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해남 고산윤선도유적지, 윤선도의 인생과 문학이 깃든 녹우당(綠雨堂)

by 혜강(惠江) 2022. 2. 9.

 

 

해남 고산윤선도유적지

 

윤선도의 인생과 문학이 깃든 녹우당(綠雨堂)

 

 

글·사진 남상학

 

 

▲해남 고산윤선도유적지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그곳에는 조선조의 문신이자, 국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1968년 12월 19일 사적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윤선도는 조선 중기, 당쟁의 와중에서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하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오우가」와 「어부사시사」 등 많은 시조를 써서 정철 ·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시가인(三大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남도 문화관광의 핵심 답사코스인 해남 윤선도 유적지에는 고산이 살았던 사랑채인 녹우당(綠雨堂)이 안채와 ‘ㅁ’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 시대 상류 주택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고산윤선도유적지 종합안내도

 

  고산 윤선도의 고향집은 500여 년 전 입향하여 본관을 얻은 윤선도의 4대 조부인 어초은 윤효정(1476∼1543과 )으로부터 시작하여, 5대 윤선도(1587-1671), 8대 윤두서(1688-1715)에 이르기까지 조선 시대 출중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녹우당은 효종이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인데, 뒷날 바다를 통해 그대로 고향으로 옮겨서 지은 집이다. 이처럼 오랜 전통을 이어온 해남 윤씨 어초은파의 종가 고택인 녹우당은 덕음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벼루봉과 그 오른쪽에 필봉이 드리운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 중의 하나로도 알려진 곳이다.

 

 

▲솟을대문

 

▲추원당(고산의 고조부 4대조) 윤효정의 재각

 

  녹우당은 15세기 중엽의 건물로서 전남 지방에 현존하는 주택 중 가장 큰 규모로 1968년 12월 19일, 사적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녹우당(綠雨堂)’이라는 현판은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형인 옥동 이서(玉洞 李漵, 1622-1723)의 글씨다. 이서는 고산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와 가까운 친구였다. 천하에 명필로 유명한 이서가 친구를 위해 써준 글씨가 지금의 현판으로 걸려있다.

 

 

▲사랑채 녹우당과 회화나무

 

 

▲녹우당 현판

 

  남동향으로 낸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 마당으로 들어서면, 전면에는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고 서남쪽 담 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사랑채는 침방·사랑방·대청이 一자로 늘어서고 전면에 차양을 달았다. 사랑채의 침방 옆에는 작은 마루를 두고 그 뒤쪽에 곳간을 두어 안채의 부엌 칸과 연속시키고 있다.

 

  사랑채 뒤 동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고, 안채가 ㄷ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자리 잡고 있다. 서쪽으로 부엌·안방·작은 대청을 일렬로 늘어놓고, ㄱ자로 꺾이어 큰 대청을 두었다. 다시 ㄱ자로 꺾이면서 방·함실 아궁이 부엌·방·곳간을 두어 중문까지 연결했다. 부엌문을 나서면 안방 동북쪽으로 장독대·닭장·광들이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에 따로 쌓은 담장 속에 한 채가 있고 또, 담장 밖에 따로 고산 사당과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을 세웠다.

 

 

▲고산산당(위)과 어초은 사당(아래)

 

  안채 뒤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진 후원이 있다. 솟을대문 앞쪽에는 노비 집이 부엌과 방으로 ᄀ자 평면을 이루면서 건축되어 있다.  입구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상징이듯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있고, 뒷산에는 500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우거져 있다.

 

 

▲녹우당 은행나무(위)와 비자림 숲(아래)

 

  고산유물전시관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 『산중신곡집』(보물 제482호), 『어부사시사집』 등의 지정문화재와 3천여 건의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고산유물전시관과 전시물

 

▲고산 윤선도 존영(위)와 윤두서 자화상(아래)

 

  인근에 윤선도의 원림인 금쇄동은 윤선도가 1642년(인조 18) 그의 나이 54세 때 해남 금쇄동과 수정동의 첩첩산중에 머물면서 틈틈이 자연 속에 인공적인 원림을 조성한 조형공간이다.

 

  윤선도가 금쇄석궤(황금의 자물쇠로 잠긴 궤)를 얻는 꿈을 꾸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꿈과 부합되는 이곳을 찾아서 그 이름을 ‘금쇄동’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하늘이 다듬고 귀신이 감춰 온 곳인 셈인데, 여기서 그는 「오우가」와 「금쇄동기」를 지었다.

 

 

▲금쇄동 사적도

 

「산중신곡」 18수에 속해 있는 오우가(五友歌)」 6수는 1642년(인조 20) 금쇄동(金鎖洞, 전남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 181)에 은거하면서 지었다. 윤선도가 아름다운 금쇄동을 발견한 것은 1640년 그의 나이 54세가 되던 해였다.

 

  윤선도는 이곳에 몇 년간 머물며 넓은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문학의 터전을 마련하고 「금쇄동기」, 「산중신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또한, 주변의 명소 22곳에 이름을 붙여 금쇄동의 아름다운 경치를 소개했다.

 

  특히「오우가」는 서사에 해당하는 첫수와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을 읊은 각 1수씩으로 되어 있는 시조로 널리 애송되었다.

 

  “내 벗이 몇이야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빚이 깨끗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많구나/ 조코도 그칠 이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九泉)의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리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광명(光明)이 너만 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 윤선도의 「오우가」 6수

 

 

 

 

 

  서사인 첫수에 이어 둘째 수는 물의 그침 없음(부단)을, 셋째 수는 바위의 변함없음(불변)을, 넷째 수는 눈서리를 모르는 소나무의 뿌리 깊음(불굴)을, 다섯째 수는 대나무의 푸르름(불욕)을, 여섯째 수는 만물을 비춰주는 달의 말없음(불언)을 노래했다.

 

  모두 자연관찰을 통해 의미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인간이 지켜야 할 덕목과 연결해 생각하도록 언어화했다. 좌절을 안겨준 현실에 무상함을 느끼면서 변하지 않는 자연의 다섯 벗을 찬양하였다.

 

  당쟁에 휘말려 무려 8년에 이르는 긴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해남으로 돌아온 윤선도는 녹우당에 거주하면서 보길도 부용동과 금쇄동을 왕래하며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보길도 부용동에 세연정, 낙서재, 동천석실 등을 지었다.

 

   만년에는 보길도의 부용동으로 들어가 우국충정을 달래며, 가곡을 지어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오우가」, 「어부사시사」, 「산중신곡」, 「속산중신곡」을 읊조리면서 노년의 안온한 삶을 보냈다.

 

 

▲윤선도 어부사시사 시비

 

  1671년 보길도 낙서재에서 85세를 일기로 사망한 윤선도의 묘소는 금쇄동(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 183-7)에 모셔져 있다.

 

 

▲고산 윤선도 묘소와 제각

 

 

◎상세정보

 

▻주소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5 (연동리 82)

▻전화 : 061-530-5548

▻관람 : 09:00~18:00

▻휴무 : 월요일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