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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강릉 매월당김시습기념관 탐방

by 혜강(惠江) 2021. 10. 30.

 

강릉 매월당김시습기념관

 

최초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저자이자 충절을 지킨 천재

 

 

글·사진 남상학

 

 

 

 

▲매월당기념관 앞에 세원 표지석

 

 

  매월당 김시습기념관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다. 강릉은 김시습의 관향(貫鄕)이자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했던 곳이며, 김시습에게는 유랑시절의 거점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천재 문장가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작가이며, 불교 철학과 유교의 이념을 결합하려고 고심한 철학자였으며, 시대와 불화했던 지식인으로 고결한 인품과 지조를 지녔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다.

 

  이에 강릉시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빛나는 문학과 얼을 계승하고자 매월당 김시습기념관을 개관했다. 매월당 기념관이라고도 한다.

 

  2008년 6월 15일 개관한 기념관은 부지 면적 3,117㎡, 건축 면적 358㎡의 1층 전통 한옥 건물 1개 동으로 건립되었다. 전시관은 전시실 1칸, 애니메이션방 1칸, 포토존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 내에는 김시습의 일대기를 그린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영상자료, 매월당의 대표적인 한시 「동봉육가」를 감상할 수 있는 4개의 시설과 「이생규장전」 포토존이 있으며, 그 밖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로는 『금오신화』 영인본, 『매월당집』, 매월당 문학 사상 연구회 소장품 23점과 수장고에 보관 중인 24점 등 총 47점이 있다.

 

 

 

▲매월당기념관 외부
▲매월당기념관 내부(전시관)

 

 

매월당 김시습의 삶과 업적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이었으며, 법호는 설잠(雪岑),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강릉 김씨인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아버지 김일성(金日省)과 어머니인 울진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문재(文才)를 드날린 무반의 집안이었다.

 

 

 

▲매월당 김시습 초상

 

 

문재(文才)에 뛰어났던 어린 시절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한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3살에 유모가 맷돌을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또, 복사꽃이 한창인 어느 날, 나이 어린 그가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 있을 때 할아버지가 매월당에게 시를 지어보라고 하였다. 이때 매월당은 “복사꽃 붉고 버들잎 푸르르니 삼월도 저물어가누나/ 푸른 바늘에 꿰인 구슬은 솔잎에 맺힌 이슬이라네”(桃紅柳綠三月暮 珠貫靑針松葉露)이라 읊었다. 5살짜리가 붉은 복사꽃과 푸르른 버들잎에 삼월이 저문다는 것을 느끼고, 솔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푸른 바늘에 꿰인 구슬로 비유한 것이다.

 

  그는 5살 때까지 이미 『소학(小學)』·『중용(中庸)』·『대학(大學)』을 배워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임금 앞에서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삼각산시(三角山詩)」를 지어 왕에게 비단 50필을 받으며 ‘오세동자(五世童子)’로 불렸다. 그는 50세 무렵 어렸을 때 궁궐에 갔던 기억을 되살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아주 어릴 때 황금 궁궐에 나갔더니

  영릉(세종)께서 비단 도포를 내리셨다.

  지신사(승지)는 날 무릎에 앉히시고

  중사(환관)는 붓을 휘두르라고 권하였지!

  참 영물이라고 다투어 말하고

  봉황이 났다고 다투어 보았건만

  어찌 알았으랴 집안일이 결딴이 나서

  쑥대머리처럼 영락할 줄이야!

  (少小趨金殿 英陵賜錦袍 知申呼上膝 中使勸揮毫 競道眞英物 爭瞻出鳳毛 焉知家事替 零落老蓬蒿)

 

  그 뒤 13세까지 전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과 이웃집에 살던 윤상(尹祥)에게서 학문을 배웠지만, 15살 사춘기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가정적인 역경이 시작되었다.

 

  강릉에서 시묘살이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생육신으로 절개를 지키다.

 

 

  김시습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고 삼각산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하던 그는 21세 때인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은 장차 관료로 나가 나랏일을 할 뜻을 잃어버리게 했다.

 

  그는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중흥사에서 나와 떠돌던 무렵 김시습은 공주 동학사에 있다가 여섯 신하가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달려갔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듬해인 1456년 8월에는 성상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신하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이 사육신이다.

 

  김시습은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 그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 의해 살해된 사육신들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여 지금의 노량진에 매장한 사람이다. 서슬이 퍼런 세조가 두려워 아무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버려둔 시신을 하나하나 바랑에 담아 노량진에 묻었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 삼강오륜)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후지

 

  그는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과 함께 세조의 즉위를 부도덕한 찬탈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며 벼슬을 권하는 세조의 부름을 거역하면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키며 살았다.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사육신(死六臣)에 대칭 하여 이들을 생육신이라 하였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송 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이듬해인 1457년 6월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넉 달 뒤인 10월 24일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1458년 봄에 세조가 동학사에 초혼각을 세워 단종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이때 김시습도 단종 제사에 참여하였다.

 

 

 

 

 

끝없은 유랑(流浪)의 길

 

 

  1458년, 동학사에서 단종에게 제를 올리고 난 24세의 김시습은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평양에 들러 대동강을 건너고, 묘향산에 이르렀다.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김시습은 머리를 깎고 중의 옷을 걸쳤지만, 수염만은 그대로 두었다. 그는 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기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다.”라고 적었다.

 

  한마디로 “불의한 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승려의 행각으로 현실계를 벗어나 산수 간을 방랑한다.”라는 것이다.  26세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로 『유관동록(遊關東錄)』을 지었다. 그해 10월 김시습은 호서 지역을 두루 여행하며 1463년 경주 남산인 금오산 중턱에 있는 용장사에서 『유호남록(遊湖南錄)』을 엮었다.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쓰다.

 

 

  호남 지방 여행이 끝나기 전, 경주 남산인 금오산 중턱에 있는 용장사에 머물면서 『유호남록(遊湖南錄)』 엮고 나서, 31세 때인 1465년(세조 11)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김시습은 금오산실에서 생활하는 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단편 소설집 『금오신화』를 엮었다. 이 책에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의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금오신화에는 김시습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는 전기체 소설이다.

 

  이 작품들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실 비판 인식을 판타지로 승화시킨 것으로서 김시습의 사상을 검증하는 좋은 재료이기도 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개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인물들로, 모두 현실 세상을 등지고 몽유적 세계 속에서 기이한 일을 겪는다.

 

  이전의 한문 창작물들과는 달리 주인공이나 배경이 우리나라로 되어 있어서 한국적인 풍속과 사상, 감정이 잘 녹아 있다. 역사소설인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를 제외하고 나머지 작품은 모두 감미로운 시적 분위기로 엮어진 괴기 담이다.

 

  중국 명나라 때의 소설 『전등신화』의 영향을 일부 받았다고 추측되는데, 『전등신화』와는 다르게 인간을 압박하는 것들에 대해 강력한 대항을 하고 있어 자유와 초월을 갈구하는 작가만의 개성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생규장전 포토존, 이생은 최씨녀를 만나 사랑하였고, 죽은 줄로 알았던 최씨녀가 환생하여 꿈같은 신혼을 보내는 내용을 배경으로 하였다.

 

거듭된 방랑(放浪)의 길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37세인 1471년에 변신, 출세(?)를 결심하여 서울로 올라와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온종일 짚신으로 되는 대로 거니나니/ 한 산을 걸어 다하면 또 한 산이 푸르네// 마음에 생각 없거니 어찌 몸에 불리며/ 도(道)는 본래 이름 없거니 어찌 거짓 이뤄지리// 밤이슬은 마르지 않았는데 산새는 울고/ 봄바람이 끝이 없으매 들꽃이 아름답다// 짧은 지팡이로 돌아오매 봉우리마다 고요한데/ 푸른 절벽에 어지러운 놀이 볕에서 난다.”  (終日芒鞋信脚行 一山行盡一山靑 心非有想奚形役 道本無名豈假成 宿露未晞山鳥語 春風不盡野花明 短筇歸去千峯靜 翠壁 亂煙生晩晴)   -김시습, 「무제 삼수」 중 첫수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10여 년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강릉과 양양에 머물던 51살 어름에 쓴 「동봉육가(東峯六歌)」[에서는 첫 구절부터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 이름은 동봉"이라고 했고, 둘째 수에서는 아예 "지팡이여, 지팡이여"라고 했다. 지팡이야말로 반생의 반려이자 표상이었다.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 이름은 동봉/ 흰 머리 헝클어져/ 추한 모습만 남았구나 ⃫ ​나이 약관이 못 되어/ 글과 검을 배웠는데/ 사람됨을 욕되게 만드니/ 초라한 선비 꼴이라. ⃫ ​하루아침에 가업(家業)이/ 구름 떠도는 듯하여/ 물결치는 대로 끌렸으니/ 누구와 상종하리 ⃫ 어허! 첫 번 노래여/ 노래가 정히 슬프니/ ​앞길이 멀어 아득한 이 운명을/ 다만 알지 못하네.” (有客有客號東峯 鬖䯯白髮多龍鍾 年未弱冠學書劍 爲人恥作酸儒容 一朝家業似雲浮 波波挈挈誰與從 嗚呼一歌兮歌正悲 蒼蒼者天多無知)   - 「동봉육가(東峰六歌)」 중 첫수

 

  이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로 지방 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인 것이다.

 

 

 

▲'무제삼수' 중 하나
▲김시습의 '동북육봉'

 

 

시문(詩文)에 능했던 문장가

 

 

  승려가 되어 방랑의 길에 올라 9년간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떠돌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또, 1473년 봄에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서울을 오가거나 경상도와 관동 남부를 오가면서 지은 시들로 서울 수락산 폭천정사에 있으면서 『유금오록(遊金鰲錄)』으로 묶었다.

 

  그래서 이 네 권을 ‘사유록(四遊錄)’이라고 한다. 이 네 권에는 그의 전체 시 가운데 1/4 분량에 해당하는 450여 수의 작품이 들어있다.

 

  저서에 『매월당집』, 『십현담 요해』 등이 있다. 김시습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그뿐 아니라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들도 그의 전반적인 사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몫으로 주목을 필요로 한다.

 

  이름이 높았던 그의 대표작으로 「산행즉사(山行卽事)」·「위천어조도(渭川漁釣圖)」·「도중(途中)」·「등루(登樓)」·「소양정(昭陽亭)」·「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고목(古木)」·「사청사우(乍晴乍雨)」·「독목교(獨木橋)」·「무제(無題)」·「유객(有客)」 등이 있다.

 

  이 같은 면은 그가 이른바 ‘심유천불(心儒踐佛)’이니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 타인에게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요소가 뒤섞이어 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역대 시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염정시(艶情詩)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김시습은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가 쓴 시는 많이 유실되었으나, 그의 문집은 1583년(선조 16) 선조의 명에 의하여 이이가 전을 지어 교서관에서 개주 갑인자로 23권이 간행되었다. 또, 17세기 초의 문인 기자헌(奇自獻)은 김시습의 기행시를 중심으로 『매월당시사유록(每月堂詩四遊錄)』을 엮었다.

 

그의 일생은 ‘동가숙서가식’하는 떠돌이의 삶이었지만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 지식인의 의무에는 누구보다 엄격하였다. 그 결과, 율곡 이이(李珥)로부터 백 세의 스승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인생의 방랑(放浪)을 끝내다.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전통미를 찬미했던 그는 만년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부여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유교식이 아니라 평생 살아온 대로 불교식으로 화장하였고, 유골은 부도에 안장되었다. 김시습은 50세 이후 설악산에 거주하면서 「아생(我生)」이라는 시를 적어 자신의 생을 요약하였다.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표할 때/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써 준다면/ 나의 이름 잘 이해했다 하리니/ 품은 뜻 천년 뒤에나 알아주리”(百歲標余壙 當書夢死老 庶幾得我心 千載知懷抱)”- 「아생(我生)」.  이 글 그의 묘표를 대신할 만하다.

 

  김시습은 죽은 뒤 그를 존경하는 후학들에 의해 재평가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시집이 편찬되고 그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높이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김시습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63번지에 있는 창절사(彰節祠)와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190번지에 있는 청일사(淸逸祠) 등에서 제향 되고 있다.

 

 

 

 

 

 

  관광의 도시 강릉에서 매월당 김시습기념관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매우 아쉽다. 대부분 방문객이 선교장을 방문했다가 인근에서 발견하고 잠시 들러가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활발한 홍보와 함께 전시 내용을 보완하여 더욱 활성화할 것을 당부한다.

 

 

 

▲사진 설명 : 탐방을 마치고,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60학번 유화웅, 이경성, 이동환, 오세하, 남상학(좌로부터)

 

 

 

◎상세 정보

 

▶위치 :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85

▶문의 : 033-644-4600

▶운영 : 09:00~18:00 (점심시간 1200~13:00)

▶휴무 : 매주 월, 화요일. 설날, 추석 당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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