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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이병기 생가 및 가람문학관 탐방

by 혜강(惠江) 2021. 12. 17.

 

이병기 생가 및 가람문학관 탐방

 

시조 부흥 운동을 주도한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

 

 

글·사진 남상학

 

 

 

 

▲가람기념광장에서 본 가람 생가와 문힉관 전경

 

  겨울 아침, 가람 이병기 생가와 가람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우중충해 보였다. 그러나 가는 동안 고등학교 재임 시절 학생들에게 이병기의 「난초」를 가르치던 기억이 떠오르자 마음에 낀 구름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이 시조는 <문장> 3호(1939.4)에 발표한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조 「난초」의 일부이다. 이 작품은 난초의 고결한 심성을 예찬하는 것이지만, 난초와 자신을 암시적으로 동일화하여 난초처럼 속세의 추하고 탁한 현실에서 벗어나 고결하고 기품있는 삶을 살아가려 하는 화자의 자세와 난초가 함께 겹쳐진다. 세속적인 삶에 얽매이지 않고 정신적인 삶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때이다.

 

 

 

▲가람믄학관 앞마당의 '가람이병기 선생 좌상'

 

  가람 선생은 시조 작가요, 국문학자로 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고전자료를 많이 수집한 공로도 대단히 컸으며, 그가 평생 수집한 고전자료는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어 있다.

 

   그는 술과 난초와 매화의 향기를 사랑하여 시조 분야에서 주된 공적을 이루었지만, 한중록, 인현왕후전 및 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의 판소리 등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등 서지학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편, 그는 스스로 제자복·화초복·술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이병기 생가, 수우재(守愚齋)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에 있는 이병기 생가는 한국 현대시조의 중흥을 이룩한 시조 시인이며 국문학자였던 이병기가 태어난 집이다. 고풍의 한식 초가로 조선 말기 선비의 가옥 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안채, 사랑채, 헛간, 고방채, 정자 등 여러 채의 초가가 보였다. 

 

  생가로 오른 길 옆 공원에는 박사묘, 선생의 기념비, 동상이 차례로 맞이한다. 그리고 연이어 가람의 시비들이 있어 공원을 거닐며 가람의 시를 음미할 수 있게 했다. 

 

 

 

 

 

  동상 옆 시비에는 그의 시 <고향으로 돌아가자>와 <창>이 가 새겨져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데나 정들면 못살 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쪼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봅시다./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 <고향으로 돌아가자> 전문

 

"우리 방으로는 창窓으로 눈을 삼았다' 종이 한 장으로 우주宇宙를 가렸지만/ 영원히 태양太陽과 함께 밝을 대로 밝는다/ 너의 앞에서는 술 먹기도 두렵다/ 너의 앞에서는 참선參禪키도 어렵다/ 진귀珍貴한 고서古書를 펴어 서권기書卷氣나 기를까/ 나의 추醜와 미美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나의 고苦와 락樂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그러나 나의 임종臨終도 네 앞에서 하려 한다.      - <창> 전문 

 

 

 

 

 

  생가 앞에는 수령이 200년쯤 된다는 탱자나무가 있다.  가람 생가의 탱자나무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될 만큼 유명하다. 둘레 60cm, 높이 5m 정도이며, 지상 1.6m 높이에서 6개의 가지로 나뉘고, 다시 작은 가지가 원뿔꼴로 수관을 형성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독특하다.

 

  수령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병기 선생의 고조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2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탱자나무 뒤의 생가는 '수우재(守愚齋)'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가는 안채, 사랑채, 고방체 등 세 채의 소박한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를 길게 배치했는데 사랑채는 一자 집이다. 

 

  수우재 현판이 붙어 있는 사랑채는  一자 집으로 가람 선생이 평소 기거하던 곳이다. 사랑채 옆에는 슬기를 감추고 겉으로 어리석은 체한다는 뜻을 간직한 '승운정(勝雲亭)'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있다.  그리고 승운정 앞에 연못을 두었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며 평생 지조 있는 선비로 살아온 그의 풍취가 은은하게 느껴진다. 진수당(鎭壽堂)이란 편액이 붙은 끝방은 가람이 책방으로 사용했다.

 

 

 

 

  좁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안채는 호남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ㄱ자 집으로서 잡석 축대 위에 높은 자연석 초석을 사용해 비교적 높게 지었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마주하며, 안방 전면으로 부엌이 돌출한 형태다. 건넌방은 전면과 측면에 툇마루를 시설했는데 전면 툇마루는 대청마루보다 높게 구성해 마루 밑에 아궁이를 만들며 입면(立面)에 변화를 주었다.

 

  안마당에 면한 툇간은 골방과 창고, 다락 등 수장 공간으로 사용한다. 칸살은 동쪽부터 방·부엌·방·방·대문간 및 헛간 순으로 이루어졌다. 

 

  고졸하고 소박한 초가의 모습에서 담백한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이곳에서 가람은 한국 문학사에 뛰어난 발자국을 남기고 말년을 맞이하였다.

 

 

 

 

 

가람 선생 묘소

 

  가람의 묘는 생가 뒤쪽 대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언덕 위에 있다. 생가로 들어서기 전, 우측으로 오솔길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면 몇 기의 가족묘가 있다. 그중에 가람의 묘는 자그마한 묘비만 덩그렇게 세워져 있고, 묘는 아무런 치장 없이 소박한 모습이다.

 

 

 

 

 

가람문학관, 가람의 모든 것

 

 

  가람문학관은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선생의 생가인 수우재 옆에 있다. 한국 근·현대 시조와 국문학을 대표하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선생의 탄생 126주년이 되는 2017년 10월 개관했다.

 

  전체면적 996㎡ 지상 1층 규모로 생가의 경관을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어울리도록 전통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가람문학관은 가람과 마주할 수 있는 영상실, 시조를 음미하는 가람실, 시조 시인, 서지학자, 국문학자, 교육자, 한글 운동가 등 가람의 주요활동과 업적을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는 상설전시실, 관람객이 머물며 가람 정신을 체득할 수 있는 체험실, 세미나실, 문인실, 휴게실 등을 갖췄다.  문학관에 들어서니, 중앙홀에는 가람한시 기획전시 작품이 걸려 있다.

 

 

 

▲가람문학관 안내데스크
▲기획전시물 "가람한시"

 

1. 영상실, 가람과 마주하기

 

  이 코너에서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삶을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약 5분의 프롤로그 영상을 제공하며 해당 영상을 통해 가람의 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2. 가람실, 가람 시조 음미하기

 

  이 코너에서는 가람의 주옥같은 시조 작품을 시청각미디어를 통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즉, ‘시조 하면 가람, 가림 하면 시조!’, 노래로 불린 시조, 술과 제자, 난초를 사랑한 삼복지인 가람, 문학인들이 말하는 가람 등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특히 가곡으로 불린 가람의 시조 ‘별’을 초저녁 밤하늘 아래 분위기에서 들어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3. 상설전시실, 가람 생애 되짚기

 

 

  한편 상설전시실 입구에는 고아하면서도 절제된 난초 조형물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플래시 영상의 상연과 함께 가람의 한글강습회 교실이 연출돼 있다.

 

  상설전시실은 시대적인 격변 속에서 우리 것을 찾고 지켜가는 가람의 삶을 보여준다. 즉, 역사 속에서 발현된 가람의 사명과 신념을 연대기로 보여주는가 하면, 시조 혁신을 위한 노력, 고전 문학을 지키기 위한 노력, 국문학 정립을 위한 노력, 한글 수호를 위한 노력, 후학 양성을 위한 노력을 차례로 보여주고, 그리고 가람의 일기를 전시하여 가람의 생전의 업적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가람은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일기를 썼다. 그는 일기를 통해 일상적인 생활에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과 이에 대한 생각을 간결한 문체로 솔직하게 진술하였고, 그 가운데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고뇌에 찬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일제 강점하의 암흑기를 대쪽처럼 살다간 기록, 3 · 1운동 후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며 괴로워한 기록들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가람 이병기의 삶과 업적>

 

  호는 가람(嘉藍). 시조 작가이면서 국문학자인 이병기는 전라북도 익산 출신이다. 1891년 변호사 이채(李俫)의 큰아들로 태어나 8살 때 고향의 시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

 

  전주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 문법을 배웠다.

 

 

 

 

  1913년 휘문고등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 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0년 9월 『공제(共濟)』 1호에 「수레 뒤에서」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 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다.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고, 1928년에 시조회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시조원류론(時調源流論)」(新生, 1929)·「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후부터 현대적 감각을 띤 새로운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고, 「시조는 혁신하자」라는 글은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이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 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 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을 통하여 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한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 쓰린 괴로움을 말도 차마 못하시고/ 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 까만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동기 어리던 팔구 남매/ 따뜻한 품 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가람 선생은 우리 한글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하여 일찍이 1930년대부터 조선 어문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과 '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 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고향에 내려와 칩거하였다.

 

 

 

 

 

  광복 후 다시 상경하여 서울대학교 교수로 동분서주하였다. 이 무렵부터 한민족의 고전 문학을 현대어로 고치는 일에 힘썼으며,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서울대학교 강사·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중 서울 계동 입구에서 뇌일혈로 졸도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후 10여 년을 병마와 싸우다가 1965년 8월 이후부터는 고향에서 요양하다 1968년 사망했다. 전라북도 예총장(藝總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가람시조집』을 비롯하여 『국문학 개론』·『국문학 전사』·『가람 문선』 등이 있다. 그는 이 밖에 많은 수필을 썼고, 한글 수호를 위한 노력과 후학양성을 위한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가람이 평생 쓴 일기는 놀랄 만하다. 가람은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일기를 썼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고뇌에 찬 모습, 일제 강점하의 암흑기를 대쪽처럼 살면서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작자의 모습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또한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 또한 크다.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으며, 1962년 문화포장을 받았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전라북도 전주시 다가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전시실 내의 유품들>

 

 

 

 

4. 가람 기억 가져가기, 체험실

 

 

 

 

5. 세미나실, 천호산 말길

 

 

 

 

6. 문인실, 문필봉 글줄

 

 

 

 

7. 휴게실, 용화산 능둠

 

 

 

 

◎상세정보

 

►생가 주소 : 전북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64-8 (원수리 573)

►전화 : 063-832-1891

►관람 : 09:00 ~ 18:00 (관람료 무료)

►휴관 : 매주 월요일 (공휴일일 때 다음날), 1월 1일, 설날, 추석날)

►가는 길 : 대중교통-익산역(KTX)에서 좌석 버스 222-1번을 승차하여 신막정류소 하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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