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명 문학관 탐방
일제 강점기 민족의 비애를 노래한 ‘파초’의 시인
글·사진 남상학
가을이 짙어가는 날 김동명 문학관을 찾았다. 이날은 아내와 처제들이 동행했다. 시인 김동명의 문학관은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에 있다.
그간 강릉은 동해안의 유명 관광지로서 해수욕장 등 자연경관 등 관광자원과 즐길 거리, 먹거리 등은 풍성했으나 문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여 다양한 문학 활동을 하는 데 다소 미흡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김동명 시인의 생가터 8650㎡ 대지에 전체면적 285㎡의 1층 규모로 생가를 복원하고, 강릉이 낳은 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1900~1968) 시인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고 강릉지역 문학들의 다양한 활동을 돕기 위해 2013년 7월 개관했다.
김동명 문학관은 김동명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한한 자료 전시 외에 강릉지역 문학 단체에서 주관하는 문학회 정기 모임, 백일장, 북 콘서트, 가곡의 밤 등 문화 행사, 영화 상영 등을 실시한다.
●김동명 생가
김동명은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에서 태어났다. 노동리는 강릉시 중심에서 북쪽으로 10㎞ 지점인 주문진과 강릉의 중간에 있다. 노동리의 동쪽은 동해의 청정 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자연의 보고인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국도 7호선과 동해고속도로 확장으로 교통이 편리하다.
북강릉 IC를 나와 속초방향 7호선 국도에서 벗어나 김동명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그런가 하면 한 집 건너 한과 간판이 있는 것이 전통적인 한과 마을인 것을 알 수 있다.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어 문학관 입구에 서니 왼쪽 현대식 건물이 문학관이고 오른쪽은 김동명 시인의 생가였다. 이 생가는 김동명이 1900년 2월 4일 출생하여 8세까지 살았던 집을 시인의 출생 당시 모습 그대로를 재현한 것이다.
생가 앞에는 김동명 시인의 대표작 <파초>의 소재인 ‘파초’를 심어 김동명 시인의 시 <파초>를 연상케 했다. 생가는 안방, 사랑방을 비롯하여 방 4칸과 부엌 1개로 이루어져 있다. 생가에는 가마솥과 지게 넝마 등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과 생활 도구를 엿볼 수 있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코쿨’이라는 시설인데, 이것은 강원도 산간지방에 살던 화전민들의 필수품이나 다름없던 흙으로 만든 벽난로의 일종으로 생김새가 사람 콧구멍과 비슷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코쿨은 김동명의 수필 《세대의 삽화》 중 <어머니>에 등장하기도 한다.
◎호수에 뜬 배 모양, 김동명 문학관
김동명문학관의 겉 모양은 김동명의 대표작 <내 마음>에 나오는 호수에 뜬 배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문학관은 전시실 1칸, 세미나실 1칸으로 되어 있다.
제1전시실 입구 우측 복도 벽에는 김동명 시인의 사진과 <내 마음>의 시가 맞이한다. 제1전시실에서는 김동명 시인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연보, 문학 활동의 내용을 보여준다.
그리고 김동명 시인의 자필 원고를 비롯해 시집 『하늘』, 『진주만』, 『목격자』, 『내 마음』 초판본과 회중시계와 코트 등 유품을 전시해 놓았다. 또한, 시인의 숨결이 담긴 서재를 재현해 놓아 김동명 문학세계 전반과 시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세미나실은 전시실로도 사용하며 문인들과 시민들이 문학을 향유하는 장소로 제공된다. 찾아오는 이들이 독서와 차를 마시며 시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다. 각종 문학 행사와 동시화 전시, 시낭송회, 백일장, 문인들의 월례회 또는 발표회, 다양한 인문학 관련 행사, 가곡의 밤(콘서트) 등 행사가 열린다.
◎전시실에서 살펴본 김동명의 삶과 문학
강릉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함흥으로 이사하여 영생중학교를 마친 뒤 서호진 등에서 교사를 지냈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과를, 밤에는 니혼대학(日本 大學) 철학과를 수학,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흥남시의 동광학원(東光學院) 원장을 지냈으며, 광복 후에는 흥남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흥남학생의거사건(1946)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교화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시인으로서의 김동명은 1923년 10월 《개벽》에 보들레르에게 보내는 시 〈당신이 만약 나에게 문을 열어주시면〉 등을 발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930년 첫 시집 《나의 거문고》를 간행할 때까지 암담하고 우울했던 역사적 현실과 아울러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탐미적이면서도 다소 모호하고, 감상적이며 퇴폐적인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활동한 1930년대 이후에는 이전의 퇴폐적인 시에서 벗어나 차츰 전원시적인 경향을 추구하면서 독자적인 시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이러한 시적 흐름은 고향의 상실, 부친의 상실, 부의 상실 등의 ‘상실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상당 기간을 함경남도 서호진에 거주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는데, 그의 시 세계의 특징은 1938년에 간행한 시집 《파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시집의 제목으로 차용된 ‘파초’는 본래 1936년 《조광》 지에 발표된 것으로 조국을 잃어버린 민족의 비애를 노래한 것이다.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노/ 파초(芭蕉)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情熱)의 여인(女人)/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파초> 전문
<파초>는 국정 교과서에 실리면서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으로, 남국의 식물인 파초가 겨울 뜨락에 외롭게 서 있는 것을 보며 조국을 잃어버린 민족의 비애를 되새기는 내용의 작품이다. 그는 전원에 살면서 자연물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썼다. 이러한 경향은 시집 《파초》(1938)와 《하늘》(1948)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때부터 1940년대 초엽까지 약 10년간이 그의 황금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전원시가 아니라 심층에는 민족적 비애나 역사적 고뇌가 짙게 배어 있다. 즉, 우국의 고뇌와 정열을 전원적 이미지로써 표현하였다. 즉, 우국의 고뇌와 정열을 전원적 이미지로써 표현하였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파초> 외에도 <수선화>, <수선(水仙) Ⅱ>, <내 마음>, <나의 뜰>, <바다>, <하늘 Ⅰ·Ⅱ·Ⅲ>, <명상> 들이 있다. 사랑의 애절함을 노래한 작품 <수선화> 역시 김동명의 초기 시의 경향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意志)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孤獨)의 위를 나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 아 또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아닐까./ 부칠 곳 없는 정열(情熱)을/ 가슴 깊이 감추이고/ 찬 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그 대는 신(神)의 창작집(創作集)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不滅)의 소곡(小曲)./ 또한, 나의 적은 애인(愛人)이니/ 아아, 내 사랑 수선화(水仙花)야!/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 <수선화> 전문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미모가 아름다운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이 있었다. 많은 여성이 나르키소스를 흠모하여 청혼한다. 많은 청혼을 거절하자 복수의 신 네메시스가 복수를 시작하게 된다. 나르키소스는 호숫가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결국, 물속의 자신의 모습 때문에 물속으로 빠진다. 그리고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가 있던 자리에 하얀 한 송이 꽃이 핀다. 이 꽃을 나르키소스 이름을 따서 나르시서스라 불렀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수선화이다.
가곡으로 작곡되어 널리 애창되고 있는 <내 마음>에는 시인의 간절하고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이 시는 다양한 비유적 심상을 통해 사랑의 기쁨과 애상 감을 노래하고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 <내 마음> 전문
이 작품의 전체적인 짜임새는 유사한 구조를 지닌 4연의 반복으로 되어 있다. 먼저 ‘내 마음’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제시한 다음에 ‘그대’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들고, 그런 다음에 화자의 행위를 드러내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유사한 통사 구조의 반복을 통해 사랑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1942년 〈술 노래〉, 〈광인〉 등을 발표한 뒤에는 작품 활동을 한동안 그만두고 목상(木商)을 하며 살았다.
해방 뒤에는 정치 활동을 주로 하여 함흥 학생 사건으로 탄압을 피해 1947년 단신으로 월남했다. 월남하여 한국신학대학 교수, 다음 해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그의 후기 시 세계는 바뀌는데, 이것은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이런 현실은 자연스럽게 강한 사회성과 고발정신이 담긴 시를 썼다. 사회 참여적인 작품 경향은 시집 《삼팔선》(1947)과 《진주만》(1954)은 1945년부터 1947년까지 계속되었다.
《삼팔선》에서는 작자가 삼팔선을 넘기 전까지 북한에서 겪었던 참상과 북한 사람의 우울한 생활 모습을 다루고 있다. 《진주만》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죄악과 그 인과응보적인 멸망을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이 시집으로 아세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1957년 사회현실을 고발한 시집 《목격자》를 펴낸 뒤 4·19혁명을 고비로 시보다 정치평론을 주로 썼다. 1960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를 사직하고 참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수필집으로는 《세대의 삽화》(1964)와 《모래 위에 쓴 낙서》(1964)가 있고, 정치평론집 《적과 동지》, 《역사의 배후에서》(1958), 《나는 증언한다.》(1964)가 있다. 마지막 시집으로 《내 마음》(1964)이 있다. 이 시집에는 그의 모든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한국 현대 시사에서 김동명 시인은 대표적인 전원파 시인이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적 저항 시인으로, 군사정권에는 예언자적 정신으로 불의 앞에 항거한 시인이었으며, 평생을 이 땅의 교육을 위해 몸담았던 진정한 교육자였다.
◎김동명 시비 공원과 묘
문학관 옆으로 오르는 시비 공원(시인의 언덕)은 어린 시절 김동명 시인의 감성을 일깨웠던 곳이다. 우거진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공원 한가운데에 거대한 김동명 시비가 우뚝 서 있다. 이 시비는 본래 1985년 지역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소재 7번 국도변에 건립되었던 것인데, 2018년 7월 도로 건설로 인해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71번지 현 김동명 문학관 옆으로 이전한 것이다.
시비 전면에는 ‘김동명 시비’라는 비명 아래 시인의 초상화가 판각되어 있고, 후면에는 건비문이 새겨져 있다. 좌측의 보조 비석 전면에는 <내 마음>이, 후면에는 황금찬 시인의 송시가 조각되어 있다. 우측의 보조 비석 전면에는 <파초>가, 후면에는 시인의 장남 김병우가 쓴 ‘김동명 시인 약력’이 조각되어 있다. 시비 곁에는 그늘막과 의자를 설치하였다. 잠시 쉬면서 김동명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다.
1968년 1월 21일 69세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사망한 그의 유해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 묘소에 안장되었다가 그로부터 42년 후인 2010년 10월 10일, 생가 뒷산(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133-1번지) 선영으로 이장, 봉안되었다.
묘소로 가는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고, 제법 수령이 오랜 소나무들이 우거져. 숲을 이루었다. 김동명 묘소 표지석은 가족 봉안묘로 들어가는 길가 숲속에 있다.
◎상세정보
►주소 : 강원 강릉시 사천면 샛돌1길 30-2 (사천면 노동리 71)
►전화 : 033) 640-4270
►교통 : 교통편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에 진입하면서 속초 방향 7번 국도를 따라 약 15㎞를 달려가다 보면 연곡, 주문진 가기 전에 아산재단 강릉 아산병원을 지나 사천운전면허시험장 방향으로 3㎞ 정도를 들어가면 갈골한과마을 입구가 보인다. 버스 이용 시에는 강릉시외버스터미널에서 308번 시내버스를 타고 약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관람 : 09:00~18:00 (휴관 : 월·화요일, 신정, 설날, 추석)
►먹거리 : 사천에 왔다면 인근에 있는 사천항이나 주문진항을 들러보자. 특히 주문진항은 동해 최대의 어시장이 있어 수산물이 집결되는 곳이다. 신선한 회를 비롯하여 각종 해산물 요리가 넘친다. 우리는 주문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진화해변횟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2층에서는 시원한 바닷가의 정경이 펼쳐져 더욱 좋았다.
점심 식사 후, 강릉 안목항 커피거리에 있는 커피커파에서 차를 마셨다. 예닮 글로벌학교 교장으로 수고하는 친구 유화웅 교장님이 찾아와 우리 일행을 영접해 주었다. 사랑의 마음으로 따끈한 음료와 다과로 접대해 주신 그 사랑과 정성을 가슴에 담고 돌아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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