 섬, 보길도
글·사진 남상학
▲보길도 세연정
윤선도의 고향 해남 녹우당을 거쳐 마지막 삶을 누렸던 보길도. 세상에 곧은 마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돌아온 것은 외로운 유배 생활뿐이었던 윤선도(1589~1671). 그에게 보길도는 고독함까지도 감싸 안아주는 그만의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
한때는 정치인으로서 난정(亂政)을 바로잡고자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유배되고, 왕명으로 복직되었어도 중상모략으로 또다시 유배 생활을 했던 윤선도. 강직하면서도 글과 풍류를 알았던 그의 유토피아를 찾아 남쪽 바다 보길도로 간다.
보길도는 해남 송지면 갈두리 땅끝항에 도착하여 노화도 산양진항까지 운항하는 철선을 타고 30여 분 달리면 노화도에 닿는다. 여기서 승용차로 노화도와 보길도를 연결하는 보길대교를 건너면 보길도다. 보길도 가는 배는 해남 땅끝항 외에 완도 화흥포항에서도 출항한다.
▲해남 땅끝항에서 노화도 산양진항으로 떠날 철부선
보길도는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저마다의 특색을 지닌 예송리, 중리, 통리 해변에서 피서를 즐길 수 있고, 북바위와 송시열 선생이 글을 새긴 글씐바위, 보죽산, 공룡알 해변을 둘러볼 수 있다. 백동백과 흑동백, 동박새와 팔색조가 서식해 색다른 풍광을 접할 수도 있고, 곳곳에 천연기념물 479호 황칠나무가 자라고 있다.
특히 보길도는 조선 중기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 시가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시인이자 문신인 고산 윤선도(1587∼1671)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으로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의 필수 탐방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문학 탐방을 위해 보길도에 오는 사람이라면, 윤선도 삶과 문학을 보여주는 보길 고산윤선도문학관을 비롯하여 고산(孤山) 선생의 고결한 품성을 담은 부용동 원림과 세연정, 곡수당과 낙서재, 동천석실 등을 차례로 만나보면 된다. 윤선도 유적지 탐방은 보길 고산윤선도문학관과 원림 정보센터를 둘러보는 것부터 시작된다.
▲보길도 관광지도
►보길 고산윤선도문학관
윤선도의 자취를 탐방하기 전에 먼저 들러야 할 곳은 보길도에 들어선 윤선도문학관이다. 문학관에는 고산 윤선도의 삶과 문학을 한눈에 볼 수 있으므로 다른 유적들을 탐방하기에 앞서 윤선도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길도 부황리 184일대 1494㎡에는 문학관 1동, 창작실 1동을 갖추고 있으며, 문학관에는 전시실 및 세미나실이 있다. 2015년 개관한 윤선도 문학관은 405m² 규모로 ►고산과 보길도의 만남 ►고산의 흔적을 따라 ►흥취(興趣)의 미학 어부사시사 ►고산의 고고한 삶 등 4가지 주제로 구성하여 보길도와 관련된 고산 윤선도의 문학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그래픽을 비롯해 태블릿PC, 피칭슬라이드 시스템, 모형, 음향시스템 등 첨단장비를 활용해 마치 실제 윤선도의 생활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여기에 문학창작실 2실을 만들어 국내외 문학인이 보길도에서 장기간 머물며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보길 고산 윤선도 문학관
▲보길 고산 윤선도 문학관 옆 「어부사시사」 시비
▲보길 고산 윤선도 문학관 내 전시물
►보길도와의 만남 윤선도 원림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향하다 태풍을 피해 보길도에 들렀다가 보길도의 경치에 반해 뱃머리를 돌려 보길도에서 은거한 것이 처음이었다.
1637년 보길도에 입도한 윤선도는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수리봉 격자봉 망월봉 등 해발 300~400m 산 능선이 감싸고 있는 섬의 북쪽 계곡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였다. 1681년 85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일곱 차례 드나들며 13년 동안 자신만의 이상향을 가꿨다.
명승 제34호로 지정된 윤선도 원림은 1637년(인조 15) 2월 윤선도가 51세 때 입구에 세연정과 연못을 축조하였는데, 물과 바위와 소나무, 대나무 등을 이용한 조원 공간이다. 부용동 정원에는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윤선도 원림은 크게 세연정, 낙서재, 동천석실 세 구역으로 나뉜다.
고산의 5대손 윤 위(1725~1756)가 24세 때 보길도를 답사하고 유적지의 배치, 고산의 사람됨과 생활상 등을 기록한 ‘보길도지(甫吉島誌)’를 토대로 복원했다. 산세가 연꽃을 닮았다 해서 부용동(芙蓉洞)이라 했지만, 현재 행정지명은 부황리다.
▲보길도 윤선도원림 입구
▲보길도 윤선도 원림 안내판
▲윤선도 원림 관광정보센타 전시물
►고산의 흔적을 따라
(가) 연못 가운데 선 세연정(洗然亭)
윤선도 원림의 전시관을 보고 나가면 바로 세연정이 나온다. 세연정은 보길초등학교 운동장 바로 오른편에 있다. 입장료(3,000원)를 내고 들어가면 작은 전시실을 거친다. 윤선도의 생애와 보길도의 역사를 두루 알리고 있다.
1637년(인조 15) 2월 윤선도가 51세 때 처음으로 보길도를 찾아 입구에 흐르는 계곡을 얕은 돌다리로 살짝 막아 얕은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에 세연정(洗然亭) 정자 하나를 세웠다. 물과 바위와 대(臺)와 소나무·대나무 등을 이용한 조원(造園) 공간으로 지금까지 부용동 원림 중에서도 가장 잘 남아있는 유적이다.
이름처럼 물에 씻은 듯 맑고, 단정하다. 정자를 중심으로 연못을 한 바퀴 돌면 동대와 서대, 혹약암, 비홍교, 회수담, 사투암 등을 두루 거친다.
정자와 연못 주변은 동백을 비롯해 후박나무 참식나무 생달나무 등 녹나뭇과 상록활엽수로 덮여 있다. 여기서 윤선도는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세연정 배치도 (네이버에서 따옴)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운 세연정의 모습이 운치가 있다.
▲세연정 정자와 연못
“낮은 산비탈을 따라/ 느릿느릿 내려오는 바람이/ 연못 수면을 간질이며/ 그윽한 풀향기 속에 잠이 듭니다.// 이 고요 속에/ 세월의 돌다리 건너/ 살아오는 그리움/당신은 그윽한 풀 내음, 솔 향기로/ 잔잔히 내게 오십니다.// 한 점 미동도 없는 연못 속/ 한 조각 구름으로 잠기어/ 수심 깊숙이/ 무심(無心)하라 이르시는 이// 노송의 휘어진 가지처럼/ 높으신 안목/ 무언의 크신 일깨움에/ 고개를 숙이나니//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록새록 살아오는 숨결/ 당신을 만나고 돌아서는/ 내 빈 마음 언저리에// 언제나 푸른빛의 샘/그윽한 풀 내음, 솔 향기 되어/ 당신의 문향(文香)이 스칩니다.”
- 남상학의 「세연정에 와서」 전문
졸작 「세연정에 와서」 전문이다. 윤선도는 내 선망의 대상이었고, 세연정은 그의 정서에 흠뻑 잠기게 하는 장소로 시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좋은 장소였다. 세연정에서 판석보를 지나 약 100m가량 오르면 옥소대가 나온다. 고산이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곳으로, 밑에서 보면 험하지만, 정상은 제법 평평한 너럭바위다. 윤선도는 세연정 정자에 앉아 옥소대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보며 반겼다고 한다.
(나) 낙서재(樂書齋)와 곡수당(曲水堂)
세연정에서 찻길로 약 1.5㎞를 올라가면 고산의 주거공간인 낙서재가 나온다. 낙서재는 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선비의 삶이 담긴 이름이다, 보길도에 은거하면서 머물렀던 집으로 1671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집은 초가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팔작지붕 기와로 복원되었다. 남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자형 구조의 집에 사방으로 툇마루를 내어 주변 환경을 쉽게 바라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2011년에는 《고산유고(孤山遺稿)》와 《보길도지(甫吉島識)》에 나오는 윤선도가 달(月)을 감상하는 장소로 사용한 귀암(龜巖)으로 추정되는 돌이 낙서재 앞마당에 있다.
낙선재 일대에 소은병, 낭음계, 오운대, 독등대, 상춘대, 엄선대 등 주변 바위에 이름을 붙여 자연에 묻혀 자연과 대화하는 조경을 꾸몄다.
낙서재 바로 아래에는 아들 학관의 휴식처로 지은 곡수당이 있다. 못을 파고 집을 지은 곡수당은 격자봉에서 흐른 물이 이곳에 이르러 곡수를 이룬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커다란 인품과 학식이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기를 바라는 어버이의 마음이 반영된 듯하다.
▲낙서재와 곡수당으로 가는 길
▲낙서재 일원
▲낙서재
▲낙서재 판각
▲낙서재와 낙서재 앞의 귀암
▲낙서재 뒤의 소운병
▲낙서재 아래, 아들 학관의 휴식처로 지은 곡수당
(다) 동천석실(洞天石室)
낙서재 건너편 산 중턱에는 윤선도가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며 사색하는 공간으로 쓰였다는 동천석실이 있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일컫는다. 도교에서는 성스러운 이상향으로 그려진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꼭 그렇다.
3,306m²(1,000여 평)의 공간에 한 칸 정자와 석문(石門)·석담(石潭)·석천(石泉)·석폭(石瀑)·석대(石臺)·희황교(羲皇橋)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특히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 지금도 석실 앞에는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과 차를 끓여 마신 차 바위가 남아있다. 낙서재를 비롯하여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낙서재에서 바라본 동천석실(아래는 확대본)
▲동천석실
▲동천석실의 석담, 석천, 화응교
▲동천석실 앞의 차바위
▲동천석실 앞의 용바위
►흥취(興趣)의 미학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인 1651년(효종 2)에 지은 것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을 각 10수씩 40수로 하여 세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과 한 몸이 되어 사는 강호한정(江湖閑情)을 노래한 것이다.
고려 후기의 「어부가」를 이어받아 다시 창작한 것으로, 이현보의 「어부사」나 그 밖의 어부가에 속하는 노래는 한시에 여음이 붙어 있으나, 연시조「어부사시사」는 순우리말로 여음을 새롭게 썼다. 또한,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였다. 「오우가」와 함께 윤선도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고산유고>에 실려 전한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맑고도 깊은 소(연못)에 온갖 고기 뛰어논다.” - 춘사(春詞) 4
“연잎에 밥 싸 두고 반찬일랑 장만 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청약립(靑蒻笠)은 쓰고 있노라 녹사의(綠蓑衣)는 가져 왔느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갈매기는 내가 쫓는가 제가 쫓는가?” -하사(夏詞) 2
“물외(物外)에 조용한 일이 어부 생애 아니더냐?/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옹(漁翁)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사계절 흥이 한가지나 추강(秋江)이 으뜸이라.” -추사(秋詞) 1
“간밤에 눈 갠 후에 경치가 달라졌구나!/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앞에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에는 천첩옥산(千疊玉山)/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이것이 선계(仙界) 불계(佛界)인가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 동사(冬詞) 4
작품마다 여음(餘音)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 여음은 출범에서 귀선까지의 과정을 정연하게 보여준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1)/ 닻 들어라 닻 들어라(2)/ 돛 달아라 돛 달아라(3)/ 노 저어라 노 저어라(4, 5)/ 돛 내려라 돛 내려라(6)/ 배 세워라 배 세워라(7)/ 배 매어라 배 매어라(8)/ 닻 내려라 닻 내려라(9)/ 배 붙여라 배 붙여라(10)” 즉, 먼저 배를 띄우고, 닻을 들고, 돛을 달고, 노를 저으며 노래를 읊는다. 그러다가 돛을 내리고, 배를 세우고, 배를 매어 놓고, 닻을 내리고, 배를 뭍으로 붙여놓는 것으로 여음이 짜여 있다.
보길도에 은거하며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유유자적한 삶을 표현한 작품이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표현함으로써 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夢天謠)」 5수, 「우후요(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문학관 내에 전시된 「어부사시사」 관련 전시물
▲고산 윤선도의 시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
▻고산의 고고(孤高)한 삶
윤선도의 호는 ‘고산((孤山)’이다. 그의 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의하면, ‘고산(孤山)’은 양주에 있는 산으로 윤선도의 별장이 있던 곳이며 ‘퇴매재산’이라 불렀다. 홍수가 나서 범람하면 평야 지대는 온통 물에 잠기고 이 산만 우뚝 솟아 보였다. 윤선도는 이 산이 세상의 비난과 비방에 맞서 홀로 선 자신의 기질과 닮았다고 해서 호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고산 윤선도의 삶은 진흙탕 같은 세상에서도 고고하게 살았다. 30살 나이(1616년)에 권신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질책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부터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경원·기장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으로 유배를 당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 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 문제가 대두되자 남인파인 윤선도는 송시열·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써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했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 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며,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도 불린다.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이 보길도 백도리 끝 바닷가 바위에 글을 남겼다. 우암은 세자 책봉 문제로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83세의 노령으로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보길도 백도리 끝 바닷가의 병풍처럼 생긴 바위에 탄식의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이 바위를 "글씐바위"라고 한다.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 (팔십삼세옹 창파만리중)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일언호대죄 삼출역운궁)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 (북구골첨일 남명단신풍)
貂裘舊恩在, 感激泣孤衷 (초구구은재 감격읍고충)
<해석> “여든 셋 늙은이가, 멀고 먼 푸른 바다 가운데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로서니, 여러 번 쫓겨남에 또한 궁한 내 신세여/ 북녘 하늘 공연히 해를 바라보면서, 남쪽 바다 순풍이 올 것임을 다만 믿노라./ 담비갖옷 내려주셨던 옛 은혜가 있어, 북받치는 감정에 고독한 충정으로 슬피 우노라”
▲송시열의 글씐바위의 글 해설
이밖에도 보길도에는 ‘어부사시사 테마 길’도 조성되어 있고, 예송리 상록수림과 예송리 몽돌해변(천연기념물 제40호), 보옥리 공룡알 해변, 보길도 격자봉 자락 7개 등산코스 등 보길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고산 윤선도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등산코스가 있다. 어디를 가든지 고산 윤선도의 문향을 느낄 수 있다.
윤선도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예송리 해변 자갈을 밟고 건너편 예작도를 바라보면 조석으로, 지는 해의 찬미와 함께 황홀한 일출 광경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윤선도의 풍류와 문학을 음미하는 보길도의 밤바다는 아름다웠고, 예송리 바다 자갈밭은 파도도 잠에 취하듯 밤하늘의 은빛도 황홀했다.
▲보길도 공룡알 해변
►보길도 가는 길
보길도로 가기 위해서는 노화도를 거친다. 두 섬은 해상교량으로 연결돼 있다. 완도 화흥포항과 노화도 동천항 간 여객선은 하루 11회, 해남 땅끝항과 노화도 산양항 간은 하루 24회 왕복한다. 배는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항한다.
어느 항구를 이용해도 약 30분이 걸린다. 단 섬 안에서 자유로이 이동하려면 차량이 필수다. 땅끝항 기준 편도 승선료는 일반 승용 차량 1만 8,000원, 성인 6,500원이다.
◎상세정보
▻보길 윤선도문학관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184, 061-552-3216
▻보길도 윤선도 원림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200
▻세연정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길 57구(부황리 572-2)
▻낙서재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411
▻곡수당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602
▻동천석실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산 60-5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 : 전남 완도군 보길면 중통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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