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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강화문학관, 강화와 관련된 문인과 수필가 조경희 문학이 한자리에

by 혜강(惠江) 2022. 2. 13.


강화문학관

 

강화와 관련된 문인과 수필가 조경희 문학이 한자리에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 40

 

글·사진 남상학

 

 

 

  유구한 역사문화의 고장인 강화는 한성(서울)으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몽골과의 전쟁,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국난극복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지역이다. 이렇듯 외침으로 수난이 많았던 곳이기에 강화도가 국난극복의 상징이 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초지진과 광성보 등 국방유적이 주목받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 대몽항쟁의 근거지인 고려궁지와 철종임금의 잠저인 용흥궁, 그리고 성공회 성당과 연접해 있는 강화문학관은 강화도가 문무(文武)의 조화와 융합을 바탕으로 나라의 생명줄을 이어온 땅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강화읍 관청길 용흥궁공원 북쪽에 자리 잡은 강화문학관은 강화 출신의 수필가 조경희 선생이 자신의 유물을 강화도에 기증함으로써 설립되었다.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인과 풍부한 작품을 남긴 강화문학의 세계가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펼쳐진다.

 

  전체면적 755㎡의 문학관 1층 전시실에는 강화의 자랑스러운 문학 전통을 한눈에 볼 수 있고, 2층은 오늘의 문학관이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수필가 조경희 선생의 문학 세계와 생애를 전해주는 조경희 문학관과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다.

 

 

 

강화와 관련이 있는 문인의 작품 소개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이규보와 정철, 권필, 정제두 등은 강화와 관련이 있는 문인들이다. 이규보의 문학이 꽃핀 곳이 강화이며, 정철과 권필의 삶터가 또한 이곳이었다.

 

 

1층 강화문학관

  1층에는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강화학파, 근·현대의 문학 순으로 그 시대에 활동한 문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인물, 이규보

 

  먼저 고려 시대 민족의 대문호 이규보(1168~1241)는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와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다. 백운거사라는 호를 통해 그가 산촌에 한가롭게 은거하면서 인생을 달관한 멋스러운 일생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삼혹호 선생이라는 호는 세 가지를 몹시 좋아하여 붙여진 것으로서 그 세 가지란, 거문고와 술과 글을 일컫는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나 과거에 여러 차례 떨어졌다. 호탕하고 활달한 시풍(詩風)으로 당대를 풍미했으며, 영웅서사시 「동명왕편」 등을 썼으며,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즉흥시를 쓰기로 유명했다.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충헌에게 등용되어 어용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232년 강화 천도에 적극 찬성하고, 그 이듬해인 1233년 재상이 됨으로써 강화와 관련을 맺었다. 몽골 왕에게 고려에 대한 억압을 누그러뜨려 줄 것을 간구하는 진정표(陳情表)로 유명하다.

 

  저서에는 아들이 간행한 시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이 있다. 미신과 관념론을 비판하고, 한국의 유물론적 사상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특히 이규보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은 전집 41권, 후집 12권으로 전집 41권으로 되어 있다. 전집은 이규보가 아들 함(涵)의 요청으로 손수 편차를 정하고 『동국이상국문집』이라는 이름도 붙여놓은 것이며, 후집 12권은 함이 전집에서 빠진 유작들을 수집하여 만든 것으로, 뒤에 전집과 합하여 간행되었다.

 

  이 가운데 「동명왕편」은 해모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동명왕 탄생 이전에 있었던 일을 노래하고, 동명왕의 출생·시련·투쟁·승리를 영웅의 일생에 맞게 다루고, 끝으로 유리를 등장시켜 삼대의 행적을 두루 보여준 영웅서사시이다.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版君臣祈告文), 고려 때 대장경을 만들며 부처와 보살에게 올린 글. 1237년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다.

 

  또 이규보는 한시를 많이 지었는데, 그중에서 회문시(回文詩) 한 편, 「미인원(美人怨)」을 옮겨본다.

 

   腸斷啼鶯春(장단제앵춘) 꾀꼬리 우는 봄날 애간장 타는데

   落花紅簇地(낙화홍족지) 꽃은 떨어져 온 땅을 붉게 덮었구나

   香衾曉枕孤(향금효침고) 이불 속 새벽잠은 외롭기만 하여

   玉瞼雙流淚(옥검쌍류누) 고운 뺨엔 두 줄기 눈물 흐르누나

   郞信薄如雲(랑신박여운) 님의 약속 믿음 없기 뜬구름 같고

   妾情撓似水(첩정요사수) 이내 마음 일렁이는 강물 같누나

   長日度與誰(장일도여구) 긴긴 밤을 그 누구와 함께 지내며

   皺却愁眉翠(추각수미취) 수심에 찡그린 눈썹을 펼 수 있을까(順讀)

   翠眉愁却皺(취미수각추) 푸른 눈썹은 수심 겨워 찌푸려 있는데

   誰與度日長(수여도일장) 뉘와 함께 긴긴 밤을 지내어 볼까

   水似撓情妾(수사요정첩) 강물은 내 마음인 양 출렁거리고

   雲如薄信郎(운여박신랑) 구름은 신의 없는 님의 마음 같아라

   淚流雙검玉(누류쌍검옥) 두 뺨에 옥 같은 눈물 흐르고

   孤枕曉衾香(고침효금향) 외론 베개 새벽 이불만 향기롭구나

   地簇紅花落(지족홍화낙) 땅 가득히 붉은 꽃이 떨어지고

   春鶯啼斷腸(춘앵제단장) 봄 꾀꼬리 우는 소리에 애간장 타누나(逆讀)

 

  이 시에는 사랑한다는 말만 하고 떠나버린 임을 그리는 마음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단장’으로 시작해서 ‘취’자로 끝나고, 다시 ‘취’자로 시작해서 ‘단장’으로 끝난다.

 

  회문시(回文詩)는 한시의 별체(別體)로, 시를 첫머리에서부터 내리읽어도, 반대로 뒤에서부터 거꾸로 올려 읽어도 의미가 통할 뿐만 아니라, 시법(詩法)에도 어긋나지 않게 지은 시를 말한다.

 

  또, 바둑판처럼 글자를 배열하여 중앙으로부터 선회하면서 읽어도 뜻이 통하는 것도 있다. 순독(順讀), 역독(逆讀), 선회독(旋回讀)이 가능한 시가 회문 시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선회독의 시는 없어졌다.

 

  회문시는 시인들이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기법을 추구하고자 고심에 찬 노력 끝에 창조된 것이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을 절묘하게 살려서 짓는 회문시는 한 수에 두 수의 뜻을 형상화할 수 있는 아주 경제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 문인으로 이규보 외에 『보한집』의 최자, 『익재난고』, 역옹패설』의 이제현, 『목은유고』·『목은시고』의 이색, 함허 등도 강화도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조선 시대의 인물

 

가사문학의 절정 송강

 

  조선 시대의 문인으로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불우했던 천재 시인 권필, 강화도에 충절을 바친 김상용 등을 소개하고 있다.

 

  정철(鄭澈, 1536~1593)은 조선 전기 문신 겸 시인으로 호는 송강.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4년간 은거 생활을 하였다. 만년에 강화도의 벗 권필(權韠)을 찾아 송정촌에 머물다가 1593년 12월 18일 58세에 사망하였다. 이듬해(1594) 그의 주검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월리에 장사했다.

 

  작품에는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연시조인 「훈민가」와 사설시조인 「장진주사」 등 시조 107수 등이 있다. 당대 가사 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불우했던 천재시인 권필

 

  권필(權韠, 1569~1612)은 송강 정철의 문인이다.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젊을 때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찾아가기도 했으며,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광해군의 비인 유씨의 동생등 외척들의 방종을 비난하는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풍자, 비방한 것이 탄로되어 해남으로 귀양가다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석주집(石洲集)』과 한문 소설 「주생전(周生傳)」이 현전한다.

 

 

강화도에 바친 충절 김상용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노서의 영수로, 병자호란 때 순국했다. 좌의정 상헌(尙憲)이 그의 동생이다. 정유길에게 고문과 시를, 박수(朴受)에게 『주역』을, 윤기(尹箕)에게 『춘추좌씨전』을 배웠으며, 이이(李珥)를 사숙했다. 성혼의 문인이기도 하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 부정자·예문관검열을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동했다.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嬪宮)·원손(元孫)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강도가 함락되자 초문에 쌓아놓은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그는 시와 글씨에도 뛰어나서 시조로는 오륜가, 훈계자속가, 9편이 전하고, 문집으로선원유고, 독례수초 등이 있다.

 

 

●강화학파(江華學派)

 

강화도의 정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강화학파 코너에는 강화도의 정신인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그 마지막 학자인 정인보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조선 후기에 정제두(鄭齊斗)를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양명학을 공부하였던 유파를 일컫는 말이다. ‘강화학파’란 용어는 1988년에 민영규(閔泳珪)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대개 정치적으로 소론(少論)에 속하였다.

 

  정제두는 벼슬을 잠시 지내고,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체계를 완성하였다. 저서에 『하곡집』, 『성학설(聖學說)』, 『경학집요(經學集要)』가 있다.

 

  흔히 강화학파의 학문적 경향은 양명학으로 이해되지만, 정제두의 학문은 중국의 양명학과 다른 조선적 양명학을 이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강화학은 근대적 사상으로 변모되어 정인보·박은식·신채호 등 한말 일제하의 민족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시원의 『국조문헌』, 이건창의 『당의통략』은 매우 자료적 가치가 높은 역사서이며, 이광사의 『오음정서』, 유희의 『언문지』 등은 우리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이다. 강화학파는 노장사상(老莊思想) 및 불교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강화학파는 정약용의 학문을 연구하고 결합하여 민중적 성격을 더욱 발전시켰고, 이렇게 결합된 학문은 일제시대 민족주의자들의 이념을 형성하는 사상적 토대로 작용했다.

 

 

 

강화학파의 마지막 학자, 정인보

 

한문학의 대가인 정인보(鄭寅普,1893~1950)의 호는 담원(薝園), 아호는 위당(爲堂). 조선 역사 연구의 근본을 '단군조 이래 5,000년간 맥맥히 흘러온 얼'에서 찾고 조선 역사는 곧 한민족의 '얼의 역사'임을 강조했으며, '국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고 국학연구의 기초를 '실학'에서 찾았다.

 

  1913년 중국에 유학하여 동양학을 공부하고, 일찍이 문학에 전념한 그는 1920년대 중반부터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시조 「가신 님」, 「자모사(子母思)」 등에 담아 노래했고, 국민문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시조 부흥운동에도 참여했다.

 

  1946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조선사연구』를 펴냈으며, 주자학자들의 공리공론과 존화사상을 없애고자 유학의 개혁을 주장했다.

 

  30여 년을 두고 대학 강단에서 국고(國故)·절의(節義)·실학·양명학과 역사학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국혼(國魂)·경세(警世)·효민(曉民)의 학덕이 높았던 학자이며 교육자였다.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인 31절, 제헌절, 광복정, 개천절 가사를 지었다. 저서로는 『담원시조집』, 『담원국학산고』, 『담원문록』, 『담원정인보전집』이 있다.

 

 

 

 

●근/현대문학 /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

 

  근/현대문학 코너에는 전통문화가 근현대의 문학으로 계승되고 발전하고 있는 모습, 100년 전 강화도 기행, 신도 기행, 일제 강점기의 문학이 전시되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1919년 경술국치까지의 개화기 문학의 발판 위에 형성된 근대문학을 거쳐 20세기 초에 전개된 신문학 운동으로부터 8·15 광복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대문학은 20세기 고전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서구문학의 기법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며 발전해 왔다.

 

  1906년, 강화도 선비 화남 고재형(華南 高在亨, 1846-1916)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이 나왔다. 심도는 강화의 별칭으로, 이 책은 강화도를 두루 여행하며 쓴 기행시문이다.

 

 『심도기행』에 수록된 칠언절구 256수의 한시(漢詩)는 강화의 오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길러낸 수많은 의인과 지사들의 행적에 바치는 아낌없는 찬가(讚歌)이다. 오늘날의 ‘강화나들길’은 이 『심도기행』을 모태로 발전한 것이다.

 

 

 

 

2층 수필가 조경희 문학관

 

  2층은 강화 출신으로 지난 2005년 타계한 수필가 조경희 선생을 기리기 위한 수필 문학관이다. 이곳에는 조경희 선생의 육필원고와 생전 사용하던 책상, 안경 등 미술품 40여 점이 전시되어 있고, 서재도 재현해 놓아 그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볼 수 있다.

 

 

 

  조경희 선생은 1918년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출생이다. 호는 월당(月當)이다.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인 1938년 잡지 『한글』에 수필 「측간 단상」, 『조선일보』에 「영화론」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조선일보을 비롯한 여러 신문사 기자, 주간, 부장, 국장,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한국 여기자클럽 부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라고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 회장, 한국수필가협회 회장,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과 이사, 한국예총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1984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제6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여성 정책을 전담하는 정무 제2 장관실이 신설되면서 초대 정무 제2 장관을 지냈으며, 예술의전당 이사장, 서울예술단 이사장, 한국여성개발원 이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우화』, 『가깝고 먼 세계』, 『음치의 자장가』, 『얼굴』, 『면역의 원리』, 『골목은 아침에 나보다 늦게 깬다.』, 『Three Essayist from Korea』, 『웃음이 어울리는 시대』, 『낙엽의 침묵』, 『치자꽃』, 『하얀 꽃들』, 『언제나 새길을 밝고 힘차게: 조경희 자서전』 등이 있다.

 

 

 

  한국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본상, 청조근정훈장, 프랑스 예술 문학공로상, 춘강상, 은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이 있다. 2005년 8월 5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소중한 정신문화의 상징이기도 한 강화도는 그동안 숱한 대외항쟁 지로 주목을 받으면서 빛나는 정신문화유산이 평가절하된 것 같아 안타깝다. 늦게나마 강화에 개관한 문학관이 규모가 작고, 볼거리가 다양한 것도 아니지만, 존재 가치와 이유가 분명한 매우 소중한 문화 공간이다.

 

  앞으로 강화의 유서 깊은 역사문화와 민족문화의 전통을 전시하고 있는 강화문학관은 자라나는 후세에게 문학의 꿈과 희망을 키워주고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소중한 쉼터로 거듭날 것이다.

 

 

◎상세정보

 

▻주소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 40 (강화읍 관청리 394-1)

▻전화 : 032-933-0605

▻관람 : 오전 9시~오후 6시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기타 강화군수가 정하는 휴관일

▻주차 : 무료 (문학관 앞 용흥궁 공원 활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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