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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여행기 및 정보/- 서해

서검도와 미법도, 서해 민통선 안에 있는 호젓한 섬

by 혜강(惠江) 2021. 7. 13.

 

서검도와 미법도

 

서해 민통선 안에 있는 호젓한 섬

 

 

 

글·사진 남상학

 

 

 

 

▲서검도 솔책선착장

 

  갑자기 강화 석모도에 속한 서검도와 미법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를 부추겨 새벽 6시 집을 나섰다. 강화 석모도 하리선착장에서 오전 8시 30분에 떠나는 첫배를 타기 위해서였는 적어도 2시간 30분 정도가 필요했다. 서울에서 하리선착장까지는 승용차로 2시간, 승선 절차 등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서검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에 속해 있다. 강화에서 서쪽으로 10.2㎞, 석모도에서 서쪽으로 8㎞ 지점에 있다. 서검도(西檢島)라는 이름은 옛날 중국에서 사신이나 상인들이 서해로부터 한강 입구로 진입할 때 선박을 검문하던 검문소가 있는 섬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강화도의 서쪽에 있어서 서검도라 하였고, 이는 강화도 남동쪽에 있는 동검도와 대비를 이루는 지명이다.

 

  강화지역은 한양으로 진입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지금도 서검도, 미법도 등 강화의 섬들은 지금도 군부대가 주둔해 있는 군사 요충지다. 섬 주변 바다로 북방한계선이 지나고, 황해남도 연안군과는 2.5㎞ 거리밖에 안 되어 북한 지역이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깝다. 민통선 안에 있어서 과거에는 선 안에 친인척이 살고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었으나 10여 년 전부터 통제가 해제되어 이제는 민간인이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었다.

 

 

 

▲서검도, 미법도는 민통선 안에 있어서 야간에는 해안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서검도 지도

 

서검도 뱃길

 

  강화 본섬에서 서검도로 바로 이어진 직항로는 없고, 석모도 하리선착장에서 서검도행 카페리가 미법도를 거쳐 서검도까지 1일 3회(08:30, 13:00, 16:40) 운항한다. 카페리가 뜰 뿐, 군의 허가 없이는 전세 선도 다니지 못한다.

 

  서검도행 여객선이 뜨는 석모도 하리 포구에는 여객선 매표소뿐, 주변에는 인가 한 채 없다. 주위는 허허벌판이다. 민통선 통제초소 하리 검문소 안내판이 빨간색으로 되어 있다. 하리선착장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기장도와 교동도가 보인다.

 

  하리선착장을 떠난 배는 먼저 미법도에서 승객을 내려놓고 서검도로 향한다. 왼쪽으로 괴리섬이 보인다. 괴리섬은 미법도에서 서검도로 가는 항로 중간에 있는 무인도다. 서검도 앞바다로 침투한 간첩이 그 섬에 숨었다가 도주한 뒤 섬의 이름이 한때 괴뢰섬으로 불리기도 했다. 괴리섬에는 송전탑만 높이 솟아 있다.

 

  배는 25분이 채 못 되어 서검도 북쪽의 솔책도 선착장으로 입항한다. 하루에 서검도와 미법도를 다 둘러보려면, 첫배(8시 30분)로 서검도에 들어왔다가 점심 배를 타고 미법도로 이동했다가 저녁 배로 미법도에서 나오면 된다. 서검도에서 나오는 배 시간은 09:00, 13:30, 17:10이다.

 

 

 

▲석모도 하리선착장의 매표소, 승객 중에는 해병용사들이 많다.
▲하리 검문소
▲하리선착장 주변 해안
▲하리선착장에 쌓인 부표들
▲우리가 타고 갈 강화페리, 선착장 주변에는 다른 어선이나 배들이 한 척도 없다.
▲무인도 괴리심, 송신탑만이 우뚝하다

 

서검도 이모저모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에 속하는 서검도는 석모도에서 서쪽으로 8km 지점에 있다. 주위에 석모도·교동도·볼음도·주문도 등의 큰 섬들이 둘러싸고 있다. 면적 1.51㎢, 해안선 길이 5.7㎞에 불과하다. 섬은 형태는 삼각형 모양이며, 높이 56m와 52m의 낮은 구릉지가 남쪽 해안 양 끝에 솟아 있을 뿐 대체로 낮고 평평하다. 해안은 전체적으로 간석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본래 서검도는 북쪽에 있는 솔책도는 썰물 때만 건널 수 있는 별개의 섬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간척으로 하나의 섬이 되었고, 주민들은 서검도를 안동네, 솔책도를 솔착이라 부른다. 두 섬 사이의 넓은 땅은 농경지로 바뀌고, 일부는 한때 대양염전(0.59㎢)으로 운영되었다가 그 후 염전을 없애고 대규모 대하 양식장이 되었으나 지금은 양식장도 폐허 상태로 남아 있다.

 

  솔책도 가장 높은 언덕에는 북방 감시초소가 우뚝 서 있다. 작전구역이라 오를 수 없다. 선착장은 젓갈용 통과 폐그물 등이 어지럽다. 마을은 주로 남쪽에 집중해 있으나 솔책도에도 일부 주민이 거주한다. 솔책도 길가에 폐가들이 몇 채 보였다. 모두 도시로 떠난 것일까?

 

 

 

▲서검도 솔책선착장, 배가 도착하는 시간인데 쓸쓸하다. 집들은 솔책도의 몇 안 되는 주택들이다.
▲솔책선착장 주변의 그물과 젓갈용 통들이 정리되어 있다.
▲주인이 떠나고 방치된 폐가, 솔책도 주변엔 이런 집들이 여럿 보인다.
▲운영을 중단한 양식장 모습

 

    서검도 마을까지는 약 1㎞ 정도 시멘트 포장도로를 걸어 들어가야 한다. 좌측은 제방, 우측 갈대숲 너머로는 벼가 자라는 드넓은 논이다. 가로수도 없는 길, 7월의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타박타박 걸어 들어간다.

 

 

 

▲솔착에서 안동네로 들어가는 길은 죄측으로 제방을 끼고 거의 1킬로 정도 이어진다.
▲갈대숲 뒤로 한창 벼가 자라고 있는 드넓은 논이 펼쳐져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안동네에 도착, 이 외로운 섬에도 차량이 있는 것이 이채롭더.

 

  서검도에는 40여 세대, 주민은 80명 정도가 살고 있으나 거의 노인들이다. 예전에 서검도는 어업 전진기지로 해상교통의 중심지였으나 지금 주민들은 해상 통제로 인해 쌀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부근 해역에서 소규모 수산·양식을 겸할 뿐이다. 학령인구가 없어 삼산초교 서검분교는 설립 47년 만인 1994년 2월 문을 닫아 27년째 폐교된 그대로 남아 있다.

 

   서검도에는 관광명소가 없다. 다만 서북쪽에 있는 서검저수지에서 낚시하기 위해 오는 낚시꾼들과 민간인이 자유롭게 드나들게 된 뒤부터 서검도 트레킹족들이 호기심으로 찾아들 뿐이다.

 

   따라서 서검도에는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하나도 없어 불편하다. 민박, 식당, 매점도 없으니, 하루 묵을 수도 없고 먹을 것을 준비해 가야 한다. 공중화장실도 없고 앉아 쉴만한 벤치 하나 없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섬인 탓도 있지만, 찾아오는 사람들도 별로 없으니 준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마을회관, 보건소, 서검도교회, 파출소 등 마을을 기웃거리며 돌아보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동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적했다. 

 

 

 

▲마을회관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보건진료소(위)와 파출소(아래)
▲서검도교회 건물(위)과 내부(아래)
▲길가의 꽃과 고양이가 낯선 방문자를 맞이한다.
▲마을에 공급하는 LPG저장소

 

▲공동으로 사용하는 동네 우물

 

서검도 트레킹

 

  서검도 트레킹의 특징은 섬이라는 고립감 속에서 호기심을 안고 북녘을 바라보며 걷는다는 데 있다. 특별하게 정해진 코스도 없다. 처음 서검도에 오는 이들은 선착장에서 마을까지 이동하여 마을을 먼저 둘러보고 마음 내키는 대로 걸으면 된다.  

 

  나는 마을을 대충 둘러보고,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에서 두레박을 이용하여 물 한 모금 마시고 서검교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면 서검저수지에 이른다.

 

  서북쪽에 있는 서검저수지는 낚시터로 개장되어 타지에서 낚시꾼들이 많이 몰려온다. 오랜 기간 통제되었던 곳이기에 저수지에는 지금도 물고기들이 제법 많다. 평일인데도 좌대에 앉아 낚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땅한 식당이 없는 서검도이기에 낚시터 관리인의 집에 부탁하여 식사를 해결한단다.   

 

 

 

▲서검도교회 앞길을 따라 걷는길엔 들꽃이 지천이다. 드넓은 논은 간척으로 일군 서검도의 곡창지대
▲서검도 저수지는 낚시터로 운영 중이다. 평일인데 낚시하는 모습이 보인다.
▲서검낚시터 관리인의 집, 손님의 부탁을 받으면 식사도 해준다고 한다.
▲괸리인의 집 뒤의 텃밭에서 옥수수를 따는 아낙네

 

  낚시터를 지나 서쪽 군부대 감시초소가 있는 곳에서 길은 끝난다. 철조망으로 막혀 가던 길로 돌아 나오든지 아니면 해안으로 내려가 해안 길을 걸으면 된다. 해안을 끼고 도는 길이 따로 없으니 해안을 따라 그냥 걸어야 한다.

 

  드넓게 펼쳐진 갯벌이 서검도의 볼거리라면 볼거리다. 해안을 따라 걷다 보면 갯벌은 온갖 갯것들로 부산하다. 나그네 발소리에 놀란 게들이 잽싼 걸음으로 순식간에 구멍으로 몸을 숨긴다. 서검도 서쪽 바다 가까이 떠 있는 조그마한 섬 납도가 정겹게 시야로 들어온다. 섬에 딸린 또 하나의 작은 섬을 보는 것은 왜 그리 반가운지.

 

 

 

▲서검낚시터에서 끝까지 걸으면 멀리 초소가 보인다. 길은 초소 앞에서 끝나고 발길을 돌린다.
▲섬의 특수성 때문에 서검도 주민은 어업활동에 큰 위축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시간이 남으면 서감도 동쪽 끝 송신탑이 있는 숲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밭에는 고구마와 참깨, 콩, 땅콩이 자라고 있다. 걸어가는 길에 만난 마을 주민이 혹시 뱀이 나올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면서 고라니가 뛰어나와도 놀라지 말라고 한다. 오랫동안 통제되었던 땅이라 지금까지도 야생동물들이 자유롭게 뛰놀 수 있는 환경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도 특색이다. 그런데 뱀도 고라니도 보지 못해 한편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서검도 트레킹은 어떻게 코스를 잡든지 섬 전체를 돌아보는데 3시간이면 족하다. 하지만 남다른 광경에 눈을 팔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훨쩍 지나 육지로 나가는 시간을 잊을 수도 있다.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배 시간에 맞춰 돌아볼 시간을 안배해야 한다.

 

 

 

▲고구마, 참깨, 땅콩 밭을 지나서 서남쪽 숲길로 접어든다.
▲동쪽 끝 송신탑으로 가는 길
▲서검도 탐방을 마치고 선착장에 나와 기다린다. 선착장 끝에 갈매기도 기다리고 있다.

 

 

미법도 주민이 겪은 아픔

 

  서검도에서 미법도까지는 배로 약 10분 걸린다. 미법도는 면적 0.95㎢, 해안선 길이 4.8km로 서검도보다 작다. 주민은 16가구 26명이 살고 있다. 미법도는 섬이지만 전형적인 농어촌 마을이다. 대부분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논농사가 많다. 자연마을로는 미법마을이 있다.

 

  옛날 서검도에서 한강 하류를 통해 한양으로 가는 선박을 통제 검열하였는데 미법도부터는 검열하는 곳이 끝난다고 하여 ‘그칠 미(彌) 자’와 ‘법 법(法)자’를 사용하여 ‘미법도(彌法島)’라고 했단다.

 

  선착장 입구에는 ‘1996년도 범죄 없는 마을’ 지정표지판이 있다. 시멘트 길로 잘 포장된 마을 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오른쪽에 배가 하나 비스듬히 누워 있다. 이 배는 ‘미법호’로 군에서 미법도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다.

 

 

▲미법도선착에 들아서는 카페리
▲미법도선착장의 하가로운 풍경
▲미법호, 군에서 만들어준 배가 카페리 운항으로 운항을 중지한채 전시용으로 남아있다.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해상 군사분계선이 미법도에 그어지게 되고, 강화군의 10개 섬 중에 미법도는 분단의 아픔을 가장 많이 겪은 섬이 되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만들어진 바다의 군사분계선은 미법도가 겪어야 할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북한과의 접경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겪은 고통이다.

 

  1965년 10월 일명 ‘함박도 사건’으로 주민들의 집단 납북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 때문에 미법도는 비운의 섬이 된 것이다. 과거 ‘간첩죄’라는 무서운 죄목으로 정부가 주민 대부분을 ‘빨갱이’로 몰아세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는 1965년 10월 2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법도 112명의 주민이 비무장지대에 있는 황해도 은점벌에서 조개잡이를 하던 중 집단으로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미법도 집단 납북 사건'이다. 이들 중 104명은 그해 11월 20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그 후 1976년, 미법도 주민들은 다시 납북된다. 이 때 납북될 뻔 했다가 현장에서 도주해 납북을 피한 이들과 납북됐다가 송환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마을의 어떤 이는 ‘인천제철 폭파 공작’ 혐의로 사형선고를, 또 다른 어민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이나 복역하기도 했다. 1980년대 대표적 공안 조작 사건의 하나인 ‘미법도 간첩 사건’의 전말이다.

 

  이 사건은 2012년 9월 대법원에 의하여 국가가 피해 가족에게 25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누명을 벗고 종결되었으나, 미법도 주민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은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미법도 마을회관
▲미법도 마을 앞에 떠있는 어선, 미법도의 아픈 역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까?

 

30명도 안 사는 미법도에 웬 절?

 

    마을의 길을 따라서 끝까지 가면 마을회관이 나오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미법사’란 절이 하나 있다. 미법사로 가기 전 주변에는 넓은 전답들이 있다. 평화로운 농촌 분위기이다. 마을 주위에는 울창한 숲이 있고 나무들이 대체로 크다. 섬에는 대부분 물이 부족하고 샘을 파도 염분이 있어 곤란한데 미법도는 땅만 파면 양질의 물이 나와 농사를 짓는 것이 그만이란다.

 

  마을 중앙의 마을회관을 지나 섬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섬 뒤의 고개를 넘어서면 미법사가 나온다. 열 가구도 채 안 되는 섬에 절이 있다는 게 특이하다. 인구가 고작 30명 정도인데 무슨 절이냐 할 것이다.

 

  원래 미법사는 옛날 중국 사람들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전에 잠깐 들러 쉬던 곳이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귀양을 오곤 하는 애환의 섬으로 변했다. 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미법도에서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듣고 바다를 건너온 어느 스님이 이 절에서 억울한 영혼을 달래주었다고 하는데 그때 지은 절이 바로 미법사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5년 전에 다시 지었다.

 

  신축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절 입구에는 장승 2개가 버티고 있는 모습이 한가롭다. 건물들은 제법 번듯한데 절 이름은 바위에 ‘미법사’라고 조잡하게 쓰여 있다. 스님 한 분이 매일 치성을 올리고, 절 주변의 텃밭을 가꾸고 있다.

 

 

 

▲미법도에는 교회는 없고, 유서 깊은 미법사라는 절이 있다.
▲아름다운 미법도 해변

 

  호젓하기 그지없는 미법도를 둘러보고, 하루해가 기우는 시간에 석모도 하리선착장으로 가는 배가 들어온다. 카페리의 고물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물결이 지는 해를 받아 반짝거린다. 나는 서해 북방해상에 외롭게 흔들리며 떠 있는 서검도와 미법도를 뒤로하고 이 땅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깃들날을 기원하며 돌아왔다.

 

  서검도 미법도 바다는 잔잔하더라

  오가는 뱃길에 사람의 발길 끊어지고

  벼가 쑥쑥 자라는 들판도 고요하더라

  고양이 한 마리 졸고 있는 마을에는

  돌 틈에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만 반기더라

 

  잔잔한 바다, 평화로운 땅

  일렁이는 역사의 물굽이 거세어질 때마다

  바다가 느닷없이 하늘 되던 멀미의 기억

  선량한 가슴 못질하던 아픈 이야기를

  한가하게 드러누운 7월 대낮의

  저 갯벌은 알고 있을까?

 

  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갯벌 너머

  멀리 시야에 어른거리는 북녘 땅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자욱한 안개 걷어내고

  고깃배 자유로이 이 바다 왕래하는

  부두에 왁자지껄  순이 철이 목청껏 부르는

  그날은 언제일까?

 

순수한 자연 그대로인 두 섬과 만난 것은 오래도록 나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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