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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오장환 문학관 탐방, 세찬 바람에도 불꽃같이 살고자 했던 오장환

by 혜강(惠江) 2021. 12. 21.

 

오장환 문학관 탐방

 

세찬 바람에도 불꽃같이 살고자 했던 오장환

 

 

글·사진 남상학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 ⃫  단 한 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 ⃫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아가거라 ⃫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 ⃫  단 한 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시인 오장환(吳章煥, 1918~1951)의 시집 《헌사》에 수록된  <나의 노래>라는 시다.  문학관 앞마당 시비에 새겨져 있다. 어머니, 고향 그리고 조국. 비운의 역사 속에서도 항상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고 조국의 현실을 아파하며 희망적인 미래를 갈망하던 아름다운 시인!

 

 

 

 

 

  오장환은 1930년 일제강점기 때의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시적 향기를 찾아 오장환 문학관으로 떠났다. 2006년 10월에 개관한 오장환문학관은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 오장환 생가 옆에 있다.

 

  시인으로 활동하다 월북해 고향인 보은군 회인에서도 잊혔던 시인은 1988년 납북·월북작가 해금조치로 새롭게 연구·조명되기 시작하였고, 2006년 회인에 오장환 문학관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길목 입구에는 마을 주민의 배려로 하얀 담장에 오장환 시인의 시 <종이 비행기>와 <해바라기> 두 작품이 예쁜 벽화와 함께 새겨져 있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먼저 우측으로 영상실이 있다. 이곳에선 다큐멘타리 영상자료를 통하여 오장환의 삶과 문학을 접할 수 있다.

 

 

 

 

 

01. 영상실

 

  입구에 들어가면 우측에 영상실이 있다. 영상실에서는 전시회 관람에 앞서 다큐멘타리 영상을 상영하여 오장환 시인의 오장환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 알려준다. 

 

 

 

 

 

 

02. 나의 길/ 해설이 있는 시집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스승 정지용 시인과의 만남과 남포 적십자병원에서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 오장환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단막극 형식의 영상과 오장환 시인의 대표시 12편을 해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휘문고 교지 《휘문》에 실린 초기 시, 방정환 선생이 만든 《어린이》지, 《조선일보》 등에 발표한 오장환 시인의 동시, 이육사 시인에게 보낸 친필 엽서, 해방 후 중학교 5, 6학년 교과서에 실린 시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주옥같은 그의 시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바다>, <절정의 노래>, <병든 서울>, <기러기> 등 그의 시들을 읽는 사이, 시를 읽는 행복에 빠져든다. 어느새 시인처럼 고향과 어머니, 희망과 조국이 가슴속에 차오른다.

 

 

 

 

 

03. 오장환 시집

 

 「성벽」, 「병든서울」, 「헌사」, 「나 사는 곳」, 「에세닌 시집」, 「붉은 기」 등 오장환 시인의 시집을 볼 수 있다.

 

 

 

 

 

04. 오장환 문학의 재발견

 

  오장환 시인의 초기시, 동시, 장시, 산문 및 평론 등을 비롯하여 해금조치 이후 꾸준히 진행된 연구논문 및 자료 등 오장환의 문학 세계를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오장환은 동화적 상상의 동시를 많이 썼다. 1934년 <애기꿈>, <소꿉놀이>, <맴맴> 등 41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그해 12월 소파 방정환이 창간한 《어린이》지에도 <바다>, <기러기>, <수염> 등을 비롯해 3편의 동시를 발표하는 등 시인으로서 전성기에 들어선다. 1936년에도 조선일보에 발표한 <우리 차지>, <용남이와 앵도나무> 등을 발표하였다.

 

 

 

 

 

05. 시인 오장환

 

  시인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문학사 그리고 지인, 친구들을 통해 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오장환문학관에서는 해마다 ‘오장환문학제’가 개최되어 현재까지 매년 기념행사 및 백일장, 그림 그리기 대회, 시 낭송대회, 문학강연 등이 열리고 있다. 「오장환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도종환 시인이 오장환문학관 명예관장으로 있다.

 

 

 

시인 오장환의 생애와 문학 활동

 

 

 

  오장환(吳章煥, 1918~1951)은 정지용 시인의 제자이자 백석, 이용악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부승지 벼슬을 지낸 아버지 오학근과 어머니 한학수 여사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박두진과는 안성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1931년 서울 휘문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충북 옥천 출신 정지용과는 사제지간으로 만나 정지용 시인에게 시를 배웠다. 이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교지 『휘문』에 <아침>, <화염> 등 시를 발표하였고,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4년 <애기꿈>, <소꿉놀이>, <맴맴> 등 마흔한 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그해 12월 소파 방정환이 창간한 《어린이》지에도 <바다>를 비롯해 3편의 동시를 발표하는 등 시인으로서 전성기에 들어선다.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소년 오장환은 1935년 동경 유학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한국 근대문학 최초의 장시 <전쟁>를 발표한다. 18세의 나이에 오장환은 이 장시 <전쟁>에서 식민지 지배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1936년 19세, 김동리, 서정주, 김달진, 함형수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1집에 <성벽>을 비롯한 많은 시를 발표한다.

 

  “세세전대만년성世世傳代萬年盛)하리라는 성벽은 편협한 야심처럼 검고 빽빽하거니 그러나 보수는 진보를 허락하지 않아 뜨거운 물 끼얹고 고춧가루 뿌리던 성벽은 오래인 휴식에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터거리처럼 지저분하도다.” -<성벽>

 

  이 시에서 보듯이, 그러나 오장환은 인생의 토대인 식민지 현실, 생명이 발현되는 토대인 이 땅과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청각적 이미지와 서정적 양쪽을 다 갖춘 시를 씀으로써 생명파와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또 박세영, 임화, 이찬, 윤곤강, 이용악 등과 함께 《낭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장시 <수부(首府)>를 발표하고, 같은 해 이육사 서정주, 박재륜, 김광규, 신석초, 함형수, 윤곤강 등과 함께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하여 <황무지>, <선부의 노래> 등을 발표하고, 첫 번째 시집 《성벽》, 1939년에 두 번째 시집 《헌사》를 내고 난 뒤에는 “문단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는 찬사를 듣게 된다.

 

 

 

 

 

 

  특히 『헌사』는 막다른 골목과 마주쳐 일어난 향수적 심리가 하나의 모티브로 되어 있어 감상(感傷)과 영탄을 면할 수 없었으나 1940년 <신생의 노래>를 계기로 종전의 영탄에서 벗어나 새 경지를 개척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1940년 창씨개명, 《동아일보》, 《조선일보》 강제 폐간, 1941년 《문장》과 《인문평론》의 강제 폐간 후에는 몸을 낮춘 채, 단 한 편의 친일시를 쓰지 않고 어두운 시대를 견뎠으나 신장병을 앓다가 병상에서 해방을 맞는다.

 

  1946년 3월, 조용히 몸을 움츠리던 그가 다시 일어났다. 5개월도 채 안 되어 매일 일기처럼 쓴 시편들을 모아 《병든 서울》을 발표하였고 해방 기념 문학상 대상 후보작에 오른다. 이 시집은 해방의 감격과 혼란,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꿈과 열정, 부끄러운 심정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내용을 이룬 시집이다.

 

  “8월 15일, 9월 15일,/ 아니, 삼백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가/ 시골 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주 상해 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아/ 그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병든 서울>에서

 

 

 

 

 

 

  다음 해 1947년 정부에서 발행한 국어교과서에 실린 <석탑의 노래>는 문학적 수준이 가장 높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본래 이 시는 1943년 6월 《춘추》에 <절정의 노래>로 발표한 것인데, 중학교 5·6학년 교과서에 <석탑의 노래>로 바꾸어 실렸다.

 

  “탑이 있다./ 누구의 손으로 쌓았는가, 지금은 거칠은 들판/ 모두 다 까맣게 잊혀진 속에/ 무거운 입 다물고 한없이 서 있는 탑/ 나는 아노라. 뭇 천백 사람,미지와 신비 속에서/ 보드라운 구름 밟고/ 별과 별들에게 기울이는 속삭임. ⃫ 순시(瞬時)라도 아, 젊은 가슴 무여지는/ 덧없는 바래옴/ 탑이여,하늘을 지르는 제일 높은 탑이여!/ 언제부터인가/ 스사로 나는 무게, 아득한 들판에/ 흘로 가없는 적막을 누르고…… ⃫ 몇 차례나 가려다는 돌아서는가./ 고이 다듬는 끌이며 자자하던 이름들/ 설운 이는 모두 다 흙으로 갔으나/ 다만 고요함의 끝 가는 곳에/ 이제도/ 한층 또 한층 주소로 애처로운 단념의 지붕 위에로/ 천년 아니 이천년 발돋움하듯/ 탑이여,머리 드는 탑신이여, 너 홀로 돌이여!/ 어느 곳에 두 팔을 젓는가.”

 

                                                                                                           - 절정의 노래

 

 

 

 

  그는 조선의 문화유산을 찾아 답사를 하며, 고유의 문화유산 속에서 과거를 보고 미래를 생각하며 역사적 전망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지방으로 문화 선전 활동을 다니며 시 낭송 등 활발히 활동하다가 월북함으로써 문단에서 기피인물이 된다.

 

  그후 오장환은 소련 정부의 배려로 모스크바 볼킨병원에서 지병을 치료하며 소련기행시집 《붉은 기》(1950)를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고향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도 돌아오지 못하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신장병으로 병사하였다.

 

 

 

 

 

  이상에서 보듯 오장환의 문학 경향은  대체로 리얼리즘, 모더니즘 계열에 속한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장시 <전쟁>에서 발견되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와 전쟁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두 번째는 봉건적 인습에 대한 비판과 고발이다. <성씨보(姓氏譜)>를 시작으로 <성벽>, ><정문>, <종가> 등이 이에 속한다. 세 번째는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비판이다. 장시 <수부(首府)>는 자본주의화 하는 식민지 근대도시 서울에 대한 비판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다.  네 번째는 당대 농촌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모촌>과 <북방의 길>은 오장환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문학사에서 1930년대 식민지 지배하의 농촌 현실과 농민들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오장환은 표현 기법에 있어서 모더니즘 경향이 뚜렷하다. 예로 <카메라룸>이나 <전쟁>처럼 현대적인 감각과 기법이 두드러진 표현양식을 보이기도 하고, 도시를 배회하는 보헤미안의 퇴폐적인 삶의 모습이 드러낸다. 그러나 오장환의 시에서 발견되는 절망과 퇴폐와 방황은 속악한 식민지 근대에 저항할 수도 동화될 수도 없던 시인의 여린 자아가 분열하는 모습이다. <불길한 노래>, <싸느란 단>, <헌사>, <소야의 노래>와 같은 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오장환 시가 보여준 치열한 현실 인식은 생명파에 속하면서도 생명파와 구분되는 독자성을 보여주며, 모더니즘 시에 속하면서도 모더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 점이 오장환을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세 천재로 불리게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06.문학사랑방과 세미나실

 

  문학사랑방은 시강좌, 시토론, 세미나, 문학 동아리 활동 등이 진행되는 열린 문학공간이다. 시를 사랑하는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지역 주민들은 문학을 공유하고 느낄 수 있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오장환 생가

 

  오장환문학관 옆에 오장환의 생가가 복원되었다. 복원된 집이지만 본래 생가의 벽체와 서까래 등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옛 우물, 감나무 등도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원형을 최대한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가 앞에는 ‘시인 오장환 생가터’를 알리는 돌비가 서있고, 울타리에는 이엉을 덮었고 그 위에 마른 해바라기꽃 무더기를 얹어놓아 운치있게 장식했다.

 

  초가지붕에 방 2개, 마루, 부엌이 전부인 생가에는 다듬이에 수수 빗자루가 놓여있고 마루 한쪽에 뒤주가 있어서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방안 벽에는 오장환의 사진 액자가 붙어 있고, 바닥에는 등잔, 화로, 작은 탁자 위에 등잔대, 호롱불, 고서가 놓여있는데 조금 전까지도 책을 봤을 것 같은 느낌이 전해온다. 물론 이것은 모두 전시용이다.

 

  부엌과 추녀 밑에는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있다. 장작불을 지필 수 있도록 불쏘시개 나뭇가지들도 있다. 장독대 옆으로 우물이 있어서 정겹다. 뒤쪽 울타리의 감나무가 있어 노란 감이 열린 풍경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상세정보

 

►주소 : 충북 보은군 회인면 회인로5길 12 (회인면 중앙리 139-4)

►전화 : 043-540-3776

►관람 : 09:00~17:00 (월요일, 1월 1일, 설 연휴, 추석 연휴 휴관)

►가는 길 : 보은군→ 보은제일로 우편사거리에서 청주/회인방면으로 우회전→ 회인5길에서 좌회전→ 오장환문학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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