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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필경사·심훈기념관 탐방

by 혜강(惠江) 2021. 12. 9.

 

필경사·심훈기념관 탐방

 

30년대 농촌 계몽운동의 기수(旗手), 심훈의 자취를 찾아가다.

 

 

글·사진 남상학

 

 

 

 

 

  당진은 서해안 지역 중 해가 뜨는 곳으로 유명하다. 바다 위에서 떠오르는 일출로 왜목마을이 많이 알려졌지만, 한진 앞바다는 서해대교 교각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에 있는 심훈 문학의 산실인 필경사(筆耕舍)와 심훈기념관은 서해대교 완공 이후, 수도권에서 손쉽게 다녀올 수 있는 문학유적지가 되었다.

 

  서해안고속도로의 송악 나들목을 빠져나온 뒤, 한진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상록수교회 앞을 지나 논밭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농촌 계몽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 <상록수>의 저자이자 저항시인 겸 영화인인 심훈 선생의 집 필경사와 상록수문학관, 심훈기념관에 닿는다.

 

  넓은 정원에는 심훈의 저항시 <그날이 오면> 시비를 비롯하여 소설 <상록수>와 관련된 조형물, 안내문들이 들어서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중략)/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시비 앞에 서서 시를 읽노라면, 생전의 심훈 선생의 음성을 듣는 듯하다. 탐방자들은 심훈 고택과 그 주변 정원을 둘러보며 상록수의 스토리를 자연스레 연상하게 된다.

 

 

 

1. 심훈기년관  2. 상록수문화관  3.필경사  4.5 주차장

 

 

 

필경사(筆耕舍)

 

  송악읍 부곡리에는 심훈 선생이 얼과 정신이 담긴 필경사가 자리하고 있다. 필경사는 일제강점기 소설가 심훈이 1933년 낙향하여 1934년 독립하면서 직접 설계하고 지어 붙인 당호(堂號)이다.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이 집은 앞으로 넓은 들이 펼쳐지고 북동쪽으로 서해가 바라다보인다.

 

심훈은《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다 일제의 검열에 걸려 못 냈는데, 필경사의 이름은 그 시집 중에 있는 시,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에 갈(耕)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로 시작하는  <필경(筆耕)>이라는 시의 제목에서 딴 것이다.

 

  심훈은 이곳에서 1935년 대표적인 농촌 계몽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상록수》를 비롯하여 《영원의 미소》, 《직녀성》 등을 집필하였다.

 

  필경사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 옹이 관리하다가 당진시에 기부한 이후 군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이 집은 대문이나 부속채 없이 ‘자형 단독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통적인 초가집 모양을 하고 있으나 내부 평면은 1930년대 도시주택의 기능에 맞추어 생활에 편리하도록 만들었다.

 

  전면을 바라보고 우측에서 2번째 칸을 현관으로 하고, 현관을 들어서면 우측에 전후 2칸을 터서 큰 방을 만들고 이 방을 집필실로 사용하였다.

 

  필경사 뒤로는 대숲이 우거져 있으며 앞마당에는 곳곳에 조각작품들이 설치돼 있다. 동남향의 필경사는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돼 있다. 필경사 옆에는 심훈 선생의 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상록수문화관

 

  필경사 앞쪽으로는 상록수문화관이 있다. 상록수문화관은 심훈기념관을 개관하기 전까지 심훈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전시관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역할을 심훈기념관에 넘겨주고 주로 강당, 세미나실로 사용되고 있다.

 

 

 

 

 

심훈기념관

 

 

  송악읍 부곡리 필경사 경내에 자리 잡은 심훈기념관은 2014년 종전에 전시관으로 사용하던 상록수문화관이 협소하여 그 옆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심훈기념관 건립은 심훈 선생이 숨진 지 78년 만의 일이다.

 

  심훈기념관은 2842㎡ 터에 지상 1층 규모(703㎡)로 지어졌다. 특히 부곡리 주민인 윤석주 씨와 김교순 이장은 심훈기념관 부지로 쓰라며, 대대로 물려온 집터와 밭 터를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념관 앞으로 넓은 들이 펼쳐지고, 북동쪽으로 서해가 바라다보인다. 필경사 앞 한진 앞바다, 아산만 입구에 솔개 바위가 있다.  기념관은 도로면의 주차장에서 옥상으로 바로 연결되는 구조로 지어졌다. 옥상에는 심훈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경사진 지형을 따라 건축했기 때문에 실제로 전시관을 비롯한 모든 시설은 지하에 있는 것 같은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다.

 

 

 

 

 

  전시관 내부에는 전시관과 문예 창작실, 수장고, 학예연구실 등을 갖췄다. 전시실의 구조는

 

    (1) 민족의식의 태동-심훈의 탄생과 성장

    (2) 저항의 불꽃-3·1운동 참여와 수감

    (3) 희망의 빛- 문화 및 영화인의 삶

    (4) 항일 저항의 시- "그날이 오면"

    (5) 농촌(당진)에서 찾은 희망 - 대표작 "상록수"

 

 그리고 중앙에 심훈의 저작 활동 모습, 대표작품을 담고 있는 형식으로 배치하였다.

 

 

 

 

  (1) ’민족의식의 태동‘(1901-1918), 즉 심훈의 탄생과 성장을 보여주는 코너이다. 심훈은 1901년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흑석리(지금의 서울 흑석동)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다. 본명이 대섭(大燮)인 그는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보에 다녔다.

 

 

 

 

  (2) ’저항의 불꽃’(1919-1923)으로, 3·1운동의 참여와 수감에 이은 좌절과 극복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은 코너이다. 심훈 선생은 경성제일고보 재학 당시 3.1운동에 가담, 투옥된 바 있다.

 

  이 일로 퇴학 처분을 당한 후 곧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를 이끌던 이동녕과 이시영, 그리고 무정부주의자 신채호 등 지사들과 만나 3년 동안 머문다.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비인 방 안에는/ 등잔불이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정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으로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 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소리······ / 별 없는 하늘 밑에 들어줄 사람 없구나! "

 

- 심훈, '밤' 전문(1923)

 

 

 

 

  (3) ’희망의 빛’(1924-1932)으로, 대중 매체를 통한 문화 및 영화 활동과 영화저널 활동과 희망의 빛을 보여주는 코너이다.

 

  1923년 귀국한 심훈은 연극과 영화에도 매력을 느껴 송영 · 김두수 · 이호 · 최승일 등과 함께 ‘염군사’를 꾸려 연극부에 가담한 뒤, 신극 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만들어 활동한다. 1927년 10월 그는 ‘계림영화사’의 후원으로 영화 「먼동이 틀 때」를 만들어 단성사에서 상영하고, 잡지에 다수의 영화론과 수필을 발표한다.

 

 

 

 

  (4) ’그날이 오면‘(1937)은 작품세계의 결정체인 항일 저항문학의 최고금자탑을 보여주는 코너로 만들었다.  이 시는 조국 광복이 왔을 때의 감격과 환희를 과장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핍박과 설움에서 벗어나려는 시적 화자의 강인한 의지를 격정적인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강인한 의지와 도도한 의기(義氣)의 자세가 극한적 표현과 비장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귀에 절절한 호소로 다가온다.

 

 

 

 

  (5) 그리고, 중앙에는 ’상록수&계몽운동의 씨앗‘ 코너로 심훈이 당진에 정착하여 희망을 찾은 내용으로 꾸몄다. 1935년 동아일보사의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상록수》의 줄거리를 보면, 고등농업학교 학생인 박동혁과 여자신학교 학생 채영신은 한 신문사 주최의 위로회에서 보고 연설을 함으로써 알게 된다. 학교를 졸업한 뒤 동혁은 고향인 한곡리로, 영신은 기독교 청년 연합회 특별 파견자의 신분으로 경기도 청석골로 각각 내려가 농촌 사업에 헌신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형편과 사업의 진행 과정을 편지로 의논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동지 의식은 사랑으로 발전하여 혼인을 약속하게 된다. 그러던 중 영신이 청석골의 ‘청석 학원’ 낙성식에서 맹장염으로 졸도한다. 동혁은 수술한 영신의 곁에서 정성껏 간호한다. 그런데 문병을 와 있는 동안 동네의 악덕 지주이자 고리대금 업자인 강기천이 동혁의 농민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농우 회원들을 매수하는 등 온갖 농간을 부리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동혁의 동생 동화가 회관에 불을 지르고, 동혁은 동생의 죄를 자신이 대신 뒤집어쓰고 잡혀간다. 그 후 감옥에서 풀려 난 동혁이 청석골에 갔을 때 영신은 과로로 병이 재발하여 이미 죽어 버린 뒤였다. 영신을 장례 지내고 내려오다 동혁은 상록수를 보며 두 사람의 몫을 해 낼 것이라는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식민지 현실을 의식한 이 작품은 계몽운동자의 저항의식을 형상화시킴으로써 이상으로서의 계몽을 앞세우는 낭만적 수사의 한계를 벗어나구체적 상황에 입각한 농민문학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유품과 저서들

 

 

 

 

체험코너, 문예창작실

 

 

 

 

상록수공원

 

  상록수공원은 한진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만나는 바닷가에 있다. 7만7766㎡의 아담한 상록수공원은 산책로를 비롯해 생활 체육시설과 축구장 등 운동장, 인라인스케이트장, 정자와 공중화장실 등이 있다.  부곡공단 내에 자리 잡고 있어 근로자들의 휴식공간이기도 하며 주말에는 시민들이 찾아오는 야유회를 즐기는 장소이다.

 

 

 

 

 

한진포구

 

  상록수공원에서 이어지는 한진포구는 삼국시대에는 당나라와 해상 무역을 한 항구였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을 오가는 여객선이 다녔던 곳이지만 서해대교 연결로 최근에는 관광지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서해대교가 마주 보이는 한진 앞바다는 해돋이 명소로 꼽힌다. 드넓은 갯벌과 바다가 있고 그 위로 서해대교가 펼쳐져 있다. 광활한 바다와 길게 뻗은 서해대교를 보고 있노라면 답답한 가슴이 시원하게 뚫릴 정도다.

 

  때로는 바닷물이 빠져 숨 쉬는 갯벌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 풍경을 보며 제철을 맞은 바지락이나 굴을 비롯해 신선한 해물로 푸짐하게 식사를 즐길 수도 있다. 바지락이 제철일 때 한진 바지락 축제가 열린다.

 

 

 

 

 

◎상세정보

 

►주소 : 기념관 -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105 (송악읍 부곡리 253), 전화 : 041-360-6883

필경사-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97 (송악읍 부곡리 250)

상록수공원 : 당진시 송악읍 부곡공단로 275 (송악읍 부곡리 566), 041-350-4211

►기념관 운영 : 09:00~17:00, 여름철에는 18:00까지 (매주 월요일·추석·설날 당일 휴관)

►입장료 : 없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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