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다산 정약용 유적지
한강 변 다산 정약용의 숨결이 서려 있는 곳
글·사진 남상학
서울에서 동쪽으로 한강을 따라 팔당 댐으로 가는 길은 수도권 최고의 드라이브 길이다. 양수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에서 멀지 않은 곳,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다산 정약용유적지가 있다.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숨을 거둔 곳이다.
능내역 뒤쪽의 북한강 변에 자리 잡은 능내리의 옛 이름은 마재·마현(馬峴)이었다. 마재는 그 모양이 혹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어 마치 한강을 지키는 파수꾼 같이 보인다. 마재는 팔당호와 인접해 경치가 아름답다.
마재에서 200m 거리에 있는 다산 유적지에는 조선 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기념관, 생가와 사당이 있고,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이 다산 유적지는 1972년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은 다산 정약용의 유적과 함께 실학박물관, 다산생태공원과 북한강과 남한강의 수려함 등 높은 문화재적 가치와 깨끗한 물과 토양을 지닌 생태 도시의 전형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평가에 걸맞게, 2010년 11월 30일 국제 슬로시티 연맹에 의해 수도권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관광지로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유적지 입구 다산문화의 거리
다산문화의 거리는 다산유적지와 실학박물관의 진입도로를 가리키는데, 이 거리 초입에는 천일각과 돌탑이 있다. 이 정자는 다산이 유배 생활 18년 중 10년을 거처했던 다산초당에서 100여 m 떨어진 곳에 있었던 천일각 모형으로 다산의 곤고했던 시정을 떠오르게 한다.
또, 돌탑은 다산이 저술한 5000여 권의 서책과 그 책 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르던 실학 정신을 석조 조형물로 상징한 ‘타오르는 불꽃’ 기념탑이다.
그 뒤로 정약용 선생의 얼이 느껴지도록 화성(수원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가 전시되어 있다. 실학 정신의 실천을 엿볼 수 있는 역작이다. 길가의 벽면 동판에는 선생이 집필하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에서 뽑은 글들이 새겨져 있어서 선생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다.
다산문화관과 기념관
다산 유적지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나란히 서 있는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이다. 다산문화관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으며, 다산 관련 강연회와 학술발표회가 열린다. 그리고 다산문화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사계절 내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또한, 기념관에는 다산의 생애와 유배 생활 및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실학사상이 담긴 저서와 집필 기록, 산수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하여 정리해 본다.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은 조선 후기 대학자로서, 1762년(영조38) 광주(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 나주(羅州)이며, 호는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 등이며, 가톨릭 세례명 요한이다.
►어려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하였고, 이벽에게서 서양 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여 실학과 서학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776년 호조 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1783년 회사에 합격한 후 경의 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충청남도 해미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었다.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수원성을 쌓을 때 설계도와 기구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기하학적 방법으로 성의 거리, 높이 따위를 측량해 가장 튼튼하고 단단한 성을 쌓기 위해 연구하였고, 마침내 1792년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거중기와 활차(滑車, 도르래), 고륜(鼓輪, 바퀴 달린 달구지) 따위를 발명해 수원성을 쌓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활동하였으며,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이 터지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이 사건에 관련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기도 하였고, 이후 사직하였다.
►1801년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를 거쳐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1818년 《목민심서》 48권을 완성하고, 《경세유표》 49권, 《흠흠신서》 39권 등을 저술하면서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 균점과 노동력에 의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의 유배 기간 경서학에 전념, 실학의 대가가 되어 《목민심서》 48권, 《경세유표》 49권, 《흠흠신서》 30권 등을 쓰면서 정치·경제 등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5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다산의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1818년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후 마현마을 고향 집으로 돌아와 저술 생활로 평생을 보냈으며 1836년(현종 2) 75세로 생을 마쳤다.
<문인으로서의 정약용>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삶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한시)을 많이 썼다. 또한, 논리적 · 설득하는 내용 구성을 바탕으로 모범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해 온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실학자 특유의 실용적 가치관도 잘 담겨 있다.
풀이면 다 뿌리가 있는데
부평초만은 매달린 꼭지가 없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니며
언제나 바람에 끌려다닌다네
목숨은 비록 붙어 있지만
더부살이 신세처럼 가냘프기만 해
연잎이 너무 업신여기고
행채는 이리저리 가리기만 해
한 연못 속에서 같이 살아가면서도
어쩌면 그리 서로 어그러지기만 할까?
(원시)
百草皆有根 浮萍獨無滯 汎汎水上行 常爲風所曳 生意雖不泯
寄命良瑣細 蓮葉太凌藉 荇帶亦交蔽 同生一池中 何乃苦相戾
이 시는 정약용의 <고시(古詩> 7로서 그의 <고시(古詩)> 27수 중의 하나로, 조선 후기 사회 지배층의 횡포와 피지배층의 서러움을 우의적으로 풍자한 5언고시의 한시이다.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지배층과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수탈당하며 고난의 삶을 이어가는 피지배층의 모습을 연잎과 행채, 그리고 부평초의 관계로 형상화하고 있다. 연잎과 행채로 비유된 지배층의 횡포와 부평초에 비유된 백성들의 서러움을 대립시켜 지배 계층에 대한 비판과 함께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나타내고 있다.
다북쑥 캐네 다북쑥 캐네,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네
양처럼 떼지어 다니며
저 산언덕 뒤밟아 따르네
푸른 치마에 등은 구부정하고
붉은 머리털은 기울어졌다네
무엇 하려고 다북쑥 캐나요
눈물이 줄줄 쏟아진다네.
독에도 남은 곡식이 없고
들에도 풀싹이 없다오.
다북쑥만 자라나서
둥글게 무더기를 지었네.
말리고 말려서는
데치고 소금 쳐서
허기 채우려는 죽이지
달리 무엇이 있겠나
(원시)
釆蒿釆蒿 匪蒿伊莪 群行如羊 遵彼山坡
靑裙偊僂 紅髮俄兮 采蒿何爲 涕滂沱兮
甁無殘粟 野無萌芽 唯蒿生之 爲毬爲科
乾之䕩之 瀹之鹺之 我饘我鬻 庶无他兮
이 작품은 정약용의 <채호(采蒿)라는 작품이다. 다신이 강진 다산초당에 있을 때 그 해는 가물이 심했다고 한다. 그 전 겨울부터 봄을 거쳐 입추가 되도록 가물어 붉은 땅이 천 리가 되었고, 들에는 풀 한 포기 없었다. 그때 당시 민중들의 비참한 삶을 풀을 뜯는 아낙네의 목소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기근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민중과 그들의 처지를 살피지 못하는 위정자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 유배지에서 쓴 61편의 편지는 가족에 대한 안부와 아들에게 주는 교훈 등 다양한 면모가 각각의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아들에게 물려줄 정신적 유산으로 근(勤)과 검(儉)의 덕목을 강조하고 그 의미를 상세하게 드러내어 신천하도록 당부한 것은 그 한 예라 할 것이다.
"몸져 누운 아내 해진 치마에 천 리의 먼 곳에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보냈는데, 오랜 세월에 붉은 빝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 속에 새겨 두거라."
유배 시절 아내 홍 씨가 보낸 빛이 바랜 다홍치마 여섯 폭을 받아 들고 그리움에 슬퍼하며 치마를 잘라 두 아들을 위한 서첩을 만들어 보낸 것이 ‘하피첩(霞帔帖)’이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철학과 인생의 지침을 담은 것이었다.
그리고 혼인을 하는 외동딸에게는 남은 치마폭에 ‘매조도’를 그려서 보냈다.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이런 선물을 받아 든 자식들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멀리서나마 지아비에게 사랑을 전하는 부인 홍 씨의 마음도 헤아려 볼 수 있다.
사당 문도사(文度祠)
다산 기념관을 나서면 광장 뒤쪽에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인 문도사(文度祠)가 있다. 문도사를 중심으로 추모제가 열린다.
생가인 여유당(與猶堂)
광장을 사이에 두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 눈에 들어온다. 여유당은 정갈한 한옥이다.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는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단아한 목조건물 여유당은 서른세 칸의 전통 양반집으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것이다. 아주 큰 나무 그늘 뒤로 나지막하고 단아한 담장 너머 아랫사람들을 허물없이 대했던 다산의 성품을 보여주듯 편하게 와 닿는다.
여유당 안은 무척이나 깨끗하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주변이 화려하지도 않다. 관료로서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검소함이 담겨 있다. 고택의 구석구석을 살피다 보면 다산이 유배 시절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던 세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지랑이 끼어있는 강언덕 집에
백일홍 꽃이 짙게 짙게 피어 있네
산과 들은 아직도 눈에 익은 풍경이고
꽃과 나무는 내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네
들보에 제비는 올해도 알을 까고
숲속의 꾀꼬리는 속절없이 고운 노래
제철 만난 만물이 부럽기만 하여서
지팡이 짚고 서서 슬피 탄식하노메라
(원시)
水閣煙光內 黃薇晩色深 田園猶慣眼 花木舊怡心
樑燕亦新乳 林櫻空好音 得時堪羨物 倚杖一悲吟
이 시는 다산 정약용의 것이다. 이 시의 강마을은 지금 정약용유적지 앞쪽 다산생태공원’이 되어 우리나라 제1의 강 풍경으로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다산의 묘(墓)
생가 옆에는 자연석에 ’여유당‘이라 쓴 비가 서 있다. 그 옆으로 생가 뒤쪽의 소나무가 우거진 계단을 오르면 다산의 묘에 다다른다. 발치 아래를 감싸고 돌아 흐르는 두물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묘는 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한 원형의 묘로 남향하고 앉아 있고, 묘 앞에는 비석 상과 상석, 그리고 좌우로 망주석이 배열되어 있다. 봉분은 단분이며 숙부인 풍산 홍씨와의 합장묘이다. 비신에는 2열로 ‘문도공다산정약용 숙부인풍산홍씨 지묘(文度公茶山丁若鏞 淑夫人豊山洪氏 之墓)’라고 씌어 있다.
묘지에서는 아래로 생가와 북한강, 그리고 강 건너 분원마을과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이 한눈에 조망된다.
실학박물관
다산 유적지 바로 옆에 2009년 경기도에서 건립한 실학박물관이 있다. 4,074㎡의 대지 위에 총면적 2,993㎡의 지상 2층 건물로 만들어진 박물관에는 3개의 상설 전시실과 기획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제1전시실은 실학의 형성을 주제로 서양 문물의 전래와 실학의 탄생, 연행사와 통신사 관련 전시가 있고, 제2전시실은 실학의 전개를 주제로 경세치용학, 이용후생학, 실사구시학, 근대로의 가교 등의 전시 코너가 자리 잡고 있다. 제3전시실은 천문과 지리 주제관으로 천문과 지리 디지털 북, 지도 만들기 체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소장 자료로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이수광의 《지봉유설》, 천리경, 자명종,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홍대용의 《의산문답》, 천문도인 《혼천전도》, 박규수가 만든 천문 관측기구 간평의 등이 있다.
나는 다산 유적지를 나와 한강 변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다산 정약용 유적지 소감을 읊은 송영기(宋永起) 님의 시를 떠올려 중얼거려본다.
아늑한 산 고향의 푸른 물결 반짝이는
앞강에 배를 띄워 꿈을 안고 오갔는데
유배지 낯선 먼 곳에 정(情)붙인 지 또 얼만고
돌아와 밤낮으로 목민(牧民) 저술 완성하고
솔바람 불어오는 뒷 동산에 누워 쉬니
그 열정 어디서 왔나 백구(白鷗)에게 물어볼까
다산 유적지 앞의 카페와 식당들 사이의 좁은 길 안으로 들어가면 북한강 변에 닿는다. 이곳이 바로 다산생태공원이다.
다산생태공원
총 16만7천㎡ 규모의 다산생태공원은 2012년 국토교통부 주관 '한강 살리기 사업'과 경기도팔당수질개선본부와 신세계의 MOU를 맺은 팔당 수질 개선사업으로 조성되었다.
다산생태공원은 생태·역사·문화가 어우러진 친환경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물환경 생태공원이다. 연못과 실개울을 따라 형성된 수변·수생식물이 인근 능내 하수처리장의 방류수를 2차 정화해 깨끗한 수질로 개선한다. Eh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이용객이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
'조안(鳥安)'이란 지명처럼 동물에게 아늑한 보금자리를 제공한다. 용담, 동자꽃 등 총 120여 종의 토종식물이 자생하고 있으며, 생태습지에서 붕어, 잉어, 소금쟁이, 물방개 등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생태해설사가 있어 공원 내에 서식하고 있는 다양한 식물에 대한 정보제공과 한강을 사랑한 정약용 선생의 생애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다.
팔당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비롯해 억새 길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 주말에는 하루 1천 명 이상이 방문하는 도시인의 휴식처로 변모했다.
최근에는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KBS2TV '감격시대'와 JTBC '미라클푸드' 등 각종 방송국의 촬영지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여행 정보
►주소 :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조안면 능내리 95-4)
►전화 : 031-590-2481
►가는 길 : 다산 정약용 유적지로 가는 교통수단은 남양주 버스 167, 63, 56, 양평 버스 8-8, 양평 버스 2000-1번이 있으며 직접 연계는 56번뿐이다(나머지 노선 이용 시 다산 유적지 입구 로터리 하차 후 도보 이동).
►운영 : 화~일 09:00~18:00 (휴무 월요일, 1월 1일, 추석 당일, 월요일이 공휴일이면 개관 후 다음날 휴관)
►요금 : 무료
►맛집
황토마당 (장어, 민물매운탕) : 조안면 다산로 759 (능내리 35-2) / 031-576-8087
감나무집공원 (장어, 민물매운탕) :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43 (능내리 4-3) / 031-576-8263
옛나루터 (돈까스, 부대찌개) :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20-12 (능내리 12-20) / 031-576-826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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