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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은평한옥마을 셋이서 문학관, 20세기 한국의 기인(奇人) 3인 방을 찾아서

by 혜강(惠江) 2021. 11. 17.

 

은평한옥마을 셋이서 문학관

 

20세기 한국의 기인(奇人) 3인 방을 찾아가다.

 

 

글·사진 남상학

 

 

 

▲한옥으로 된 셋이서 문학관

 

 

 셋이서 문학관은 북한산 자락의 은평 한옥마을에 있다. 은평 한옥마을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북촌, 서촌에 이어 새롭게 만들어진 한옥마을로서 국립공원 북한산, 진관사와 어우러진 역사 문화 마을 단지이다.

 

  은평 한옥단지는 개인에게 한옥만을 지을 수 있게 토지를 분양해서 소유주의 취향에 따라 한옥마다 모양과 나무색이 달라 보는 즐거움이 있고, 여유로움과 도심 속 전원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상업 시설을 제외한 곳은 대부분 개인의 사유지이기에 내부 관람은 불가능하나 소유주의 허락이 있다면 관람할 수 있다. 또한, 산책로와 편의점, 카페 등 여러 시설을 갖추고 있어 나들이를 즐기기에 적당하다.

 

 

▲한옥마을 모습

 

  ‘셋이서 문학관’은 은평 한옥 체험관을 고치어 건립하였다. 조금 어색해 보이는 문학관 이름은 80년대 기인 삼총사로 이름을 떨친 시인 천상병(千祥炳, 1930~1993), 소설가 이외수(李外秀, 1946~ ), 중광스님 3인방의 작품을 담은 시화집 《도적놈 셋이서에서 따왔다. 즉 3인 문학관이란 의미이다.

 

 

▲3인 공동 시화집
▲공동으로 시화집 '도적놈 셋이서'를 낸 3인방

 

  이 문학관은 ‘기인(奇人)’이라는 공통적 이미지를 가진 시인 천상병, 시인 중광, 소설가 이외수 3인방의 작품세계와 문학론을 전시하여 세 작가의 살아가는 방식을 그들의 작품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마당이 있는 넉넉한 한옥의 문학관 1층은 차와 책이 있는 북 카페로, 2층(화경당)은 세 작가의 작품과 유품 등을 담은 방으로 꾸몄다. 천상병의 방을 지나면 이외수의 방이 있고, 그 옆으로 중광스님의 방이 있다. 그러나 세 방 모두 전시공간이 협소하고, 저서나 유물을 포함하여 전시 내용도 빈약하여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흠이다.

 

 

▲셋이서문학관 전경
▲문학관 2층 화경당, 이곳에 3인의 방이 있다.
▲1층 내부
▲셋이서문학관 구성도
▲1층 우측의 북카페

 

 

▲천상병의 방

 

 

▲천상병 시인의 방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서 만나는 2층 천상병의 방에는 문패 너머로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는 그의 시구와 파안대소하고 있는 천상병의 순진무구한 웃음이 맞이한다.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는 그의 시구는 시인 천상병의 대표작인 <귀천(歸天)>의 마지막 부분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새>와 함께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에 속하는 <귀천>은 삶과 죽음에 대해 달관한 자세를 소박한 언어로 그려낸 작품이다. 1979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었으며, 같은 해에 간행된 시집 ≪주막에서≫에 실려 있다. <귀천>은 1970년 발표 당시에는 '주일(主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한 번쯤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풍일지도 모른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생명을 주셔서 정한 기간 이 땅에 살게 하시다가 때가 되어 생명을 하늘나라로 이끄시는 것이므로, 이 땅의 삶은 잠시 다녀가는 소풍길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은 영원히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니다. 영원히 살 곳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다(빌 3:20)고 생각한다.  이 말은 하늘 나라에 등록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이라는 뜻이다. 마치 거류민과 나그네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나 여행하고 있는 곳을 자기 나라로 생각하지 않듯이,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땅을 영원한 시민권을 줄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돌아갈 본향(本鄕)은 하늘나라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비단 기독교인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천상병 시인은 인생의 삶을 ‘소풍’에 비유하여 글자 그대로 이 세상의 삶을 ‘잠시 바람을 쐬는 일’이라고 보고, ‘죽음’은 ‘하늘로 돌아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삶에 대한 인식을 통해 시인은  삶에 대한 달관과 긍정적인 태도와 아울러 삶의 이치를 바로 터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천상병 시인의 웃는 얼굴 옆으로 <나의 가난은>이라는 시가 벽면에 붙어있다. 그는 나서부터 죽는 날까지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 가난에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즐길 줄도 알았다.

 

 

 

 

  오늘 아침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나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그에게 있어 행복은 커피 한 잔, 담배 한 갑, 해장국 한 그릇, 버스 차비 정도면 족하다. 그리고 잔돈 몇 푼이 남았으니, 욕심 없는 그에게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으랴!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라며 스스로를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시 <행복>)라고 일컬었던 천상병,

 

  그러나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1930년 일본 효고현에서 출생한 그는 해방을 맞아 마산에서 성장했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띈다. 1949년 그는 김춘수의 추천으로 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통역관으로 잠시 근무하다 195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1952년 유치환의 추천을 받은 시 <강물>에 이어 모윤숙의 추천을 받은 시 <갈매기>가 <문예>지에 실림으로써 등단했다.

 

 

▲천상병 시인의 생전 사진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부산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67년에 어이없게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 사건은 ‘독일 등에 머물던 한국 예술가·학자·유학생 등 194명이 북괴의 지령을 받아 적화공작을 벌였다’고 발표한 사건으로, 천상병은 유학 갔다 귀국한 대학 친구로부터 막걸릿값으로 5백 원~1천 원씩 받아 썼는데, ‘간첩 미고지 및 5만 원 갈취’의 죄목으로 엮여 숱한 고문을 당했다.

 

  그 후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으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음식을 못 먹을 정도로 치아가 상했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 아내 목순옥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낳지 못했다. 가난, 무직, 방탕, 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결국,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병자의 신세로 서울 시립 병원에 입원이 되었다.

 

 

 

 

  그의 행방을 찾지 못한 그의 친척들과 문우들은 그가 죽었다고 판단하고 1971년 유고시집 《새》를 발간하였는데, 그는 얼마 뒤에 백치 같은 웃음을 흘리며 다시 살아 돌아와 천진난만하게 25년을 더 살다 갔다.

 

  천상병은 주벽이나 괴이한 행동으로 우리 시사(詩史)에서 매우 이단적인 사람처럼 보였으나, 세속적 명예와 이익을 떨쳐 버리고 맑고 투명한 시 정신을 유지하면서 온몸으로 자신의 시를 지킨, 진정한 의미의 순수시인이라 할 수 있다.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 내가 죽는 날/ 그다음 날"이라고 노래했던 그는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 갔으니, 자유롭고 가벼운 새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전시실에는 시인의 육필 원고와 그가 남긴 유품인 라이터 3개와 재떨이, 안경과 안경집, 면도기, 도장, 낡은 라디오가 남아 있다.

 

 

▲육필원고와 유물

 

 

 시집으로 《새》(1971), 《주막에서》(1979), 《천상병은 천생 시인이다.》(1984),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등이 있다. 그리고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를 펴냈다.

 

 

▲이외수의 방

 

 

▲이외수 시인의 방

 

  천상병의 방 옆에 또 한 삶의 기인인 이외수의 방이 있다. 이외수의 방에는 활짝 웃는 그의 사진 옆에 ‘쓰는 이의 고통이 읽는 이의 행복이 될 때까지’라고 적혀 있다. 그의 방에는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이라는 작품과 사진 육필 원고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더라.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정애련의 가곡으로도 불려진 이 시는 이외수의 널리 알려진 시로서.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에게 위로를 던지는 작품이다.

 

 

 

 

 “가난은 내 평생의 직업이다. 어려서부터 참 많이도 굶었다.”고 말하는 이외수는 경남 함양 출생이다. 세 살 때 어머니가 숨지고 직업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강원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인제에서 초중고를 거쳐 1965년 춘천교육대학에 입학한 후 거듭되는 휴학과 군입대 등으로 8년 동안이나 춘천교대 학적을 보유하지만 1972년 중퇴했다.

 

  어깨를 덮는 장발과 수염, 장화, 몇 해씩 목욕하지 않기, 이미 그 시절부터 이외수는 기인적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후 그는 화전민 자녀들이 다니는 인제남국민학교 소사 노릇, 프린트업과 도장업, 춘천에서의 필경사 생활, 구두닦이 등을 거친다.

 

  그는 한때 춘천에서 가장 유명한 거지였다. 이 무렵은 그가 스스로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자신을 낮추고 세상을 관조한 시기였다.

 

 

 

 

  1972년 그는 한 후배가 하숙방에서 몸을 웅크린 채 쓰고 있던 소설을 빼앗아 단숨에 완성한다. 밀린 방값과 여기저기 널려 있는 외상값을 갚기 위해 그는 이 소설을 『강원일보』 신춘 문예에 투고해 당선된다. <견습 어린이들>이라는 기묘한 제목의 단편이 그 작품이다.

 

  이어 당시 권위 있는 신인 등용문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세대』의 중편 공모에 <훈장>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중앙 문단에 ‘이외수’라는 이름을 알린다.

 

  누구는 그를 광인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그를 버마재비, 신이 만들어낸 사기꾼, 도사라고도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며, 이 가운데 무엇도 아닌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자유혼을 가진 자유인이다. 그는 심안(心眼)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가슴으로 사는 삶”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자유인이다.

 

  이외수는 1978년 『꿈꾸는 식물』을 내놓기 전까지만 해도 무명작가였다. 문단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던 그는 원시생명에 대한 동경과 환상의식을 추구한 첫 장편 『꿈꾸는 식물』을 펴내며 처음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염력으로 구름 모으기, 나비 한 마리로 온 천지에 함박눈 쏟아지게 만들기,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이동하기, 타락한 세계를 피해 그림 속에 들어 있는 신선 동네로 찾아가는 방법에 평생 매달리는 사람의 얘기”를 들려준다.

 

 

▲집필에 열중하는 이외수 시인

 

 

  신문사와 학원을 전전하던 직장을 포기하고 창작에만 몰두하는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이어 단편 <박제>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등과 중편 <장수하늘소>, 장편 <들개> <칼> 등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화가지망생이기도 했던 그는 1990년 ‘4인의 에로틱 아트전’과 1994년 선화(仙畵)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또 철학적 삽화를 곁들인 우화집 <사부님 싸부님> <외뿔> 등을 출간했으며, 시집 <풀꽃 술잔 나비>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과 산문집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감성사전>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을 펴내는 등 소설과 시와 산문, 글과 그림 등 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왕성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와수의 삽화 작품

 

 

  그는 번득이는 재치와 타고난 상상력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연금술을 펼치는 기행과 파격을 일삼았다. 특유의 괴력으로 바보 같은 천재, 광인 같은 기인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특유의 감각과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마니아 독자층을 형성하고 문학의 다양화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외수의 육필 원고

 

 

  삼팔선에서 남으로 14km 떨어진 수피령 고개 너머,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 그의 문학관이 있고, 주위는 ‘감성테마문학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중광의 방

 

 

▲중광스님의 방

 

 

  맨 끝에 있는 중광(重光, 1934~2002)스님의 방에는 인상을 쓰고 있는 사진 옆으로 ‘괜히 왔다 간다.’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그의 묘비명이기도 하다. ‘괜히 왔다 간다.’라는 선사(禪師)의 ‘임종게’처럼 한 세상을 달관한 듯한 경지를 보여준다.

 

  바로 그 옆으로는 시 「나는 걸레」가 걸려 있다.

 

  “나는 걸레/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 ⃫ 삼천대천(三天大天) 세계는/ 산산이 부서지고 ⃫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레 ⃫ 남한강에 ⃫ 잉어가 싱싱하니 ⃫ 탁주 한 통 싣고/ 배를 띄워라 ⃫ 별이랑, 달이랑, 고기랑/ 떼들이 모여들어/ 별들은 노래를 부르고/ 달들은 장구를 치오/ 고기들은 칼을 들어/ 고기 회를 만드오 ⃫ 나는 탁주 한 잔/ 꺾고서/ 덩실 더덩실/ 신나게 춤을 추는 게다 ⃫ 나는 걸레”

 

 

 

 

  이 시를 낭송한 뒤 중광은 ‘걸레 스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중광스님은 스스로 ‘나는 걸레다’, ‘내 생활 전부가 똥이요, 사기다’라고 했으며, 음주와 끽연을 즐기면서도 승복과 삭발을 고집하며 평생을 지냈으며 살아 있는 자신의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성기에 붓을 매달아 선화를 그리기도 했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강연 도중 여학생에게 키스하는 등 일화를 남기며 평생 기행을 일삼아 왔다.

 

  승려 중광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자랐다. 속명은 고창률(高昌律). 너무 가난하여 제주 농고 다니다 중퇴하고, 해병대에서 병장으로 제대한 뒤 31세인 1963년 양산 통도사로 출가했다. 그러나 계속된 기행으로 1979년 10월 종단에서 파문되었다.

 

  동양화가 노수현 선생에게 사군자를 배웠고, 광주 무등산에 토굴을 마련하여 의재 허백련 문하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당시 3년여를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밤낮없이 ‘달마도’에 몰두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달마도 등 선화(禪畵)와 선시(禪詩)에 능숙했다.

 

 

▲중광스님의 그림과 선시

 

 

  스님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미국 버클리대의 랭커스터 교수였다. 그는 불교 문화재 연구차 방한하여 통도사 박물관장 일을 하던 중광스님을 처음 만났다. 랭커스터 교수는 스님의 방에 널린 수백 점의 달마도를 살펴보고는 ‘한국의 피카소’라며 경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런 인연은 미국으로 이어져 1977년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에 초대되어 선화 선시를 발표했으며, 랭커스터 교수는 1979년 《The Mad Monk(광승)》라는 제목으로 중광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이어 1980년 중광스님이 버클리대와 스탠퍼드대 등 명문 대학과 미국 선 세터에서 선화와 선시에 대해 특강을 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첫 개인전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이뤄졌다. 1981년 ‘미 화랑’에서 중광 초대전을 개최하였고, 1983년에는 미국 록펠러 재단, 하와이 주립대학교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또 1991년 일본 NHK, 영국 SKY Channel, 미국 CNN Head line World News 등 매스컴에 예술 세계가 방송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993년 제8회 인터내셔널 로스앤젤레스아트페어 초대 퍼포먼스, 1997년 독일 함부르크미술대학교 초빙교수로 강의했다.

 

 

▲무한 자유를 추구한 중광의 그림

 

 

  저서 <허튼소리>는 1986년 김수용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으며 아시아 영화제에서 한국 우수영화로 선정됐다. 1989년 한국 평론가협회에서 최우수 예술인상을 받았다. <허튼소리>는 연극으로도 공연되었다. 1990년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에 주연으로 열연해서 대종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나는 세속의 굴레에서 노예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며 내 생활과 내 작품 안에서 그 자유를 성취하고 싶다”라고 한 그는 체면과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을 비웃고 조롱하며 온갖 기행을 일삼았다.

 

  빈속에 소주 5병을 들이붓고는 그림과 시를 짓는가 하면, 격정적으로 춤을 추기도 하고 흥이 오르면 걸친 옷을 모두 벗어 던지기도 했다.

 

 

 

 

  80년대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외수와 함께 기인 삼총사로 불리던 중광스님은 그런 기행만 남긴 것이 아니라 승속(僧俗)을 넘나들며 물욕으로부터 초연한 성직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막걸리 통에 소주를 담아 마시는 과도한 음주와 줄담배로 건강이 나빠지자 1998년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선을 수행하며 달마도에 전념했으며, 2000년부터 경기도 광주 곤지암의 ‘벙어리 절간’이라고 불리는 토굴에서 살았다.

 

  그해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마지막 전시회가 된 「중광 달마전, 괜히 왔다 간다.」를 열고, 2002년 숨을 거둬 통도사에서 다비식이 열렸다. 그의 승적은 사후 회복됐다.  저서로 <허튼소리>, <벙어리 절간 이야기>, 천상병 이외수와 함께 펴낸 <도적놈 셋이서> 등이 있다.

 

 

 

 

  승려이면서 화가였고,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한 생을 기행과 파격으로 일관했지만, 선화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문학관을 둘러보고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 마당에는 의자들이 놓여있고, 마당 옆에는 장독대가 있어 한옥과 어우러져 보기에 좋았다.  

 

 

 

 

  그리고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면 사연이 깃든 무쇠솥을 걸어 놓았다. 사연인즉, 천상병이 장례를 끝난 뒤 꽤 많은 조의금이 모였다. 이 조의금을 장모님이 챙겨 두었는데 너무 큰 돈이어서 남모르게 감춘 곳이 아궁이였다. 그런데 돈이 그곳에 있는 줄 몰랐던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고, 조의금은 대부분 불에 타 재가 되었다.

 

  시인의 시 <소능조>에서는 여비가 없어 만나지 못한 가족에 대한 마음이 나타나는데, 유족들은 재가 된 조의금이 저승으로 가는 여비로 쓰였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천상병의 <소능조(小陵調)>- 七ㅇ年 秋日에

 

 

 

 

  삼각산 금남미술관은 셋이서 문학관과 대문 하나로 연결되어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또, 문학관 주변으로 산책로가 나 있다.

 

  마실길과 다목리 주차장에서 약수터로 넘어가는 ‘감성 산책로’는 길이는 얼마 안 되지만 가운데로 개천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사이에 구름다리도 있어 걷는 재미가 있다.

 

 

▲셋이서 문학관 주변 걷기길

 

 

  그리고 이곳은 북한산 둘레길 제9코스 ‘마실길’이 지난다. 방패교육대 앞에서 진관 생태다리까지 1.5km의 짧은 구간이다. 한옥박물관과 한옥마을,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장관을 이루는 숲길, 천년가람 진관사도 자리하고 있어 길 이름 그대로 마실을 나서듯이 운치 있는 나들이에 부족함이 없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상세 정보

 

►주소 : 서울 은평구 진관길 23 셋이서 문학관

►전화 : 02-355-5800

►관람 시간 : 09:00-18:00

►휴관일 :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그다음 날 휴관), 1월 1일, 설날 연휴, 추석 연휴

►대중교통 : 구파발역 4번 출구에서 7723번을 타거나 연신내역 3번 출구에서 701번, 7211번 버스를 타고 하나고·진관사·삼천사 입구 하차. 진관사 방향으로 200m 거리.

 

 

 

 

 

►맛집 : 한옥마을에는 카페, 맛집을 비롯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직접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도 있어 특색과 개성이 천차만별이다.

  '한옥집'(진관동 167-2, 02-353-6939) 은 점심 메뉴인 생선구이 백반, 순두부찌개, 청국장과 저녁 메뉴인 닭볶음탕, 삼겹살 외에도 다양한 한식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 그 외 김치찌개, 된장찌개, 청국장, 육개장, 바지락칼국수 등이 있다. ‘2021 대한민국 고객만족도 1위’ 음식점 부문 대상을 받은 집이다.

  북한산 계곡의 ‘청솔집’(진관동 산 25-2, 02-381-3006)은 닭백숙, 오리 백숙, 해물파전을 내놓는 맛집이다. 또 ‘팥동동’(진관동 167-1, 02-359-2223)에서는 팥죽, 팥칼국수, 보리밥 비빔밥 등을 맛깔스럽게 제공하고 있다. 북한산제빵소(진관동 170-1, 02-352-3548)는 바게트, 통밀30% 단호박크림치즈, 메이플 프레쳇이 맛있다.

 

 

▲셋이서 문학관 입구 한옥마을의 카페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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