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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경기 고양 송강마을에 '송강문학관'을 세우자.

by 혜강(惠江) 2022. 1. 26.

 

 

경기 고양  송강마을

 

고양시 송강마을에 '송강문학관'을 세우자.

 

 

글·사진 남상학

 

 

 

 

 

  몇년 전 친구들과 고양의 ‘송강누리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송강마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대문호의 이름을 딴 마을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길가에 세운 시비를 둘러보고 문학관이 있다고 하여 찾았으나 문이 잠겨있어 무척 아쉬웠기에 몇 번을 벼르다가 송강마을을 다시 찾아갔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송강마을은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 송강 정철이 여생을 보내며 시조를 읊던 송강 문학의 고향이다.

 

  송강 정철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이미 25세에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고,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관동지역의 아름다움을 「관동별곡(關東別曲)」이라는 글로 담아냈고, 50이 훌쩍 넘은 만년에 고향인 공릉천과 전라도 담양에서 유유자적하며 4년 동안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이 몸 생겼을 때 임을 좇아 생겼으니/ 한평생의 연분임을 하늘이 모를런가/ 나 하나 젊어 있고 임 하나 날 사랑하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가 전혀 없다/ 평생에 원하오되 함께 지내자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로이 두고 그리는고/ 엊그제 임을 모시고 광한전에 올랐더니/ 그 동안에 어찌하여 하계에 내려왔느냐/ 올 적에 빗은 머리 헝클어진 지 삼년이라.……(이하 생략) -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현대어 풀이

 

  1585년 송강 정철은 당쟁이 발생해 동인이 서인을 공격하는 바람에 탄핵을 받고 조정에서 물러나, 고양을 거쳐 고향 담양 창평으로 내려가 한가하게 지내던 시절에 지은 작품이다. 정철은 선조를 향한 그리움의 정을 임을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여인의 마음으로 표현하며 자신의 충정을 토로했다.

 

 

▲가사문학의 거장 정철에 대한 설명판 

 

 

  이들 가사작품은 한문으로 된 글을 문학의 진면목으로 여기던 시대에 한문 투를 벗어던지고 우리 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차원 높은 예술 언어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가 하면 송강은 목민관으로서 훈민가(訓民歌) 16수의 시조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효제충신의 덕목을 교화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 같은 가없은 은덕을 어떻게 다 갚사오리”는 부생모육(父生母育)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아/ 뉘 손에 태어났기 모양조차 같은가/ 한 젖 먹고 길러 났으니 딴마음을 먹지 마라”라는 글은 형제간의 반목을 금하고 우애 있게 지내기를 권하는 내용이다.

 

 

▲시조 훈민가의 일부 (시비에 새긴 글)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백성들을 계몽하고 교화하기 위하여 지은 작품으로 일명 ‘경민가(警民歌)’ 또는 ‘권민가(勸民歌)’라고도 한다.

 

  송강 정철은 중후반 부친상, 모친상을 잇달아 치르며 신원동에 부모의 묘를 모시고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6년간 시묘살이를 했다고 전한다. 그런 이유로 신원동 송강마을은 송강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옛 이름들이 곳곳에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인근의 곡릉천은 송강이 풍류를 즐기며 시조를 짓던 곳이라 하여 ‘송강보’라 부르며, 마을의 서쪽에는 ‘송강 고개’가 있고, 절벽 밑으로는 ‘송강 낚시터’가 있다.

 

  또, 송강 정철 선생의 일가 묘를 비롯해 송강이 만년에 아끼던 기생 강아 아씨의 묘는 송강의 묘가 조선 숙종 대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에 의해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로 이장되면서 강아의 묘소만 그대로 남게 됐다. 일가의 묘역에 송강 정철의 초장묘 자리임을 보여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송강 정철의 초장묘 표지석(위), 강아의 묘(아래)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어/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一園春色紫薇花 纔看佳人勝玉釵 莫向長安樓上望 滿街爭是戀芳華)

 

  이 글은 송강 정철이 강아 아씨를처믐 만났을 때 지은 시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 탈환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의기로도 평가받고 있는 강아는 한평생을 송강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지내다 끝내 송강마을에서 숨진 여인이다.

 

  송강마을 입구에는 송강 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997년 향토문화연구원 이은만 원장이 주축이 되어 3년여에 걸쳐 12개의 송강시비를 세우고, 이어 마을에 1998년 송강문학관을 개관했다.

 

 

▲정철 시비공원에는 12개의 시비가 세워졌고, 앞으로 18개를 더 세을 계획이라고 한다.

 

  이은만 원장은 고양문화원장 재임 시절 고양군 지명유래집을 출간할 당시송강 정철 선생과 연관된 지명송강의 가족묘그를 사모하던 기생 강아의 묘를 확인하면서 송강 시비공원과 송강문학관을 설계해온 장본인이다한 개인의 열정과 의욕이 일궈낸 결과물이다.

 

  송강의 문학사적 업적을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세워진 아담한 한옥의 송강문학관에는 송강의 족보, 송강 문집, 송강과 송강문학에 대한 각종 연구자료와 중국 두보의 시 모음집 두보집과 부녀자들의 언행을 교육시키는 책으로 알려진 계녀서 등 여러 가지 고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간 송강문학관은 개인이 운영하는 관계로 관리와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멀리서 탐방자들이 찾아와도 문이 닫혀 있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 왔다.

 

  그런데 필자가 다시 찾아갔을 때는 문학관 운영은 이미 중단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고, 문학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사찰 용도로 임대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운영을 중단하고 사찰에 임대한 문학관

 

  이유야 어떻든, 조선 시대 대문호의 이름을 지닌 마을에 세웠던 문학관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다니, 안타까운 마음에 앞서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고양시가 나서서 정철의 후손들과 협의하여 버젓한 문학관을 세워 송강마을의 자존심을 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하는 수 없이, 송강 시비공원에 세운 12개의 비석을 둘러보고, 송강보와 죽어서도 송강을 그리워하며 홀로 남아있는 강아 아씨 묘를 찾아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송강보'로 일컬어지는 공룡천

 

◎상세정보

 

▻시비공원 주소 :경기 고양시 덕양구 호국로 1283번길 (신원동 570)

▻교통편 : 원당 시청 앞에서 의정부방면 버스를 타고 송강마을 입구에 하차. 원당에서 고양동(의정부) 방면으로 직진하다 고가도로 아랫길로 빠진 직후 유턴 100m 직진 후 오른쪽으로 송강마을이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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