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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낙화, 첫사랑 / 김선우

by 혜강(惠江) 2020. 4. 25.





낙화, 첫사랑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2007) 수록

 

 

시어 풀이

*부둥키다 : 두 팔로 힘써 안거나 두 손으로 힘껏 붙잡다. 애써 꾸려 나가거나 강한 애정을 가지고 집착하다.

*수선스럽다 : 정신이 어지럽게 떠들어 대는 듯하다. 시끄러워서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듯하다.

*처마 : ‘치마의 잘못.

*추락(墜落) : 높은 곳에서 떨어짐. 위신이나 가치 따위가 떨어짐.

*강보 : 포대기.

 


이해와 감상


 이 시는 2007년에 출간된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 수록된 작품으로,

떨어지는 꽃과 떠나가는 그대로 인한 서러움이 중첩되면서, ‘그대와의 동일시를 통해 사랑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형상화한 시이다.

 

 화자는 낙화와 그대의 이미지를 중첩시키고 있으며, 이별의 상황을 수용하면서 사랑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을 경어체의 독백적인 어조를 사용하여 이별의 슬픔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에서 화자는 그대의 떠남을 말리지 않고 지켜보면서 사랑하는 그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려 한다. ‘그대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그대낙화와 떠나는 사랑하는 임’, 곧 화자의 첫사랑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얼핏 보면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낙화첫사랑이지만 화자는 그것들에서 이별이라는 공통점을 이끌어 낸다. 그런데 지금 그대아찔한 절벽 끝에 서 있다. 이 장면은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 서 있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대와의 이별장면을 꽃이 떨어지는 낙화 이미지에 비유한 것이다. 시인에게 그대와의 이별은 이처럼 그대가 아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 그 추락을 앞두고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화자는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지켜보겠습니다등의 태도가 그것이다. 화자는 자신과 이별을 결심한 그대를 원망하거나 붙잡는 대신 이별내 사랑의 몫으로 간직하겠다고 진술하고 있다. 붙잡지 않고 지켜보며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는 방법,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소유하는 방법이라 인식하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2연에서는 그대와의 동일시를 통한 사랑의 완성을 노래한다. 화자는 그대를 받기 위해 먼저 떨어지겠다고 한다. 먼저 바닥에 닿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다고 한다. 1에서의 태도가 사랑의 완성을 위한 소극적 태도라면, 2에서의 태도는 보다 적극적이다. 이러한 적극성은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깨달았습니다.‘라고 표현한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문맥상 그대를이 들어갈 자리에 내 생을이 들어감으로써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대를 받겠습니다대신 나를 받겠습니다로 표현한 마지막 행에서 다시 확인되고 있다. 아무튼 화자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깨달을 수 없음을 알기에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그대를 받겠다고 한다.

 

 결국, 이 시는 이별과 죽음은 삶이 일부이고, 그것에 대한 긍정 없이는 어떠한 사랑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깨달음 속에서 낙화, 즉 떨어짐은 한 존재의 소멸인 동시에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처럼 자신을 긍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

 

 이렇듯, 이별, 낙화, 죽음까지도 긍정하고, 오히려 남보다 앞서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태도가 완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음을 아는 화자는 비단 사랑하는 임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확장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해설 시인 남상학)      

 

작자 김선우(金宣佑, 1970 ~ )

 

 시인.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계간 창작과비평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힘동인으로 활동. 주로 여성과 생명에 대한 공감과 관심을 표현한 작품들을 써왔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2000), 물 밑에 달이 열릴 때(2002),도화 아래 잠들다(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2007), 아무것도 안 하는 날(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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