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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빌려줄 몸 한 채 / 김선우

by 혜강(惠江) 2020. 4. 26.

 

 

 

 

 

빌려줄 몸 한 채

 

김선우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 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 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 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2003)

  

 

시어 풀이

*결구(結球) : 야채의 잎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 공 모양을 이룸

*알불 : 재 속에 묻히거나 화로에 담기지 않은 불등걸.

*공양간(供養間) : 절의 부엌을 이르는 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배추가 자라는 과정에 대한 관찰을 통해 희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생태적 원리 속에서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는 깨달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배추를 심은 경험을 바탕으로, ‘관찰-깨달음의 구성 방식을 통해, '스스로 겉잎 되어',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배추의 모습을 통해 '빌려줄 몸'을 통한 희생과 배려의 의미를 의인화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1~9행에서는 겉잎의 희생으로 속이 차오르는 배추의 성숙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화자는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 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그게 아니었다며, 그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 준다. 배추는 처음부터 속이 꽉 차고 겉에 있던 잎이 녹색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모든 잎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다가 차츰차츰 안으로 뭉친다. 그리고는 땅에서 가까운 잎, 바로 제일 바깥에 난 잎이 겉잎이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땅에서 제일 가까운 겉잎의 보호가 없이는 결구, 즉 채소 잎이 여러 겹으로 겹쳐서 둥글게 속이 드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겉잎의 희생 덕에 속잎들이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이치 말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게 된 것은 처음부터가 아니라,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 본 후에/ 알게 된 것이라고 한다. 시인은 채마밭을 빌려 뒤늦게 심은 배추가 자라는 모습을 통해 둥굴게 속이 찬 배추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화자는 그것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나아가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것,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처음 자리에 길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며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같은 자발적인 희생과 배려 없이는 세상을 밝혀 주는 등불과 같은 희망은 기대할 수 없으며, 먼저 양보하고 베풀어야 이 생기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빌려줄 몸 한 채>이다. 여기서 말하는 몸 한 채는 바로 배추의 겉잎이다. 겉잎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했기에 다른 몸, 즉 속잎들이 노랗게 결구를 짓지 않았겠는가. 즉 겉잎의 희생이 없으면 속잎들의 결구도 없었으리라. 시인의 깨달음 즉 배추를 키우며 시인이 알게 된 것은 바로 자신의 노력 없이 대가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 배추 겉잎의 희생으로 속잎은 노랗게 결구를 지을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속이 꽉 찬 배추를 만들 수 있듯이, 희생을 통해서만이 등불을 기대할 수 있고, 나아갈 을 열어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던지고 있다.

 

 

작자 김선우(金宣佑, 1970 ~ )

 

시인.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계간 창작과비평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힘동인으로 활동. 주로 여성과 생명에 대한 공감과 관심을 표현한 작품들을 써왔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2000), 물 밑에 달이 열릴 때(2002),도화 아래 잠들다(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2007), 아무것도 안 하는 날(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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