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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조명희문학관 탐방, 일제강점기 민족 민중문학의 선구자

by 혜강(惠江) 2021. 12. 23.

 

조명희문학관 탐방

 

일제강점기, 민족 민중문학의 선구자

 

 

글·사진 남상학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1894~1938)는 3.1운동에 온몸을 던진 항일투사였으며, 문학을 통해 일제의 탄압에 맞선 민족 작가였다. 또한, 언론, 교육, 계몽운동으로 민중을 일깨운 선각자였다.

 

그의 자취를 찾아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 있는 조명희 문학관을 찾아 나섰다. 진천읍 벽암리는 그가 태어난 곳으로, 2015년 그의 업적을 널리 기리기 위하여 그의 생가 옆에 조명희 문학관을 개관했다. 이 문학관은 건물이 아름다워 제1회 생거진천 건축상을 받았다.

 

 

 

 

​ 조명희 문학관 둘러보기

 

문학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포석의 동상이다. 역동적이며 진취적인 모습의 동상은 조명희 선생의 후손이 기부하여 설치한 것으로, 높이가 3.3m나 되는데 이는 그가 걸어간 선구자적 삶과 문학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조명희 문학관은 2015년 지하 1층, 지상 3층 총 979.32㎡ 규모로, 1층은 전시실로 들어가면 우측에 안내 데스크가 있고, 좌측에는 작은 벤치와 선생의 삶과 작품이 요약된 자료들이 있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우리는 우리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의 것만 쓸데없이 흉내 내지 말 것이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포석의 시집 <봄 잔디밭 위에> 머리말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민중문학을 지향하는 그의 문학적인 방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부는 좌측에서 시계방향으로 시대의 창(도입), 생애의 창(이해), 문학의 창(발견), 만남의 창(탐구), 계승의 창(약속)으로 구분되어 있어 안내선을 따라가며 시, 동요, 소설, 희곡 등 다양한 문학 영역에서 활동을 펼친 조명희의 문학적 결과물을 키오스크를 통해 직접 읽어볼 수도 있고, 포석 조명희가 작사한 노래와 시를 귀로 즐길 수 있다.

 

‘시대의 창’에는 시대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에 놓인 조선의 현실과 그 현실을 반영한 암울한 문학에 대하여 영상과 패널로 보여준다.

 

 

 

 

‘생애의 창’에서는 포석 일생 연대기와 터치스크린으로 포석의 삶을 보여주며,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인 포석을 ‘짓밟힌 고려’를 통해 보여준다.

 

이어 포석 조명희가 동시대의 리기영, 신설야, 정지요, 김수산 등과 함께 현대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음을 보여주고, 또 재소작가로서 스탈린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통해 고려문학의 선구자였음을 보여준다.이 외에도, 포석 조명희 생가의 모형과 함께 제자 김증손에게 보낸 친필 편지글도 볼 수 있다.

 

 

 

 

‘문학의 창’에서는 조선 최초의 개인 창작 희곡집 <김영일의 사(死)>(1921)와 최초의 미발표 개인 창작 시집인 《봄 잔디밭 위에》를 출판한 사실과 프로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낙동강》을 펴낸 사실, 동요와 평론, 수필과 번역 활동 등을 실물전시, 패널, 터치시스템으로 알기 쉽게 보여준다.

 

“내가 이 잔디밭 위에 뛰노닐 적에/ 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보아주실 수 없을까 ⃫ 어린 아기가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 어리광함같이/ 내가 이 잔디밭 위 짓둥굴 적에/ 우리 어머나가 이 모양을 참으로 보아주실 수 없을까 ⃫ 미칠 듯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엄마! 엄마!“ 소리를 내었더니/ 땅이 ”우에“ 하고 하늘이 ”으에“ 하옴에/ 어느 것이 나의 어머니인지 알 수 없어라”

 

                                                                                              -<봄 잔디밭 위에> 전문

 

 

 

‘만남의 창’에서는 조명희의 작품 <고향의 봄>을 비롯하여 스토리텔링과 노래듣기, 시낭송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코너이다. 마지막으로, ‘계승의 창’에서는 심포지움 개최, 포석문학제, 영화상영 등 조명희문학관의 활동 등을 보여준다.

 

 

 

 

2층은 문학 사랑방, 창작 사랑방, 문학연구실, 수장고 등을 배치했다. 그리고 3층에는 126석 규모의 세미나실도 갖췄다.

 

 

조명희의 삶과 문학 활동

 

 

조명희의 호는 포석(抱石), 필명은 적로(笛蘆)이다. 1894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초기에는 도쿄 유학생들의 가난과 사상적 갈등을 그린 희곡 <김영일의 사(死)>(1921), 은나라 주왕의 잔인한 학정을 그려낸 <파사(婆娑)>(1923) 등의 창작 희곡을 공연하는 등 민족주의 신극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시집 《봄 잔디밭 위에》(1924)를 출간하여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1924년부터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에 가담한 뒤로는 소설 〈땅속으로〉(1925), 〈R 군에게〉(1926), 〈낙동강〉(1927), 〈아들의 마음〉(1928) 등을 발표해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소설들에서는 사실주의에 근거해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 농촌의 궁핍,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연대와 사회주의 이상을 담아냈다.

 

특히, 프로문학의 선구적 소설인 <낙동강>은 이전까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 머물던 신경향파 문학을 목적의식적인 프로문학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사회운동가 박성운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과 계급운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소설집으로는 《그 전날 밤》(1925), 《낙동강》(1928) 등이 있다. 그밖에 평론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1925), <직업 노동 문예작품>(1926)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사찰이 심해지자 192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러시아로 망명해 항일 문학활동을 펼쳤다.

 

 

 

그는 소련 연해주에서 조선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글교육과 함께 시, 소설 등 문학 수업 및 음악 동화극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재소(在蘇) 고려인문학을 이끌고 제자들을 배출했다.

 

대작 《만주의 빨치산》을 완성하고, 식민지 민족의 한을 노래한 시 〈짓밟힌 고려〉,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운동에 앞장서 농업 집단화 정책을 선전·선동하는 시 〈10월의 노래〉, 〈볼셰비키의 봄〉 등을 발표했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원동(遠東) 지부 간부를 지내며 조국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37년 스탈린의 탄압정책의 와중에서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소련 헌병에게 끌려가 1938년 하바롭스크 감옥에서 44세를 일기로 총살당했다.

 

 

 

 

이후 신원 회복을 위한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어 1956년 신원을 회복하였다. 1988년 중앙아시아 한인 거주지역인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도 조명희기념관이 세워졌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조명희의 딸 조 발렌티나가 주도하여 나보이 문학 박물관 내에 조명희 기념실이 마련되었다. 조명희 기념실은 나보이 문학 박물관 3층 계단 바로 옆인 16호이다. 중앙에 흉상이 설치되어 있고 좌우에 그의 문학작품과 활동을 전시하였다. 피체와 처형 등에 관한 자료와 신문기사, 함께 활동한 동지들과 가족의 사진, 추모하는 그림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대표 작품으로는 <농촌 사람들>, <저기압>, <한여름 밤>, <동지>, <새 거지>, <아들의 마음> 등의 단편이 있다.

 

 

 

 

◎상세정보

 

►주소 : 충북 진천군 진천읍 포석길 37-14 (벽암리 34-17)

►전화 : 043-539–7762

►관람 : 10:00 ~ 17:00 (월요일, 1월 1일, 설 연휴, 추석 연휴 휴관)

►관람료 : 무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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