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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안흥지와 애련정, 왕족·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은 유서 깊은 정자

by 혜강(惠江) 2021. 7. 9.

 

이천 안흥지와 애련정

 

왕족·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은 유서 깊은 정자

 

- 지금은 이천 시민의 휴식처로 탈바꿈 -

 

 

글·사진 남상학

 

 

 

 

 

  온천으로 유명한 경기도 이천시 도시 중심에 안흥지(安興池)가 있다. 안흥지는 설봉온천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만 연못이다. 그리 크지 않은 이 연못은 본래 유서 깊은 저수지로서 ‘이천둑방’ 혹은 ‘안흥방죽’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나라 연못의 전형적인 네모난 형태의 못이다.

 

  최고 수심이 2.7m. 둘레는 약 388m 정도지만, 이 연못의 물로 이천 구만리 뜰의 논에 물을 대어 천하 제일미(天下第一米)라는 이천의 대표적인 쌀 품종인 자채벼를 생산했다. 자채벼는 진상미로 사용될 만큼 질이 좋았다. 그래서 고려와 조선조의 대신들은 구만리 뜰 방죽 앞에 자채 논을 갖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안흥지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연못 가운데 있는 애련정(愛蓮亭) 때문이다. 안흥지는 창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록에 의하면 세종 10년인 1428년 세워졌고, 이천 부사로 취임한 이세보(李世珤)가 1474년(성종 5) 기울어진 정자를 중건했다고 한다. ‘애련정(愛蓮亭)’이라는 이름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신숙주(申叔舟)가 지었다고 한다.

 

  애련정이라는 이름은 연꽃이 핀 경치가 좋아서 붙여진 것일 수도 있으나, 중국 북송의 유학자인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 1017-1073)의 시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주돈이는 철학자로 자는 무숙(茂叔). 시호는 원공(元公). 주염계(周濂溪)라고도 하며, 연꽃을 군자에 비긴 애련설로 유명하다. 조선 선비들은 주돈이를 존경했고, 그의 애련설을 사랑했다. 주돈이의 ‘애련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있다.

 

   “나는 오직 연꽃만을 좋아하거늘 그건 진창에서 자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결에 씻김에도 요염하지가 않다. 몸속은 뚫리어 통하고 생김은 곧으며 덩굴이나 가지를 갖지 않고 향은 멀리 갈수록 그 맑음을 더한다. 곧고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무례하게 희롱할 수는 없다. … 연은 군자라.”

 

 

 

▲7월 초순이라 안흥지 연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애련정에는 왕들의 방문이 잦았다고 한다. 여주에 세종대왕의 영릉이 있어서 영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중종이 이곳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고, 숙종과 영조, 정조가 방문한 기록도 남아있다.

 

  애련정은 옛 선비들도 즐겨 찾았다. 애련정 누(樓)에는 당시 이곳에 들렀던 서거정(徐居正)과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쓴 시, 조위曺偉), 김진상(金鎭商), 강경서(姜景敍) 등 당대 문장가의 시가 걸려 있다. 임원준과 김안국의 애련정기와 애련루기도 함께 걸려 있다. 안흥지에 뜬 달빛에 반하고, 은은한 연꽃 향기에 취하니, 옛 선비들이 흥취가 절로 일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 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48)은 남다르게 애련정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그 누가 염계(濂溪)를 뒤이어 애련을 말했는고

   정자를 명명함이 옛 현인에 꼭 부합되네

   그대는 응당 덕을 닮아 평생 좋아했겠지

   나는 또한 속 텅 빈 걸 죽도록 사랑한다오

 

   열매가 말처럼 둥글단 말은 이미 들었지만

   꽃이 피어 배보다 큰 것도 일찍이 보았네

   다시 재배하는 노력을 열심히 기울이게나

   풍월 실은 장래에 흥취를 주체 못 할 걸세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서거정은 조선 세종 때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며 세종 2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에 집현전 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에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여섯 임금을 모실 만큼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해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조선 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뤘던 목릉 성세의 디딤돌을 이뤘다.

 

 

 

  한편, 성종의 형 풍월정(風月亭)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애련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새로운 연못을 파고 또 연꽃을 심으니

   풍류가 사랑스럽고 주인이 현명하구나.

   피어나는 맑은 향기 뉘 능히 감상하리

   짙은 아름다움 나 홀로 어여삐 여기네.

 

   푸른 일산 붉은 단장 밤달을 맞이하고

   푸른 파도 푸른 물결 구슬 배를 띄우네.

   여기에서 술 대하니 흥에 취할 만하고

   시를 읊게 되니 기뻐 어쩔 줄 모르겠네.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은 왕세자로 책봉된 아버지 덕종이 1457년(세조 3)에 죽자 할아버지인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궁중에서 자랐다. 1460년 월산군에 봉해졌고, 동생 잘산군(후에 성종이 됨)과 함께 현록대부가 되었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지고, 이해 3월에는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왕위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그는 권신들의 농간을 겪게 되자 양화도 북쪽에 망원정을 짓고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부드럽고 청아한 문장을 많이 지어 <속동문선>에 여러 편이 수록되었으며, 그의 7대손인 경이 그의 유고를 모아 <풍월정집>을 간행했다.

 

 

 

 

  또,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은 매계 조위 (梅溪 曺偉, 1454~1503)는 애련정에 대한 감흥을 마음껏 노래했다.

 

   정자 짓고 연못 파서 홍연을 심었더니

   사람들은 당시 태수의 현명함을 말하네.

   국색이 스스로 교태를 부려 사람을 감동시키듯

   천향은 물에 반사되어 더욱더 사랑스럽네.

 

   마음에 두는 곳은 주렴계의 애련설을 잇고

   꿈속에서 자주 태을선을 찾곤 하였네.

   푸른 통을 기울여 실컷 마시니

   술에 미친 사람이라 불리게 하려 하네.

 

  매계 조위는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1475년 식년문과에 급제, 1479년 영안 도경차관이 되고, 성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검토관, 시독관 등으로 경연에 나갔으며, 이후 지평, 문학, 응교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492년 동부승지, 도승지, 호조 참판 등을 역임하고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1498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때마침 일어난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시고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의주에 체포, 투옥되었다. 오랫동안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옮겨진 뒤 죽었다.

 

 

 

 

 

  또, 숙종 때 진사가 되고, 부제학, 대사성, 좌참찬에까지 이르렀던 김진상(金鎭商, 1684~1755)은 애련정에 대한 아래의 시를 남겼다.

 

   소쇄한 관정자 애련정에서

   옛날 보았던 연꽃

   이천 고을 사람들이 모두 보았으리

   십 년 세월에 눈물 흘리네!

   4월 못은 가련하기만 하여라

 

   붓을 놓고 시판에 눈물이 젖네

   그때 못에 물도 가득,

   놀잇배에 술도 가득

   오늘 행락은 마음 둘 곳 없구나

   무심히 버들가지만 바람에 날린다.

 

 

 

 

 

  또, 강경서, 남효온, 권경유 등과 더불어 사장(詞章)·정사(政事)·절의·효행 등으로 이름이 높았던 강경서(姜景敍, 1443~1510)도 글을 남겼다. 이밖에도 애련정을 노래한 시인들은 많았다.

 

 

 

 

 

  이후 조선 시대 후기까지 애련정은 오랫동안 많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1907년인 순종황제 원년에 일어난 정미의병 때 일본군이 이천 읍내에 사백팔십여 가구를 불태울 때 아깝게도 소실이 되었다.

 

  현재의 애련정은 이천시가 안흥지를 시민공원으로 개발하면서 <애련정기> 등을 기반으로 복원한 것이다. 1999년 6월 11일, 안흥지 복판에 있는 인공섬 위에 새 정자를 건립하고 준공식을 했다. 목조로 된 측면 2칸, 전면 3칸의 6칸짜리 팔작지붕 형태이며, 향토유전 1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현판 글씨는 이천 출신 농학자 류달영이 썼다.

 

  단청이 아름다운 애련정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연못과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 애련정 옆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둘레에는 벚꽃을 심어 연못의 정취를 더했다. 연못 한쪽에는 연꽃을 심어 애련정이라는 것을 잘 부각하였다.

 

  또한, 연못 가운데에 분수를 설치하여 시원스레 분수가 치솟게 하였다. 단청이 아름다운 애련정과 안흥지의 주변 경관이 잘 어울린다. 이천 9경 중 일곱 번째 명물로 태어난 것이다.

 

 

 

 

 

  글이 짧은 나는 정자에 걸린 선인들의 글과 편액이 전하는 많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제대로 풀어가지 못함이 아쉽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애련정에서 내려와 연못 둘레길을 걸었다.

 

  둘레길에서 애련정으로 통하는 남쪽 다리 입구에는 ‘애련정 시비’가 있다. 애련정 준공과 함께 제막된 시비는 2개의 판석 위에 월산대군, 조위, 서거정, 김진상 등 조선 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이 애련정에 관해 지었던 옛 시들을 모아 새겨놓은 것이다. 시비 윗부분을 산봉우리처럼 둥글게 다듬었다.  그리고 연못 둘레에는 조선 시대 목민관들의 선정비 30여 개를 한곳에 모아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였다.

 

 

 

 

 

  연못 둘레길을 걸으며 애련정을 바라보면 애련정의 우아함과 안흥지의 주변 경관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연못에 핀 연꽃이며, 유유히 유영을 즐기는 물고기들, 연못 한가운데에서 치솟는 분수가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특히, 안흥지 둘레길은 한국동요사랑협회(회장 윤석구)에서 ‘동심의 길’로 조성하여 전국 유명 캘리그래피(붓글씨) 작가들의 개성 넘치는 동시·동요 작품으로 채워져 어린이나 어른들이 보아도 재미있고 흥미 진지하다. 또 시인들, 관내 학생들의 시도 함께 걸려 있다. 운치 있는 연못 둘레길이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잠시 발길을 멈추고 문학적 상상력과 음악적 감성을 키울 수 있다.

 

 

 

 

◎여행 정보

 

►애련정 주소 : 경기 이천시 안흥동 404

►대표전화 : 031-644-2114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가려면, 중부고속도로에서 서이천 나들목으로 진입하거나 곤지암 나들목을 이용 3번 경충산업국도를 타고 이천시로 진입, 미란다호텔과 설봉호텔 뒤편에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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